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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국치일에 생각해보는 침략의 원흉, 후쿠자와

 
                       
 
 
1972년 12월에 일본에서 나온 <역사독본>에는 ‘일본 영웅 100명’이 소개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 후쿠자와 유키치(복택유길) 등이 나란히 등장한다. 정말 이들은 영웅이 될 수 있을까? 답은 'NO'다. 지면상 오늘은 일본이 ‘근대화의 아버지’라 추앙하고 있는 후쿠자와의 더러운 아시아 침략 근성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8월 29일은 101년 전 일본 제국주의에게 조선이 주권을 송두리째 빼앗긴 날로 오늘 우리가 이날을 기억하는 한 ‘후쿠자와 유키치’란 인물도 결코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될 인물이다.

그가 아시아에서 왜 원흉으로 꼽히는지 3가지만 들겠다.

첫째. 후쿠자와 유키치는 (福澤諭吉, 1835~1901) 아시아를 능멸하고 침략을 선동했다.

"조선 침략의 목적은 일본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며 남을 위한 게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이다." "조선국은 사지가 마비되어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이 없는 병자와 같다." "대만인은 오합지졸 좀 도둑떼" "청국병사는 돼지꼬랑지 새끼" "조선과 중국 이 두 나라는 진보의 길을 모르고 구습에 연연하며 도덕마저 땅에 떨어진데다가 잔혹, 몰염치는 극에 달하고 거기에 오만방자하다."

"조선은 본래 논할 가치가 없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당면의 적은 지나(중국)이기 때문에 우선 병사를 파견해 경성에 주둔 중인 지나 병사를 몰살하고 바다와 육지로 대거 지나에 진입해 곧바로 북경성을 함락시켜라." "눈에 띄는 것은 노획물밖에 없다. 온 북경을 뒤져 금은보화를 긁어모으고 관민 가릴 것 없이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빠뜨리지 말고 '창창 되놈'들의 옷가지라도 벗겨 가져와라."

후쿠자와가 단순히 아시아 비하 발언으로 그쳤으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지만 당시 말 한마디로 세상을 뒤흔들만한 입장의 지식인인 그가 ‘아시아 인종은 죽여도 시원찮은 미물’이라고 선동하는 바람에 청일전쟁을 비롯한 일제가 일으킨 숱한 전쟁에서 일본군 병사가 죄의식이 마비된 채 아시아인을 무자비하게 죽이고도 ‘하하하’ 웃을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35년간 조선 반도에서 저지른 일본군의 만행을 기억해보아라! 남경대학살 현장에 가보아라!

후쿠자와는 다시 게거품을 문다 “일본이 조선을 독차지하는 것은 일본의 권리이고 의무이다."라고. 옆에 있으면 뺨때기가 아니라 당장 맞아 죽을 일이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후쿠자와의 오만방자함도 방자함이려니와 이런 인물과 놀아난 개화기의 조선인들도 문제라는 것이다. 후쿠자와가 조선왕조를 타도하라고 집어준 돈 몇 푼을 두고 ‘후쿠자와는 조선에 나쁜 일만 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일본 편이 되어 짝짜꿍하는 자칭 지식인들이 주변에 고개를 드는 시국이 몹시 우려스럽다. "청일전쟁은 문야(문명과 야만, 文野)의 전쟁"이라며 일본을 문명국가의 최고에 올려놓고 있는 모습은 '문명 인식'이라기보다 한 미치광이의 자기도취일 뿐이다.  

둘째, 후쿠자와는 말썽 많은 천황제의 중심에 있었다.

후쿠자와는 천황제를 누구보다도 열렬히 뒷받침한 사람으로 "개인의 재산과 목숨은 천황을 위해 바칠 때 그 가치를 발한다."고 평생 주장했다. 후쿠자와는 <제실론(帝室論)>에서 "천황제는 어리석은 백성을 농락하는 사기술"이라고 간파해 놓고도 평생 천황에 대한 맹세로 일관된 삶을 산 이중인격자이다.

실제로 후쿠자와는 "개전 이래 천황 폐하께서는 대본영을 히로시마로 옮겨 친히 전쟁 관련 업무를 보시고 주야로 침식조차 편안하지 못했다."고 들먹이며 천황도 이런 고생을 참는데 일반 병사의 목숨쯤이야 천황을 위해서라면 초개처럼 버려도 되는 양 호도하는데 앞장섰다. 또 이들의 영혼은 야스쿠니가 책임진다는 궤변으로 전쟁 미화를 부추겨 아시아 청년들을 전쟁으로 내몰아 꽃다운 청춘을 죽음에 이르게 한 마귀이다.

셋째, 후쿠자와 유키치는 가면을 쓴 언론인으로 아시아를 짓뭉갰다.

흔히 후쿠자와를 일본 개화기의 계몽사상가, 교육가, 언론인 등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두고 후쿠자와는 조선의 궁궐을 짓밟은 일본의 의도가 "조선의 국사 개혁을 촉구하고 조선이 스스로 자립하도록 돕는 데 있었다."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이러한 말을 두고 일본인 학자 야스카와 주노스케는 "사건의 진실에 눈감고 은폐로 일관한 몰염치한 언론인"이라며 질타한다.

또 1894년 11월 25일 중국 여순에서 발생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제1군사령관이 저지른 '여순 학살' 사건을 놓고 당시 <뉴욕월드>는 "일본은 문명의 가면을 둘러쓰고 야만의 근육과 골격을 가진 괴수"라고 보도했는데 이에 후쿠자와는 "일본 군대는 문명화된 공명정대한 일을 했으므로 한 점의 비난을 받을 것이 없다."라고 반박해 세계 언론으로부터 큰 비웃음을 당한 적이 있다.

이러한 3가지 사항 말고도 그의 아시아 침략 선동 행위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문제는 일본인 아무도 그를 아시아원흉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흉은커녕 영웅이 되어 일본의 최고 고액권인 1만엔 짜리에서 빙그레 웃고 있는지 27년째이다. 이렇게 일본 내에서 거의 신적인 존재인 후쿠자와에게 돌팔매를 던진 용감한 학자가 바로 야스카와 주노스케이다.

"허풍이라면 후쿠자와, 거짓말이라면 유키치라는 유행어가 돌아다닐 만큼 형편없는 인물이었던 후쿠자와가 어떻게 근대 일본에서 원칙 있는 체계적인 사상가로 자리매김 되었는지 의아하다.” 면서 "지금 일본은 전쟁으로 지샌 어두운 쇼와 시대를 털어내지 못하고 역사의 시계바늘을 명치시대로 돌려놓은 채 그릇된 '스승님' 후쿠자와 모델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밝은 명치시대의 큰 스승으로 추앙받는 후쿠자와야말로 전쟁으로 얼룩진 쇼와 시대를 끌어낸 장본인임을 깨달아야한다. 일본인들이 과거의 집단 최면에서 깨어나는 길이야말로 명치시대에 싹 틔웠던 일본의 아시아 침략사상에 대해 속죄하는 길이며 아시아 여러 나라에 입힌 전쟁 책임을 절감하는 작업의 시초이다."라고 야스카와 주노스케는 말한다. 곰곰 되새겨볼 말이다. 국치일을 앞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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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자와유키치에 대해서는 <프레시안 books> 2011년 4월 29일 자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 사상을 묻는다> 서평(이윤옥 씀) 참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