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얼마 전, 중국 연변예술대학에서 열린 <한ㆍ중 학술 및 실연 교류회>에 37명의 회원과 함께 참가하였다. 국악속풀이 이번 주에는 올해로 13회를 맞게 된 한ㆍ중 실연교류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볼까 한다.
<한ㆍ중 학술 및 실연 교류회>는 필자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의 전통음악학회와 공동으로 주최하고 있는 연중행사이다. 말 그대로 한국의 전통음악과 중국 연변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조선족 음악에 대한 학술적인 강연과 토론을 통해서 학문적 교류를 하고 그리고 겸해서 양쪽에서 연행되고 있는 전통음악의 실연을 통하여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는 연구모임이다.
이 교류행사는 2000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최초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1990년 7월에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한국과 중국의 수교가 체결되기 직전, 필자는 국내 저명 국악인 20여 명과 함께 처음으로 연변 예술학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중국은 죽(竹)의 장막이어서 조선족 음악에 대한 정보는 접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조선족들이 어떤 악기로 어떤 노래를 부르며 지내는지? 또한, 어떤 음악인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더욱이 민족음악을 지도하고 있는 대학이 있는지? 있다면 교육체계는 어떠한지? 그리고 조선족 음악을 연주하는 전문적인 악단이나 이들의 활동상황은 어떠한가? 하는 점은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정부의 도움으로 《국립국악원》에 와서 경기민요를 배우고 있던 전화자 교수를 통해 연변대학의 초청을 받아서 방문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잠시 1990년도의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기에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공산국가를 방문하기 전, 우리 일행은 반공센타에서 특별교육을 온종일 받은 후에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금처럼 중국의 어느 지방으로 직접비행기가 다니는 것이 아니고 당시에는 홍콩에서 북경으로 들어가고 얼마를 기다려 연변행을 갈아타는 것이어서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도 하였거니와 체제가 다른 공산주의 국가를 방문한다는 중압감에 매우 불안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연변대학 측이 우리의 안내를 위하여 직원 1인을 북경으로 파견해 주었고 우리는 그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의 목적지 연변은 북쪽의 변방이라 비행기도 자주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서 힘들게 탄 비행기는 50여 좌석의 아주 작은 소형이었다. 그리고는 밤이 꽤 늦어서야 연길 공항에 도착하였다.
지금도 고마운 것은 밤이 늦었는데도 불구하고 연변대 교수 일행이 생면부지의 우리를 비행장까지 나와 극진히 환대해 주었다는 점이다. 그 바람에 얼어붙었던 우리의 가슴도 조금씩 녹아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학장실에서 대학의 간부급 교수들과 공식적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종합 예술대학의 체제여서 음악, 무용, 미술, 무용 전공의 부학장이 여러 명이 소개되었고 공산당 서기, 부서기 등도 소개되는 등 다소 미묘한 분위기였으나 이내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환담이 이어졌다. 우리 일행의 면면을 소개한 후, 우리는 가지고 간 책자나 음반, 악보자료 등을 전했다. 어렵게 방문하게 된 대학이기에 기념품을 전달하고자 해도 막상 무엇이 필요한지 난감해서 각자 미화 100달러(한화 약 8만 원)씩 2,000달러를 모아 장학금으로 전달하였다.
떠나기 전, 전화자 교수와 고 황득주, 그리고 필자 등 3인이 불고기와 맥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75,000원짜리 영수증을 확인하던 전 교수가 “내 3개월 신봉이다.”라고 놀래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면 당시 중국에서 100달러면 중견 대학교수 4인의 봉급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익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이번 교류에 대한 일정, 즉 수업참관, 전공별 강좌, 한국음악의 특강, 공연교류, 연주단체 방문, 간담회, 기타 등등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공연에 관한 문제는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이유는 아직 수교국이 아닌 한국에서 음악인들이 방문하여 공개적인 공연을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학당국이 결정하기 어려운 또 다른 정치적인 문제들이 게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연변대학 측은 우리와 교류공연을 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을 하는 눈치였다. 그러던 끝에 대학극장이 아닌 또 다른 장소에서 <연환만회-年歡晩會>라는 제하의 교류음악회를 아주 힘들게 열었다.
먼저 정준갑 교수의 해설로 연변대학의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공연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연주자들이 무대 의상을 갖추지 않고 평상복 차림으로 무대에 오르는 것에 우리는 먼저 놀랬다. 예를 들어 김 진 교수는 양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서 가야금산조를 연주하는가 하면, 장고 반주의 김성삼 교수는 와이셔츠 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나왔다. 또한, 여성 소리꾼들은 한복 차림으로 민요를 부르지만 노래 반주는 대부분 평상복 차림으로 피아노를 치거나 장고를 치는 것이었다.
연주자의 복색도 그렇거니와 노래의 창법에 있어서도 남쪽과는 달리 북쪽의 영향을 받아 가늘고 높은 속소리 일색의 창법이었으며 표정은 미소를 띠면서 밝은 모습이었다.
그들의 연주를 끝낸 다음, 우리는 가지고 간 홍주의와 한복을 입고 필자의 해설로 영산회상의 합주, 홍도후의 대금독주, 황득주의 거문고 산조, 가야금 3중주 침향무, 김영숙의 춤, 김금숙의 경기민요 등을 소개해 주었다.
떨어져 지내는 동안 얼마나 다른 음악을 만들고 연주해 왔는가 하는 점을 비교할 수 있는 뜻 깊은 첫 교류의 무대였다. 연변대학의 최성룡교수는 이 사실에 대하여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90년 7월, 길림성 예술학원 연변분원의 초청으로 서한범(徐漢範) 단국대
교수 외 전통음악인 약 20여 명이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교류음악회를
가졌는데, 이것이 한 중 수교 이전에 가진 최초의 집단행사로 기록되고 있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