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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박물관에서 ‘유물멍’ 하기

《유물멍: 가만히 바라볼수록 좋은 것들》, 국립중앙박물관, 세종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6-7)

생각이 이리저리 일어날 때는 유물 앞에 가만히 있어 보세요.

앙증맞은 형태나 재치있는 표현이 와닿아서든 어떤 기억을 불러와서든, 내 마음을 끄는 유물을 바라보다 보면 잡다하게 일어나는 생각이 잦아듭니다.

모닥불이나 숲, 바다를 바라보는 것처럼 고요해집니다.

 

불멍, 물멍, 유물멍 …

온갖 도파민과 자극이 난무하는 세상에서는, 무념무상하게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작은 호사다. 생각을 비우고 ‘그저 바라볼 수 있는’ 시간. 어쩌면 현대인이 갈망하면서도 쉽게 누리지 못하고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펴낸 이 책, 《유물멍: 가만히 바라볼수록 좋은 것들》은 박물관이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아침, 구독자에게 보내는 유물 이야기인 「아침 행복이 똑똑」에서 좋은 글을 가려낸 것이다. 학예사부터 작가, 새 학기를 앞둔 아이까지 유물을 보는 다채로운 시선과 참신한 생각들을 담았다.

 

 

어려운 연대와 역사적 사실을 공부하지 않고도, 그저 멍하게 유물을 바라보다 생각난 것을 자유롭게 써 내려간 느낌이어서 더욱 진솔하다. 「아침 행복이 똑똑」의 구독자가 10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유물을 바라보는 시선도 족히 10만 개는 될 듯싶다.

 

그 가운데 유난히 눈길을 끄는 유물 몇 가지가 있다. 단산에서 만든 검은 옥이라는 뜻을 ‘단산오옥(丹山烏玉)’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먹이다. 먹은 예로부터 마음을 다스려주는 은은한 향이 있어 ‘검은 옥’으로 불렸다.

 

 

단산은 지금의 충청북도 단양으로, 우리나라 으뜸 먹 생산지였다. 청주 명암동에서 출토된 단산오옥 고려 먹(보물)과 더불어 우리나라 전통 먹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소중한 유물이다. 마치 양갱처럼 보이는 먹은 사진만 봐도 은은한 먹향을 뿜어내는 것 같다.

 

한편, 무령왕릉을 지키는 진묘수를 보며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달래는 글도 마음을 울린다. 불확실한 미래가 주는 불안을 견디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단한 일이다. 그럴 때, 진묘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근심이 살며시 덜어지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p.190) 어두워도 씩씩하게

독서실 칸막이 아래서 시험 준비를 하다 보면,

문득 이 좁은 자리가 내 무덤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찾아오는 날엔

무령왕릉 진묘수 사진을 찾아봅니다.

겉모습은 아담하고 귀엽지만, 어둠 속 제일 앞에서 왕릉을 지킨 진묘수.

아직은 아니지만, 저도 언젠가 세상에 멋지고 늠름한 모습으로 발견될 날을 상상합니다.

진묘수의 고독에 비하면 젊은 날 고생쯤이야 사서도 할 수 있어요.

‘나는 발효의 민족, 묵을수록 더 강해지는 대한민국의 취준생이다’

다짐하면서, 집으로 가는 깜깜한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곤 합니다.

 

책의 뒷부분에는 괘불이 박물관 전시로 우리 곁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과정을 거치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괘불은 말 그대로 야외에 거는 부처님 그림이다. 작게는 4~5m에서 크게는 14m까지, 아파트 7층 높이에 이르는 것도 있다.

 

괘불은 조선 시대 불교 의식의 필수 요소였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큰 전쟁을 겪고 나면 절에서는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천도 의식을 거행하곤 했다. 이런 규모가 큰 의식을 점차 야외에서 치르게 되면서, 조선의 주요 절에는 대부분 괘불이 있었고 지금도 120여 점이 넘는 괘불이 전해지고 있다.

 

괘불은 승려들이 예술 감각을 발휘해 그렸다. 폭 20~30cm 삼베를 이은 바탕에 밑그림을 그리고 여러 차례 색을 칠했다. 수많은 사람이 괘불의 바탕이 되는 삼베, 칠을 위한 물감 등 괘불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을 시주했다. 오늘날로 치면 기부자의 십시일반으로 완성되는 대규모 공공미술 작품이었다.

 

 

절에서 직접 괘불을 볼 기회는 무척 드물다. 평소에는 괘불을 긴 함에 넣어 법당 뒤편에 보관하고, 특별한 법회가 열려야 야외로 함을 옮겨 괘불을 펼친다. 함까지 무게가 300kg이 넘을 때도 있어 절에서도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해마다 봄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절에 소장된 괘불을 옮겨서 전시하곤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괘불을 거는 일도 만만치 않다. 우선 운반할 때부터 괘불이 봉안된 전각도, 괘불도 문화유산인 경우가 많아 포장이 쉽지 않다. 괘불 전시를 담당하는 학예사와 괘불을 옮기는 운송사 직원들 모두 괘불을 옮기기에 앞서 세 번 절을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옮긴다.

 

(p.258)

박물관에 들어온 괘불은 사람처럼 건강검진을 받습니다. 박물관 보존과학자는 담당 학예연구사와 함께 꼼꼼히 괘불을 살피며 안료가 탈락하거나 갈라진 부분을 점검하고, 전시할 때 주의해야 하는 부분을 확인합니다. 괘불을 걸 준비가 끝나면 학예연구사와 운송사 대표가 삼배를 올립니다. 합을 맞춰 기계를 작동하고, 안전을 살피며 멈춤과 작동을 반복하다 보면 수백 년 동안 모셔 온 대형 화폭이 전시실에 펼쳐집니다. 매년 관람객들이 만나는 괘불 뒤에는 이렇게 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숨어있습니다.

 

박물관에 있는 유물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우리에게 말을 건다. 유물과 어떤 대화를 하는지는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또 보고 싶은 부분에 따라 달라진다. 수많은 해석과 감상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 유물이 가지는 무궁무진한 매력 가운데 하나다.

 

점점 거세지는 추위를 피해, 오랜만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들러 ‘유물멍’을 해보면 좋겠다. 모닥불을 바라보는 ‘불멍’ 못지않은 따뜻한 느낌을 누릴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만의 ‘반려 유물’을 발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