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오전 9시 22분 임진각. 화환을 목에 건 황소 옆에 정주영 명예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 회장은 한 마리의 소가 1000 마리가 돼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간다.고 말했다. 1998년 6월 16일 언론은 이렇게 83살의 정주영 회장이 트럭 50대에 500마리의 소떼를 싣고 판문점을 넘었다고 보도했다. 이날 오전 임진각에서 정주영 회장은 이번 방문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그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은 이후 10여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될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지난 5월 9일 나는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 연재를 이렇게 시작했다. 정주영, 그는 실향민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이룬 최고경영자가 되었다. 그는 17살 때 현재 북한지역인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의 고향집에서 아버지가 소 판 돈 70원을 몰래 들고 가출했는데 그의 나이 83살이 되던 1998년 6월 16일 소떼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방북하게 된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소떼 방북을 위해 이미 1992년부터 자신의 서산농장에 소 150마리를
[한국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철저히 사전 분석하고 실천 남다른 통찰력, 성공 밑거름 정주영을 사람들은 흔히 불도저라고 한다. 그것은 그가 일을 할 때 불도저처럼 밀어붙인다고 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어떤 일을 밀어붙이기 전에 누구보다도 철저히 분석하고 생각하고 또 계산하고 있음을 정작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따라서 정주영식 생각하는 불도저를 단순히 보이는 외형만을 보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에게는 남다른 보이지 않는 탄탄한 내공이 있음을 알아야한다. 서산간척지 마지막 공구 물막이 때 23만 톤 유조선을 가라앉힌 것도, 10층 빌딩만한 자켓 89개를 인도양 건너로 운반한 것도, 망신만 당하지 말라던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일도, 소백산 귀신을 돌려세우고 경부고속도로를 공기 안에 완성한 일도 모두 그의 철저한 계산과 분석 뒤에 불도저처럼 밀어붙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소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정주영이었기에 성공 역시 학교 공부와 정비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성공을 두고 사람들은 남달리 사업에 대한 직관력과 감각 그리고 인생에 대한 통찰력과 함께 끊임없이 밀어붙인 그의 불도저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주영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해보기나 했어포기 모르는 뚝심 포드와 車 조립 기술 계약 맺어 어려운 과제 주고 해결책도 귀띔 현대자동차 일본판매 사장을 지냈던 김진수 씨는 재미있는 경험담을 들려준다. 현대상사 일본지점장을 할 때의 이야기다. 정주영은 그에게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자네가 일본 지점장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럼 일본에 배를 팔아야지. 회장님 일본은 해상왕국인데다 조선왕국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본에 배를 판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팔아보기나 했어? 김진수는 그때까지만 해도 정주영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고 했다. 아무 것도 모르니 그저 겁도 없이 말대꾸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팔아보기나 했어?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헷갈리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더 이상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사실 팔아보지 않았으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고 했다. 정 회장의 팔아봤어?란 말은 그에게 일생 큰 가르침이었다고 했다. 그는 그 뒤로부터 정주영을 회사의 회장이나 인생 선배가 아니라 스승으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주영이 아우 인영에게 포드사와 자동차 조립 기술 계약을 맺고 들어오라는 갑작스런 명령을 했을 때 정인영은 형의 성격에 이력이 났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한국인에게 붉은색은 공산주의를 떠올리는 색깔로 그다지 유쾌한 이미지는 아니다. 하물며 소련 국기에 그려진 낫과 망치, 그리고 바탕색의 붉은 빛은 섬뜩할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던 시절. 때는 1989년 1월 12일 정주영 회장은 소련으로 날아가 소련 최고 권력자 가운데 한 사람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아침 10시 무렵 일행은 크렘린궁의 맞은편 소련연방 상공회의소 뒤편 고르바초프가 업무를 보는 왼쪽 건물로 갔다. 그곳에서 정주영이 이날 만날 사람은 동방학연구소 소장 프리마코프였다. 그는 소련 KGB의 대외 총책과 러시아 외무장관과 총리를 지낸 사람이었다. 저는 한국에서 온 프롤레타리아 정주영입니다. 간단히 악수를 나눈 뒤 자리에 앉자마자 상기된 얼굴의 정 회장의 입에서 튀어나온 첫말이었다. 이때 통역은 작가인 겐나지 리였는데 정주영의 첫말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한국에서 가장 부자인 것으로 알려진 정 회장이 프롤레타리아라니 어안이 벙벙했던 것이다. 경제학사전에서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를 찾아보면 생산수단의 소유비소유의 관점에서 유산계급에 대비하여 정치적사회적문화적 권력을 소유하지 못한 무산계급을 말한다라고 되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한 대기업의 회장이 느닷없이 라디오 방송에 나와 울먹이며 자기 그룹의 모든 기업을 정부에 헌납하고 기회를 준다면 전문경영인으로 남겠다는 발표를 하여 경제계는 물론 전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 있었다. 때는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에 이어 전두환, 노태우 등 젊은 장교들이 주도한 1212 사태가 일어난 뒤였다. 이름하여 신군부라고 부르는 이들은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국정 전반에 걸친 실권을 장악하였고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정부 시위를 강경 진압하였음은 물론 순수한 광주시민들의 민주항쟁을 피로써 진압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군부는 정치, 사회적으로 그 기반이 약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권력 강화를 위해한 힘을 남용했다. 권력강화란 말 이면에는 강자로부터 유린당한 약자의 인권유린이 존재하는 법으로 신군부의 권력강화 작업 역시 많은 부작용이 뒤따랐다. 가장 대표적인 인권유린 작업이 악명 높은 사회정화작업이다. 1차 희생양은 240여 명이나 되는 국가 고급 공무원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단지 고위 공무원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은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내 몰려야 했다. 이러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1976년 해가 저물던 무렵의 일이었다. 세계 최대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야 할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오던 때였다. 우리는 지금 힘찬 도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현재의 사정이 녹록하지는 않지만 위기는 또한 기회일 수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의 위기를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똘똘 뭉쳐 헤쳐 나갑시다. 사람이 태어나 많은 일을 하다 죽지만 조국과 우리 겨레를 위해 일하는 것만큼 숭고하고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기회가 온 것입니다. 정주영은 이렇게 현대 직원들에게 간곡하게 호소를 한 직후였다. 국가적으로도, 현대로서도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그들에게도, 나라에 있어서도 사느냐 죽느냐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날 밤 환갑을 넘긴 62살의 정주영은 20살이나 어린 아들 뻘되는 김영덕 박사를 직접 만났다. 김영덕 박사는 현대건설과는 견줄 수도 없는 세계 최고의 석유회사 아람코에 재직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캐나다에서 뉴욕으로 직장을 옮긴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해외 국적을 버리고 고국에 들어와서 현대건설과 함께 일해 주실 수 없나요? 주베일 산업항 공사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1963년, 대한민국의 외환보유고가 3000만 달러까지 내려감에 따라 정부는 파산 직전까지 가는 큰 혼란을 맞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동의 오일쇼크 탓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73년에 정부에서 지불한 원유 값은 3억516만 달러였는데 1974년에는 8억 달러가 늘어난 11억78만 달러를 지불해야만 했다. 경상수지 적자는 1년 사이에 3억880만 달러에서 20억2270만 달러로 늘었고 자본 대출량도 2억9000만 달러에서 19억9840만 달러로 크게 증가했다. 정말 막다른 길목이었다. 이때, 박정희 정부의 오원철 경제수석은 중동진출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고 박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여 중동진출을 적극적으로 기획하게 된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듯, 오일쇼크로 인한 외환위기는 오일쇼크로 부자가 된 중동에서 처방책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진행된 해결책이었다. 1974년 4월 25일 장예준 건설부장관을 비롯해 부처의 각료급 인사들과 7개 민간업체로 구성된 사절단이 중동에 파견되었다. 직접 중동에 가서 현지를 보고 오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동 시찰 성과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쿠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로 입은 타격으로 회사가 무너지다시피 한 위기를 헤쳐 나올 무렵이었다. 그런데 419혁명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자 정부와 기업 사이는 정경유착 관계고, 부정축재한 정치인이나 기업가들이 많다.라고 시끄러웠다. 웬만한 큰 공사는 으레 정부 공사였기에 큰 건설업자는 정부를 끼고 치부했다고 덮어놓고 공격을 당했다. 이때 현대건설은 정경유착이 아니라 자력으로 컸음을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해외 진출을 하지 않으면 국내 건설기업은 조만간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이라 예견되었다. 그래서 정주영은 60년대 초부터 현대건설의 전환점을 해외 진출에 걸었다. 태국 고속도로 건설 공사, 큰 적자 그러나 도약 1965년 9월 태국 파티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공사를 540만 달러에 따냈다. 한국 건설사상 나라밖 공사로는 처음이었다. 서독, 이탈리아, 덴마크 건설업자들이 이미 진출해 난공불락의 성을 쌓고 있는 가운데 뒤늦게 태국 현장에 뛰어든 현대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기후, 풍속, 법률이 모두 생소할 뿐더러 언어가 다른 외국 노동자를 쓰면서 겪어야 했던 현대의 시련은 말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던 정주영은 어느 날 자동차 수리비를 받으러 관청에 갔다가 자신은 자동차 수리비로 고작 몇 백 원을 받아 가는데, 건설업자들은 건설 공사비로 몇 만원을 받아가는 것을 보고 건설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함께 사업을 하는 친구는 물론 식구들도 팔짝 뛰었다. 안 됩니다. 건설업을 하려면 한두 푼이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그럴 만 한 돈도 없고, 더구나 경험도 없는 상태로 시작한다면 섶을 지고 불속으로 들어가는 일일 것입니다. 그동안 어렵게 일구어놓은 것마저 무너집니다. 건설공사나 토목공사는 자동차 수리처럼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공사는 일 년도 걸리고 삼년도 걸리는데다가 요즘은 자고나면 물가가 오르니 섣불리 공사를 맡았다간 단박에 망해요. 그러나 주위가 모두 반대해도 자신의 뜻을 굽힐 정주영은 아니었다. 정주영이 조선소를 하려고 할 때도 역시 그랬다.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는 한결 같았다. 몇 백 톤짜리 나무배만 만들던 보잘 것 없는 기술만 가진 우리나라에서 더구나 배는 만들어 본 적조차 없고 오로지 건설만 해오던 현대건설이 큰 바다에 띄울 거대한 배를 만들 수는 없다는 거였다. 그러나 정주영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정주영의 고향은 강원도 통천, 현재는 맘대로 갈 수 없는 북한 땅이다. 정주영은 회고록에서 고향 통천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강릉에서 바다를 끼고 곧장 쭈욱 올라가면 속초・화진포・고성・통천읍이 있고, 바로 그 위에 관동팔경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치는 해금강 총석정이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송전해수욕장이다. 솔밭이라는 이름 그대로 키 작은 다복솔이 온통 뒤덮이고, 푸르른 바다를 끼고 끝없이 이어진 새하얀 모래밭, 봄이면 온통 붉게 피어나는 산기슭의 진달래들, 명사십리 해당화보다 더 화려한 해당화. 회고록에 이렇게 표현한 것을 보면 그 어떤 고장보다도 아름다울 것이고, 정주영으로서는 무척이나 돌아가고픈 고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소 판 돈 70원을 훔쳐 나온 고향을 대충 갈 수는 없는 노릇. 천하의 정주영은 어떤 모습으로 고향에 가게 될까? 정주영 회장 선생을 환영합네다. 노동당 허담의 방북 제안을 받아들여 정주영이 북한 땅을 밟은 것은 그가 고향을 떠난 지 40년만인 1989년 1월 23일이었다. 이때 정주영은 남한과 북한이 함께 금강산을 개발해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