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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소설보다 더 재밌는 우리 땅ㆍ인물ㆍ역사 이야기

《소설보다 더 재미난 조용헌의 소설(小說)》 조용헌, 랜덤하우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소설.

말 그대로 ‘작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소설’이라 하면 무언가 긴 호흡의 이야기를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이 책에서 다루는 ‘소설’은 보통 10분 이내로 할 수 있는, 원고지로 따지면 10매 안팎의 짧은 이야기다.

 

지은이 조용헌은 재야의 기인과 고수들을 두루 만나 천문, 지리, 인사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한국 고유의 문화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 <조선일보>에 ‘조용헌 살롱’을 인기리에 연재하고 있고, 동양철학을 재미있게 풀어내는 작가로 이름이 높다.

 

이 책, 《조용헌의 소설》은 짧은 이야기 261편을 두 권으로 나누어 전달한다. 조선일보에 연재된 칼럼을 기반으로 구성했고, 10분 이내로 충분히 할 만한 ‘작은 이야기’ 가운데 세간의 여론, 재미, 정보를 두루 담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이야기 세 편이 있다. 첫째는 ‘푸레독’ 이야기다. 검으면서 푸르스름한, 신비로운 색감을 자랑하는 푸레독은 유약을 바르지 않은 옹기다. 코팅 효과를 내는 유약을 쓰지 않고 1,200도 온도에서 굵은소금을 넣는다.

 

솔가지를 태우면서 발생한 연기가 그릇으로 침투해 검으면서 푸르스름한 색깔을 빚어낸다. 푸레독은 옹기이면서도 독특한 격조를 풍겨 궁중에서 임금의 쌀을 담아놓는 ‘어미(御米)독’으로도 쓰였고, 주로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다.

 

옹기는 공기가 드나드는 통기성이 좋은 그릇이다. 물은 통과하지 못해도 공기는 통과한다. 지은이는 주변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옹기의 특성은 섭씨 1,200도라는 고열의 불로 한번 지지는 ‘불의 공덕’이 있어서라고 표현했다.

 

(p.80)

팔자를 바꾸려면 거듭나야 한다. 어떻게 해야 거듭나는가? 불로 지지는 수밖에 없다. 성령(聖靈)의 불로 한번 태워야지, 숙세(宿世)의 업장(業障)이 소멸되고 다시 태어난다. ...(줄임)....1,200도 정도가 되면 옹기 흙에 들어 있는 유기물질로 인해서 미세한 구멍이 생긴다. 이 미세한 구멍이 ‘나와 너’를 단절시키지 않고 소통시켜 주는 작용을 한다. 옹기를 보면서 불의 공덕을 실감한다. 옹기는 발효 식품과 곡식을 저장하는 기능으로 세계 최고이다.

 

그런가 하면 고서들을 모아서 문고를 만드는 것으로 일제에 저항한 문중도 눈길을 끈다. 대구에 가면 남평 문씨들이 고서를 모아서 만든 ‘인수문고(仁壽文庫)’가 있다. 인수문고는 1910년 나라를 잃은 뒤 세워졌는데,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문중 문고라고 한다.

 

만주로 무장 투쟁을 하러 가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자존심을 버리고 일본 사람 밑에 들어가기도 원치 않았던 대구 인흥리의 문씨들이 선택했던 삶의 방식은 책을 수집해서 만권당을 세우는 것이었다.

 

민족의 역사를 지키고, 문씨 자녀들을 문중에서 자체적으로 교육하기 위해서였다. 인수문고가 소장하고 있는 도서는 8,500여 책에 달하며, 권수로는 약 2만 권에 이르는 분량이다. 도산서원의 장서가 4,400책이니 그보다 훨씬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장서를 비치하기까지 전 재산을 들였다. 국내는 물론 나라 밖의 귀중 도서도 많았다. 중국에서 산 책들은 상하이에서 선적되어 목포에 도착했는데, 변변한 도로가 없던 시절인 만큼 수백 권 분량의 비싼 책들을 운반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88고속도로 이전까지는 영ㆍ호남을 횡단하는 큰 도로가 없었던 까닭이다. 책을 실은 소달구지가 목포에서 출발해 남원, 함양, 거창의 험난한 산길을 지나 대구 인흥리까지 오려면 적어도 보름은 걸렸다.

 

(p.195)

인수문고는 이처럼 엄청난 시간과 정력을 투자한 결과이다. 만권당은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자기 주체성을 지키겠다는 자존심과 기백, 그리고 당대 명사들과의 다양한 인맥이 없으면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수문고는 해방 이전부터 전국의 호학(好學)하는 명사들이 즐겨 찾았던 살롱이기도 하였다. 보름이고 한 달이고 간에 편안하게 머무르면서 책을 볼 수 있도록 문씨들이 편의를 제공하였다.

 

선비 집안의 필수 가구였던 약장 이야기도 흥미롭다. 약장은 우리나라 중산층 이상의 선비 집안에 많이 있었던 가구라고 한다. 의원이 귀하던 시절, 갑자기 환자가 생기면 평소에 허준의 《동의보감》을 숙독한 가장이 직접 처방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17세기 초반 《동의보감》이 대중화된 이후로 약장은 선비 집안의 필수 목가구로 거듭났다. 당쟁으로 귀양을 갈 때도 약장은 꼭 가져갔다고 한다. 약장의 내부 서랍은 보통 가볍고 좀이 먹지 않는 오동나무로 만들고, 바깥 재료는 느티나무를 많이 사용했다.

 

(p.165)

17세기 초반 허준의 《동의보감》이 출판되어 나오면서 양반 선비들은 집 안에다가 이 책을 비치해 놓고 틈만 나면 공부를 하였다. 그래서 공부한 선비라고 하면 《동의보감》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줄임)... 문제는 한약재였다. 약재가 있어야 처방을 할 게 아닌가. 우리나라는 삼천리가 금수강산이다. 전국 어디든지 동네 밖의 산에만 올라가면 약재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환경이다.

 

약재만 지천으로 널린 게 아니다. 삼천리 금수강산에는 그만큼 이야기도 켜켜이 쌓여있다. 조용헌은 이런 이야기들을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리듯, 재담을 펼쳐놓는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신기하면서도 재밌고, 또 우리 땅의 인문지리에 대해서도 점차 해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 땅에 살면서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면, 우리 역사의 숨은 이야기나 인물에 대해 여전히 모르는 바가 많다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조금은 신비로운 동양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