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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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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칠장사에 인목대비 한글공적비를 세워야

한글을 즐겨 쓴 왕실 여성들의 상징, 인목대비의 공로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세종 임금이 아무리 훌륭한 글자를 만들었어도 1894년 고종이 국문 칙령을 발표하기 전까지 주된 공식 문자는 한자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훈민정음도 공식문자였다는 것이다. 한자 다음의 비주류문자였지만. 국어교과서처럼 공식 문자가 아니었다고 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공식문자라는 증거는 무엇일까. 공식적이라는 것은 제도나 법으로 규정하거나 인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강력한 증거는 공식 제도의 중심에 놓여 있는 왕실에서 만들고 나라에서 펴낸 《사서언해》와 같은 책에서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오늘날 헌법과 같은 조선 시대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에서 한글을 국가 공무원 시험이라 할 수 있는 과거 시험 과목으로 정했고 또한 삼강행실도와 같은 국가 윤리서를 한글로 옮겨 백성들에게 알리게 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라의 중심인 임금들은 모두 한글 문서를 나라 정책으로 활용했다. “《삼강행실》(예의범절 규범서)을 언문(훈민정음, 한글)으로 번역하여 서울과 지방의 양반 집안의 어른, 어르신, 또는 서당의 스승들로 하여금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가르쳐 이해하게 하라. 만약 삼강행실 가르침에 능통하고 몸가짐과 행실

광복절과 청산되지 않은 일본말찌꺼기

상계백병원, “인문학의 지평을 넓혀가는 사람들의 모임” 특강에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제69주년 광복절 하루 전인 14일 인제대학교 상계백병원 17층 강당에는 제93회 인문학 강좌로 열린 “국어사전에 남아 있는 일본말 잔재”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100여 명의 청중으로 강당 안은 열기가 뜨거웠다. 일제 침략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광복절은 우리 겨레에게 더 없는 기쁨의 날이요, 감격의 날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말 속에는 식민 잔재인 일본말이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강사로 초청된 사람은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이날 강연 주제는 인물과 사상사를 통해서 펴낸 이 소장의 책 《오염된 국어사전》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 《오염된 국어사전》, 이윤옥, 인물과사상사 ▲ “국어사전에 남아 있는 일본말 잔재” 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는 이윤옥 소장 이날 강연에서 이 소장은 우리 삶 속에 남아있는 일본말을 잉꼬부부, 야끼만두, 자부동 같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과 국민의례, 국위선양, 부락과 같은 민족의 자존심을 해치는 말로 구분하여 2시간 동안 휴식도 없이 열강을 해서 청중으로부터 큰 손뼉을 받았다. 이윤옥 소장은 요즈음 인기 있는 영화 “명량” 얘기를 하면서 흔히 이순신 장군을

최만리의 언문 창제 반대상소(1)

[홍사내의 세종한글 길라잡이 4]

[그린경제=홍사내 기자]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1444) 2월 20일 기사에는 최만리 등이 임금에게 올린 글이 온전히 실려 전한다. 당시 최고위급이자 대유학자인 최만리를 으뜸으로 하여 유학자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이 새로운 글자 창제의 부당함을 임금에게 아뢴 상소문 내용은 훈민정음에 기록된 서문과 해례 이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상소란 신하로서 임금에게 문제점과 잘못, 또는 태도와 자세 따위를 지적하여 개선코자 할 때 올리는 글로서, 학문적 바탕을 총동원하여 글을 써야 하고, 근거와 타당성을 갖추어야 했으니, 목숨을 건 글쓰기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세종이 언문을 창제하였다고 발표하자 두 달이 지나서 올린 이 상소의 내용으로 우리는 당시 국내외 정세를 좀 더 자세히 알게 되고, 학자들의 문제제기와 그들이 이해하는 글자의 장단점을 보면서 객관적 안목을 넓힐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이 상소문이 없었다면, 세종이 이런 논의를 거치지 않고 독단적 왕권으로 밀어붙인 것이 되고, 강압적인 정책으로 새 글자의 사용은 빠르게 확대되었겠지만 여러 반대론자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며, 세종의 위대함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