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6 (월)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사진나들이

[화보] 조선태조의 2번째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

 

   
▲ 능의 정면 아래에서 본 정릉과 정자각
   
▲ 정릉의 홍살문

   
▲ 정자각에서 본 수복방과 비각

   
▲ 정자각에서 본 정릉

   
▲ 능 아래에서 본 모습

   
▲ 능 앞의 석물들과 능을 감싸고 있는 곡장
   
▲ 문인석과 석마

   
▲ 능상의 측면에서 본 모습

   
▲ 정릉의 정면모습
   
▲ 능의 정면(왕릉에는 아랫부분에 병풍처럼 둘러있는 병풍석이 있으나, 정릉에는 없다)본래 정동에 있을 때에는 이성계가 무척이나 호화롭게 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분명히 있었을 것이나 태종이 이곳으로 옮기면서 모두 없애버린 것이다.
   
▲ 능 앞의 석등(그 형상이 독특하다)
   
▲ 능 주변의 석호(돌로 만든 호랑이)
   
▲ 능 주변의 석양(돌로 만든 양)
   
▲ 능앞의 석물들(혼유석, 석등 망주석, 문인석)
   
▲ 신덕왕후 강씨를 호위하는 문인석과 석마(말)왕릉에 있는 무인석은 보이지 않는다.
   
▲ 능상에서 본 정자각과 시내
   
▲ 정자각의 측면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정릉은 조선태조 이성계의 2번째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신덕왕후 강씨는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강윤성은 고려말 권문세가였기에 이성계가 정계에 진출하여 역량을 넓혀 조선을 개국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신덕왕후는 태조의 원비인 신의왕후 사이에 장성한 여섯 아들을 제치고 자신의 아들인 방번과 방석 중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으나 1396년 갑자기 병환으로 승하하였다. 이성계는 신덕왕후가 세상을 뜨자 그의 능을 안치할 명당자리를 찾아 상복을 입은채 안암동 행주(고양) 등을 직접 찾아 나섰다고 하며, 신덕왕후가 위독할 때에는 고승 50명을 불러모아 불공을 드렸다고도 한다. 그런 태조는 본래 도성 안쪽에는 능을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기면서도 궁궐의 바로 근처인 정동에 능을 짓고 그 이름을 정릉이라 하였다,

그리고 태조는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흥천사를 창건하고 늘 기도드리게 하였다고 한다. 이성계는 말년에는 사흘이 멀다 하고 흥천사를 찾았으며, 때로는 백관이 도열한 조정의 조회도 보지 않고 흥천사로 거동하였다는 《태조실록》의 기록도 있다.

신덕왕후는 자신이 살아있을 때 자신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기는 하였으나, 자신이 죽은 뒤에 자신이 세운 세자와 자신의 큰아들 방번까지도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리라고는 차마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정 사정없는 권력다툼의 정치세계에서는 그리 되고 말았다. 어쩌면 남보다 못한게 이복형제간의 권력다툼인지 모른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가 죽은 뒤 자신의 아버지인 태조가 그리도 애지중지하던 신덕왕후 강씨의 능마저 파헤쳐 본래 정동(문화방송 인근)근처에 있던 능을 현재의 정릉으로 옮겼고 그녀의 능주변을 장식하던 수 많은 석물들은 청계천의 광통교를 만드는데 쓰고 말았다. (지금 정동이라 불리우는 동명은 바로 정릉이 있었던 동네라는 의미이다)

그렇게 새로 조성한 정릉은 거의 돌보지도 않고 수 백년을 방치한채 흘렀고, 현종 때에 개축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정릉은 홍살문과 정자각이 일직선상에 있지 않고, 'ㄱ '자로 꺾여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거리도 다른 능에 비해 길이도 짧고 간소하게 꾸몄다. 정자각의 크기도 적은 규모이며 능상의 석물도 간소하다. 뿐만이 아니라 능의 봉분 아래에는 능위의 흙이 흘러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병풍석들 둘러야 하지만, 그 병풍석도 없이 단출하다.

하지만 최소한의 격식을 갖추기 위하여 능 주위에는 석호와 석양이 각각 2마리씩 배치하였고, 능의 앞에는 혼이 나와서 노닌다는 혼유석과 장명등 망주석 그리고 문인석과 석마가 도열하여, 비록 단출한 편이지만 왕비의 능으로의 품격을 갖추고 있다.

살아서는 무한한 영광으로 살았고, 그가 세웠던 아들이 새로 세운 조선왕의 대를 이어 그 영화가 끝이 없을 줄 알았을 것이나, 그녀가 죽은지 얼마되지 않아 모든 것은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세상 만사 욕심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깨우치는 교훈을 얻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만 세월이 흐르면 어찌 될 지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사다. 비록 지금 권력과 재력이 있다고 떵떵거리지만, 불과 얼마 후에 또 무슨 일이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부디 있을 때 거들먹 거리지 말고, 없는 사람 보살펴야 하고, 쌓을 공덕의 기회가 있으면 혼자만 사치하지 말고 훗날 공덕이 될 수 있도록 보시하면서 살 일이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