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국악원(원장 직무대리 황성운)의 송년공연 ‘나례(儺禮)’가 20일 낮 3시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렸다. ‘나례’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그믐날 밤 궁중과 관아, 민간에서 묵은해의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태평한 새해를 맞이하고자 고려부터 조선까지 행해졌던 의식이다. 궁중에서 펼쳐진 ‘나례’는 궁중 예인을 비롯해 민간의 으뜸 광대들이 함께한 잔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난장(亂場)의 날에는 사관도 들어와 있었지만, 기록하지는 않았다.”라고 할 만큼 자유로운 날이었으며, ‘연화대무’, ‘학연화대처용무합설’ 말고도 민간에서 유행했던 각종 공연을 펼쳤고, 궁중 나례는 계급 간, 계층 간 벽을 허문 왕실의 새해맞이 큰잔치였다.
공연의 시작은 창덕궁 높은 언덕에 올라 나례의 시작을 알리는 국립국악원 정악단의 고취타로 시작했다. 고취타는 군영의 행군, 임금의 행차 등에 쓰였던 대취타를 재구성한 작품으로 땅의 울림을 표현한 진고(통이 긴 북으로, 나무틀 위에 놓고 치는 아악기)를 세 번 치고 연주를 시작한다. 나발, 나각 등의 관악기 연주를 시작으로 타악기가 합류하여 웅장함을 주고 힘찬 울림을 극대화했다.

이어서 창덕궁 네 방위에서 연종포(終砲: 섣달 그믐밤에 쏘는 대포)를 쏘면 지축을 울리는 대포 소리에 각 방위의 지신(地神)들이 깨어난다. 사직제례악 음악에 맞춰 북 현무, 남 주작, 동 청룡, 서 백호의 사방신이 창덕궁 인정전 마당에 들어와 나례를 허락하는 춤을 추는 모습이다. 고구려 고분 사신의 벽화에 나온 사신의 모습을 바탕으로 의상과 소품을 제작하여 사실감을 더했다.
또 민간의 연희패(풍물패)가 궁궐에 들어와 ‘역신을 힘으로만 쫓지 말고 잘 달래서 보내자.’라는 뜻을 담아 서도소리 가운데 악귀를 쫓아내는 소리인 ‘파경(罷經)’을 부른다. 또 ‘너도 먹고 물러나라’라는 후렴을 주고받으며, 장문의 축귀경(逐鬼經)을 유쾌하게 소리한다. 뒤를 이어 국립국악원 정악단이 태평시절의 즐거움과 임금의 불로장생을 축원하는 정악 ‘보허자’를 장엄하게 연주한다. 그리곤 생명의 탄생과 무병장수를 비는 궁중무용 ‘학연화대무’를 국립국악원 무용단이 화려하게 선보인다.
그런데도 이제 역신들이 세를 과시한다. 당대 으뜸 예인들이 춤과 연주로 정성껏 대접했음에도 배은망덕한 역신들은 물러설 기색이 없다. 여기 역신은 역질 뿐만 아니라 백성의 삶을 괴롭히는 유ㆍ무형의 모든 악의적 존재들을 말하고 있다. 특히 지난 한 해 동안 대한민국을 괴롭혔던 온갖 악재들을 상상케 한다. 역신들은 붉은 탈을 쓰고 붉은 지전을 양손에 든 채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고 흩어지며 힘을 과시한다.
이에 전통 나례의 가장 오래된 역할 가운데 하나인 방상시가 등장한다. 귀신을 보는 네 개의 눈을 가졌으며 창과 방패를 들고 역귀를 몰아내는 신이다. 네 명의 방상시들이 방패 대신 대형 탈을 양손으로 들고 성큼성큼 걸으며 역신을 몰아내듯 춤춘다.
이어서 다섯 명의 처용이 나온다. 처용은 중국의 나례에는 없는 것으로 신라시대 때부터 악귀를 몰아내는 역할을 해왔다. 처용은 천연두를 옮기는 역신을 해학으로 쫓아내 인간 아내를 구해냈다는 신라 처용설화에 기원을 둔 궁중무용이다. 동ㆍ서ㆍ남ㆍ북ㆍ가운데를 상징하는 다섯 빛깔 옷을 입고 처용탈을 쓴 다섯 명의 무용수가 각 방위의 역신을 물리치는 씩씩하면서도 호탕한 남성적인 춤을 춘다.
처용에 뒤이어 창과 칼을 든 십이지신이 역신을 상대한다. 십이지신(十二支神)은 쥐ㆍ소ㆍ범ㆍ토끼ㆍ용ㆍ뱀ㆍ말ㆍ양ㆍ원숭이ㆍ닭ㆍ개ㆍ돼지의 열두 띠 동물을 말한다. 십이지신은 도드리를 시작으로 휘모리까지, 일곱 개의 장단에 맞춰 역신들과 일진일퇴의 역동적인 공방전을 벌이지만 결국 십이지신은 역신에 몰리고 있다.
이에 흰옷을 입은 아이들 곧 ‘진자(侲子)’들이 복숭아 나뭇가지를 들고 등장한다. 진자들은 창작 동요 '훠이훠이 물렀거라'를 부르며, 나뭇가지로 액을 쓸어내 땅따먹기하듯 역신들을 몰아세워 항복을 받아낸다. 역시 우리의 새로운 희망은 아이들이다. 창작 동요 '훠이훠이 물렀거라'는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유지숙 예술감독이 작창한 것으로 국립국악중학교 학생들이 출연했다.
역신을 물리친 뒤 군기시에서 주관하는 화희(불꽃놀이)를 막에 영상으로 보여준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기록에 따르면 궁궐 뒤뜰에 미리 도구를 설치해 두고 때가 되어 대포 끝에 불을 붙이면 순식간에 연기가 나고 불이 활활 타오르며 대포를 싼 종이는 모두 산산조각으로 터지면서 그 소리가 천지를 울린다고 한다. 또한 미리 불화살 수천수만 개를 궁궐 동쪽 멀리 떨어진 산에 묻어 두었다가 불을 붙이면 불화살이 무수히 하늘로 발사되고 온 하늘이 별똥별로 뒤덮인 듯 번쩍번쩍 빛난다는 기록도 있다.
불꽃놀이와 함께 나래의 끝을 알리는 정악단의 ‘대취타’가 연주되고, 불꽃 밑에서 펼쳐지는 가장 화려한 놀이 ‘향아무락(響訝舞樂)’을 무용단이 펼친다. 궁중무용 ‘향아무락’은 역신을 물리친 구나를 축하하고 태평신년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2025년 국립국악원 송년공연 ‘나례(儺禮)’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국립국악원 정악단, 민속악단, 무용단 등 130여 명의 단원이 출연하여 정악은 물론, 민속악과 평소에는 볼 수 없는 궁중무용까지 선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종묘제례악 연주에나 볼 수 있던 편종과 편경 등의 연주를 직접 볼 수 있는 행운까지 준 연주였다.
묵은해의 역귀를 몰아내고, 태평한 새해를 맞이하고자 펼쳐진 연말 의식, 기존 궁중나례에 재담꾼과 역신을 등장시켜 이해하기 쉽도록 현대적으로 재창작한 공연이었다. 재담꾼이 마지막에 강조한 지난 을사년 한 해의 큰 어려움,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대한민국의 큰 숙제는 이 ‘나례(儺禮)’ 공연 한판으로 역신과 함께 물러나리라 믿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