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간에서 본 안채 모습
앞 출입구만 빼고 온통 돌로 둘러친 벽체
가을 추수한 호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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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벽과 제주 억새로 지어진 전통가옥 측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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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지붕을 붙들어 맨 매듭 옛날에는 돌을 이용해서 매달았다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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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방도 귀걸이로 호박을 걸었네요 |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돌많고 바람만고 여자가 많아 삼다도로 알려진 화산섬 제주도에는 사람사는 집도 육지의 집과는 다른게 많다.
바람이 하도 세차게 불어대니 육지처럼 나무기둥에 회벽을 발라서는 집이 남아있을 수가 없어 내부에 나무기둥으로 골조를 짜더라도 외부는 전부 돌로 벽을 쳤다. 기본적으로 부엌, 마루, 방 3칸에 식구 수에 따라 앞뒤로 공간을 넓혀서 지었지만, 바람을 견디기 위해서는 지붕을 낮추고 대신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도록 방문도 천장도 아주 낮았다.
그리고 지붕은 언듯 보기에 초가처럼 보이지만 이는 짚으로 이엉을 엮는 육지의 초가집이 아니라 기생화산에 자생하는 억새줄기를 모아서 엮은 이엉이다. 농토가 될만한 땅이 있어도 비가 오면 겉으로 흐를새가 없이 대부분 땅속으로 스며들기에 농사도 밭농사가 전부였으니 논에서 나는 짚으로 쉽게 이엉을 만드는 육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 지붕이 날아가지 않도록 얼기설게 새끼줄을 촘촘하게 얽어 매어 그 끝에는 무거운 돌들을 매달았다.
돌많고 바람많은 제주에 살려면 자연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야 하였기에, 바람은 사람의 적이 아니라 늘 곁에 있으며 서로 옥신각신 투정하는 친구처럼 여기고 살았다. 바람이 없으면 오히려 적적했을 지도 모른다. 제주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을 뿐아니라 논이 없어서 농산물은 대부분 잡곡과 감자 등과 한라산을 의지한 야산의 산나물과 바다에서 나는 풍부한 해초와 해산물들로 살았다.
그러니 그들은 어떻게든 외딴섬 제주를 벗어나서 육지를 밟아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제주여인들은 육지에서 귀양온 선비들에게도 극진한 대접을 했다고 한다. 육지에서 온 귀양객들이야 제주음식이 맞지않아 밥을 먹기가 어려웠다는 기록들이 많지만, 제주여인들이야 자신들은 평생 갈 수 없는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마치 선계에서 온 사람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특히나 제주도 여자는 평생 섬을 벗어날 수 없다는 법까지 있었다고 하니...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제주가 지상낙원으로 대접받고 있다. 육지와는 다른 사계절의 이국적인 풍광에 산과 바다가 어루러진 절경이 많고, 많은 강수량에 화산석 사이로 스며든 물들이 용천수가 되어 솟아난다. 거기에 물의 성분도 아주 좋아 한국에서 나는 샘물 중에는 최고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으니, 물좋고 풍광좋고 인심도 좋은 곳이 지금의 제주요, 지상 낙원이다.
제주는 이제 한국인들만이 찾는 섬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제2의 거주지로 각광받고 있다. 제주가 특별자치도가 된 이후 5억원 이상의 현금을 투자한 외국인에게 거주권을 부여하자 중국의 신흥 부자들이 제주에 별장 한 채쯤 갖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을 정도라고 한다. 별장도 사고 영주권도 받으니 그들에게는 일석이조인 셈이다.
국제도시 제주의 위상변화! 앞으로 어디까지 갈 것인지 기대된다. 과거 오랜 기간 힘겨웠던 섬 제주가 앞으로 세계인으로부터 사랑 받는 그런 제주였으면 한다. (사진은 제주 한림공원 안 초가집 )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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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