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 려증동
1905년 11월에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이 서울에 왔다. 17일에 ‘5조약 문서’를 내어놓으면서 찬성하라고 했다. 내용인즉 “한국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본 통감이 다스려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문서 이름은 ‘박문’이 ‘한-일 협상’으로 지었다. 참정대신(국무총리) 한규설이 고함을 지르면서 ‘아니 된다!’고 외쳤다.
외부대신 박제순 등의 도장이 찍혔다. 박문은 일본군을 불러서 ‘경운궁’을 둘러싸게 하고는 한규설을 끌어내라고 했다. 이때 한규설이 박문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자결했더라면 열사로 되어, 그 이름이 영원히 살게 될 뻔했는데, 밥이 그리워선지 그러지 못했다.
박문이 지시하기를 “참정이 불가라고 하니, 외부대신이 도장을 찍으면 된다”고 했다. 왜병이 외부대신 방에 들어가서 박제순 도장을 가지고 나오도록 해서 도장을 그들이 찍었다고 한다. 박제순 역시 ‘불가’를 외치면서 자결했더라면 그 이름이 영원히 살았을 터이다.
당시 선비들은 “참정대신이 ‘불가’라고 한 문서는 무효다”라며 국제 모임인 만국평화회의 등에 호소하려고 ‘늑약’(勒約)을 외치면서 ‘을사늑약’이라고 했다. ‘억지 늑’자다. 황성신문사 사장 장지연이 ‘시일야 방성대곡’이라는 글을 지어서 실었다. 당시 임금(황제)이 ‘을사 5적’을 체포하고 자결해야 옳았다. 학부대신이었던 매국적 ‘완용’(리완용)은 ‘보호조약’이라고 했다.
광복 뒤 리희승은 완용 무리가 사용했던 ‘을사보호조약’이라는 소리를 자기가 만든 <국어대사전>(1961)에 실었고, 리병도는 ‘을사보호조약’이라는 엉터리 용어를 자기가 지은 <한국사 대관>(1964)이라는 책에 실었다. 그 역사용어는 ‘을사늑약’이 맞다.
려증동/경상대 명예교수·배달학
한겨레신문 ‘말이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