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집에 갔다
그가 평생을 바쳐 만든 영혼의 집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비탈진 언덕길
그의 집을 지키는 천 마리 학
누가 접었나 묻지마라
평화가 입으로 지켜지는 것이라면
누가 그 작은 색종이에 꿈을 접을까?
노랑
파랑
빨강
그리고 까망
암흑의 날
굴하지 않은 조선인의 투지
마사하루 목사 도와
천 마리 학 접던 고사리 손들
평화는
거기서 조금씩 싹터 오는 법
모진 편견 헤치고
홀로 비바람 막으며
용감히 부르짖었네
일본은 피해국 이전에
아시아에 끼친 해악을 헤아리라고
그를 기억해야한다
천마리 학들이 감싸안은 그 이름
오카마사하루.
<조선인의 상처를 보듬은 재일조선인 인권 목사 오카마사하루(岡正治, 1918-1994)>
“전쟁이나 원폭의 비참함을 언제까지나 가슴속에만 새겨두면 안 된다. 이러한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이 일본 측에 있으며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있었음을 확실히 알려야 한다. 일본 자신이 패전으로 받은 상처를 보듬기 이전에 아시아 이웃나라에 고통을 준 역사를 먼저 알지 않으면 평화는 절대 이룩되지 않는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희생된 외국인들은 전후 50년이 되었어도 아무런 보상도 없이 방치됐다. 가해의 역사가 숨겨졌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보상도 안 하고 사죄도 안 하는 무책임한 태도야말로 국제적인 신뢰를 배반하는 일이다.” 이는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건립의 취지문 일부이다.
오카마사하루(岡正治, 1918-1994)를 말하려면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에 관한 일본인의 반응을 보자.
*눈물이 나올 정도로 무언가 강한 느낌을 받았다 (17살, 여성)
*다른 자료관이나 박물관에서 다루지 않는 <강제연행><조선인피폭자> 문제 등이 사진으로 전시되고 있는 게 특이하다 (25살 남성)
*사진을 보고 증언을 듣고 놀랐다. 너무 괴롭고 용서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났지만 내가 울기보다는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일본이 사죄하고 보상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18살 여성)
*정말 대단하다. 전국에 보기 드문 반전자료관(反戰資料館)을 보고 확실한 역사적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60살 여성).
이것은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누리집에 올라 와 있는 일본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다. 일본에는 상당수의 평화자료관이 세워져 있는데 이 자료관의 99%가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피해국 일본”의 역사를 기념하려고 세운 것들이다. 이런 가운데 시민의 손으로 “가해국 일본”에 초점을 맞춘 역사 자료관이 있으니 그곳이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이다.
1995년 10월 1일 문을 연 이 자료관을 만든 중심인물은 오카마사하루(岡正治, 1918-1994) 목사이다. 그는 목사이자 나가사키 시의원을 지냈고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대표를 맡으면서 조선인들의 인권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지금은 일본 쪽에서도 ‘일본이 전쟁 가해책임이 있다.’라는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내고 있지만 패전 후 상당기간 동안 ‘일본의 책임론’은 금기였었다. 그런 가운데 오카마사하루 목사는 주머니를 털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나가사키에 숨겨진 조선인 피폭문제에 매달렸고 실태조사를 위해 발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그는 항상 차별받고 있는 약자 편에 서서 일본정부와 강제노역자들의 노동으로 배를 불린 악덕 기업을 향해 반성과 보상을 촉구해왔으며 만년에는 ‘일본의 가해 책임을 분명히 밝히고 현재도 남아있는 차별 철폐와 정부의 보상을 실현하게 하기 위한 자료관 건립’을 구상했으나 자료관 건립을 보지 못하고 1994년 7월 21일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사후 토지 매입과 건축비 마련으로 애를 먹었으나 십시일반으로 그의 뜻을 받드는 수많은 시민의 손으로 목사가 세상을 뜬 1년 뒤인 1995년 10월 1일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이 문을 열게 되었지만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참고: 일본자료관 사이트 :http://www.d3.dion.ne.jp
*더 자세한 자료: 민족문제연구소 :http://www.minjok.or.kr <나가사키 조선인 희생자 기념탑과 가해 역사 기록의 현장 오카마사하루 기념관> 답사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