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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

차(車) 수리공장 인수 한 달 만에 화재로 알거지되다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1915~2001)] ④ 자동차 수리사업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정주영의 꿈같은 첫 사업, 쌀가게는 승승장구했다. 성실하게 운영한 덕에 단골손님은 나날이 늘어갔고 가게는 번창했다. 운명일 수도 있는 첫 사업 쌀가게는 보배였다. 그러나 그런 달콤한 세월도 두해 남짓, 가게를 접을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운명이 그 앞에는 도사리고 있었다.  

일본이 아시아를 송두리째 먹기 위한 침략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일본 군부는 1937년 7월7일부터 노구교사건이라 하여 중국군과의 충돌을 거짓으로 꾸며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곧바로 조선총독부는 전시체제령을 내렸다. 전쟁물자를 만들기 위해 쇠붙이 등을 거둬들이고, 군수품 통제를 시작으로 정미소까지 통제했다. 1939년 12월 쌀 배급제가 시작됐고, 전국의 쌀가게는 문을 닫아야 했다.  

이는 농민들이 지은 곡식을 수탈해 일본군에 보내고, 일본 본토로 가져가기 위한 수작이었다. 정주영도 어쩔 수 없이 가게를 정리해야만 했다. 쌀가게를 정리한 뒤 그의 손에 떨어진 돈은 1000여 원 남짓이었다. 쌀가게를 처분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정주영은 이 돈으로 아버지께 논 2000평을 사드렸다. 가출 네 번 만에 첫 효도를 한 셈이었다.  

하지만 정주영은 고향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뭔가 일을 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래도 사업이랍시고 2년 여를 해서 작지만 돈도 벌었던 그가 농사를 지으며 안주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이듬해 초 정주영은 아버지께 논을 사드리고 남은 돈 250원을 가지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자동차 수리공장 인수하다 

이 돈은 소 판 돈 72원보다는 많지만 사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250원으로 무얼 할까? 정주영은 골똘히 궁리하면서 좋은 사업거리 구상을 위해 이곳저곳을 헤매며 돌아다녔다. 새로운 사업이 필요했다. 4번의 가출에 온갖 돈벌이가 되는 곳을 찾아다녔던 정주영, 어쩌면 이런 전력이 뒤에 많은 사업을 무리 없이, 아니 성공적으로 해낸 밑거름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서울 곳곳을 뒤지던 정주영은 우연찮게 쌀가게 단골이었던 이을학 씨를 만나게 된다. 그는 서울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 직원으로 마침 일본사람이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 공장을 팔려고 내놓았다며 그걸 인수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물론 자신도 조금은 출자하겠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정주영은 두발 자전거에는 익숙했지만 네발자동차는 문외한이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본사람은 왜 서비스공장을 내놓았나요?” 

그로서는 당연히 묻고 싶은 얘기였다.  

“공장은 잘되고 있긴 한데 빚이 너무 많아서 이자를 감당하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찾아다니는데 익숙했던 정주영은 그 공장도 직접 찾아가고 확인했다. 자동차 사업은 잘 몰랐지만 시설은 그런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공장이 함석 목조건물이어서 화재를 걱정해야만 했는데 그것보다는 자동차 사업에 경험이 없는 것이 더 걱정이었다. 쌀 배달에 이골이 난 그는 자전거를 타는 것은 눈을 감고도 가능했지만, 서울 장안을 전차 값도 아까워 걸어 다녔던 자신에게는 자동차란 먼 나라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큰 자본 안들이고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라는 말에 솔깃했다. 그리고 당시 자동차 서비스업이 유망 사업이었던 것도 정주영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물론 그때 승용차는 드물었지만 전쟁 바람에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화물 자동차가 크게 늘고 있어 자동차 수리업은 잘만 하면 돈 좀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 수리 사업에 뛰어드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저할 틈이 없었다. 게다가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곧바로 일을 저질렀다. 이런 그의 특성이 이후로도 큰 사업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조선은 근대산업이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데다가 식민지 수탈시대였기에 토종 사업가는 별로 없었고,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일본인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는 때였다. 따라서 조선 사람들은 좀처럼 기계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이때 정주영이 기계, 그것도 당시로는 첨단산업인 자동차 기술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훗날 현대자동차를 설립하는 튼튼한 밑거름이 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문제는 3500원이라는 인수 자금이었다. 정주영은 쌀가게를 할 때 알고 지냈던 오윤근이란 영감을 찾아갔다. 그는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돈놀이도 했었기에 돈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빌려주면 그저 신용 하나만 믿고 돈을 빌려줬는데 한 번도 빌려준 돈을 떼먹히지 않았다며 자랑을 하곤 하던 사람이었다. 다행히 쌀가게를 할 때 한 번도 속 썩인 적이 없던 그에게 오윤근 영감은 선뜻 3000원이라는 거금을 빌려주었다.  

혹시 돈을 못 빌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지만 돈을 빌렸다는 사실보다 오 영감이 자신을 믿었다는 것이 더 큰 기쁨이었다. 훗날 정주영이 즐겨 쓰던 “신용이 곧 재산이다. 신용만 있으면 돈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라고 했던 말은 바로 그때 체득한 신념이었을 게다. 나머지 돈은 그에게 인수를 제안했던 경성서비스 이을학 씨와 고향 동무가 보탰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돈을 합쳐 모두 5000원으로 새로운 두 번 째 사업을 시작했다.  

두 바퀴 자전거로 사업을 시작한 그는 네 바퀴 자동차 수리업을 거쳐 ‘탈 것의 꽃’ 자동차 사업을 일으켜 그가 만든 자동차가 세계를 누비게 된 단초를 만든 것이다. 세상의 탈 것은 네 발인 달구지에서 시작하여 두 발인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거쳐 다시 네발 자동차로 발전해간다는 것을 정주영은 이때 이미 알아챈 것은 아닐까?  

그러나 세상의 흐름을 안다고 해서 순조롭게 사업이 추진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자동차업에 뛰어든 것은 남들이 지니지 않는 그만의 결단력과 뚝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수금의 90%나 되는 4500원의 빚을 지면서 누가 보아도 무모하게 시작한 자동차 서비스 공장, 그러나 그것이 천하의 정주영이 된 밑바탕이었음을 당시는 그 누구도 알아 차렸을 리가 없다. 

호사다마, 화재로 알거지가 되다  
 

   
▲ ⓒ 이무성 화백

1940년 2월 계약금을 치르고 공장을 인수해 드디어 공장 문을 열었다. 사업은 순조로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문을 열자마자 광업소 트럭 두 대를 수리했다. 이어서 임진강에 빠졌던 화물트럭 한 대가 들어왔고, 장안의 세도가 윤덕영 씨가 소유한 제너럴모터스 브랜드의 올즈모빌까지 수리하면서 기염을 토했다. 심지어 트럭 두 대는 공장 밖 길가에 세워놓고 수리를 하는 것은 물론 종업원들도 50명이나 될 만큼 사업은 승승장구 했다. 세상의 모든 운이 정주영의 손아귀에 있는 듯했다.  

그러나 호사다마, 공장을 시작한 뒤 한 달쯤 지난 새벽 그에게 절망적인 사건이 터졌다. 그는 밤늦도록 일을 하다 공장 숙직실에서 혼자 잠을 잤고, 새벽에 눈을 떠 세수할 물을 데우려고 석유곤로에 기름을 붓는 순간 불길이 공장에 확 옮겨 붙었다. 삽시간의 일이었다. 다급해진 정주영이 당시로는 값께나 나가는 비싼 전화기를 들어 불을 끄려 했다. 전화기로 불을 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전 재산이 한 순간에 날아갈 절체절명의 순간에 무엇이로든 불을 꺼야한다는 다급한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그런 몸부림에도 공장은 순식간에 손을 써볼 틈도 없이 홀라당 다 타버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외상으로 들여놓았던 부속품 값은 물론 타버린 남의 자동차 10여 대 값도 변상해주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공장을 차리느라 꾸어온 빚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상태가 아닌가? 청운의 꿈을 안고 시작한 자동차수리업은 출항 한 달여 만에 침몰한 채 정주영은 알몸이 되어 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의 뇌리에는 자신의 신용하나만을 믿고 거금을 빌려준 오 영감 모습이 순간 스쳐지나갔다. 이제 정주영은 여기서 끝나고 말 것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