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정순임 명창은 해마다 여름, 경주 보문관광 단지 내에 있는 야외무대에《유관순 열사가》를 비롯한 《이차돈》, 《놀보전》과 같은 창극을 제자들과 함께 무대에 올려 성공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8월 초, 경상도 일대에 국지성 소나기가 예고되어 있어 가슴을 졸이는 가운데, 단원들은 수궁가를 바탕으로 마당극 개념을 도입한 《약 일래라, 토끼 간이 약 일래라》를 총연습하고 있었다. 시민들을 위한 무료 봉사였기에 하늘이 도왔는지 끝날 때까지 비는 오지 않았다. 경주에서 창극이 공연될 수 있는 배경은 정순임의 열의와 경상북도의 지원, 그리고 그를 돕는 스태프와 제자들의 의욕이 충족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노래를 부르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극을 <오페라> 혹은 <가극>이라 부른다. <창극>은 판소리를 기본으로 하는 소리극이다. 경기소리나 서도 소리를 기본으로 하는 극은 창극이라 부르지 않고 <경서도 소리극>이라 부른다.
창극의 기본은 판소리이다. 소리가 어느 정도 익어야 창극이 가능한 것이다. 소리가 익지 않으면 아무리 연기가 훌륭하고 사설을 재미있게 옮긴다 해도 가슴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정순임은 제자들에게 소리공부를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날의 공연에서도 출연자들의 소리공력은 그런대로 높게 인정해 주고 싶었다. 또한, 생음악으로 연주되는 반주악기들의 수성가락이나 창작도 수준급으로 평가한다. 다만, 표정연기나 몸짓 연기가 무대 조명의 제한으로 불분명하게 보인다는 점이나, 또는 대사의 전달이 넓은 객석에 골고루 미치지 못한 점들이 다소 아쉬웠다. 그러나 관객 모두가 만족한 공연이었다. 안타깝게 느끼는 점은 이러한 작품을 당일 일회성 공연으로 끝내야 한다는 점이다.
신라의 고도 경주시가 보통의 도시인가!
그토록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피서철에 유형의 문화재뿐 아니라 무형의 문화재와 만날 수 있도록 매주 1회 지속공연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작품은 교육적인 효과도 높고 전통문화의 확산이라는 차원에서 각급학교의 순회공연으로도 매우 적절한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경북 도청이나 경주시청, 교육청 등 관계기관의 적극적인 관심과 함께 동참을 촉구한다.
이날 무대에 올려진 소리제(制)는 동편제 송흥록 판이다.
판소리를 지역적으로나, 혹은 소리의 특징으로 분류할 때, 흔히 동편제와 서편제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동편제의 특징으로는 소리의 잔 기교보다 원가락을 우직하게 부르는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그 시조를 송흥록으로 삼고 송광록- 송우룡- 송만갑으로 이어져 오는 소리라 해서 송판제 소리라 부른다. 이제는 양자의 특징적인 소리제가 서로 섞여 있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 자체를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 편이나, 굳이 구분한다면 정순임의 소리제는 전자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정순임의 수궁가는 1900년대 초, 어전명창이었던 장판개 이후 배설향을 통해, 그의 어머니인 장월중선으로 이어지고 다시 정순임으로 이어오는 정통의 소리로 현재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종목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이러한 소리제를 전해 준 어머니 고 장월중선(1925-1998)은 어떤 분이었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장월중선은 다재다능한 국악인이었다.
조선조 고종 때의 유명한 판소리 명창이었던 장판개(본명-학순)가 그의 큰아버지였으니 그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장판개에게 <적벽가>를 비롯해서 <수궁가>며 <춘향가> 등을 배운 정통파 명창이다. 백부인 장판개 외에도 13세 무렵부터는 김채만-박동실로 이어지는 <심청가>와 <춘향가>와 같은 고제(古制)의 소리를 배우기도 하였다.
판소리뿐이 아니라 고모인 장수향에게 가야금을 배웠는가 하면 오태석을 위시한 당대 최고의 명인 명창들에게 가야금산조와 병창을 배웠다. 소리가 되고 가야금 산조를 잘 탔다고 하면 가야금 병창은 어렵지 않게 익힐 수 있는 분야인 것이다.
그 외에도 아쟁산조가 일품이었고, 살풀이나 승무 등 전통춤에도 특기를 보여 다양한 장르에 두루 통달한 만능 재주꾼이었다. 그는 1952년부터 목포국악원을 운영하면서 내로라하는 수많은 명인 명창들을 길러냈는데, 그 중 안향년, 신영희, 김일구, 백인영 등이 대표적이다. 특별히 그의 장녀인 정순임과 차녀인 정경옥에게 장판개 제의 <수궁가>를 판소리와 함께 가야금병창으로 전해준 것은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장월중선은 1963년에 경주에 정착하면서부터 이 지역에서 판소리를 비롯한 가야금산조, 가야금병창, 아쟁산조, 그리고 전통춤을 전승시켜 왔다. 그러는 가운데 <유관순 열사가>와 같은 창작 소리도 작곡하여 레퍼토리를 확충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예술적 역량을 높이 인정한 경상북도는 지난 1993년, 도(道) 지정 무형문화재로 장월중선 류의 ‘가야금병창’을 지정하여 오늘날까지 보존해 오고 있으며 판소리 수궁가를 지정하면서 그 보유자로 정순임을 인정한 것이다.
경상북도가 가야금 병창이나 판소리에 대한 보존이나 계승 정책을 소홀히 했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소중한 문화자산을 잃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문화관광부는 장판개 - 장월중선 - 정순임으로 내려오는 소리제를 3대에 걸친 명가(名家)의 소리로 지정하여 이 시대에 전해지고 있는 귀한 소리로 높게 인정을 해 주었다.
판소리의 명가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소리공부에 전념하여 일찍이 판소리 특장부에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으며 지난 80~90년대를 국립창극단에 몸담고 있으면서 다양한 역할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대 스타임에도 그는 매우 겸손한 사람이다.
현재, 경북 경주지방에서 판소리와 창극 심는 일을 펼치고 있으면서 요양원이나 노인회관, 재활원을 찾아다니며 소외계층을 위한 봉사공연도 기꺼이 하고 있다. 판소리명가의 소리꾼으로, 판소리 예능보유자로써 신라의 천년고도인 이곳 경주에서 독창적인 전통문화의 확산을 위해 창극을 해마다 무대에 올리고 있는 그의 용기에 경상북도나 경주시를 비롯한 관계당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기를 기대한다. 그동안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습에 몰두한 세천향 단원들과 판소리보존회 회원들, 그리고 연출자를 비롯한 스태프 여러분에게도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내 드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