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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

‘봉이 정선달’ 정주영, 드디어 무쇠덩이 바다에 띄우다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1915~2001)] ⑬ 26만 톤 유조선 진수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당신이 배를 사주면 영국수출보증기구의 승인을 얻어 영국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이 돈으로 이 사진 속 백사장에 근사한 조선소를 지어 당신 배를 멋지게 만들어 주겠소. 나를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조선소보다 더 멋진 배를 다른 데보다 더 싸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만일 배가 맘에 안 들 것을 대비해서 우리나라에서는 반대급부 지불보증서를 제출할 것이고, 이것이 손해배상을 보증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단순한 보상이 아니라 계약금은 물론 중도금 등의 원금과 이자까지 가만히 앉은 채로 받을 수 있게 은행으로 송금해주겠소.” 

정주영은 이런 미친 설득을 선주들에게 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런 설득이 쉽게 먹혀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그야말로 사생결단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일까?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꼭 정주영처럼 미친 사람이 하나 있었다. 1세기 가까이 해운업을 해오는 그리스의 리바노스였다. 그는 한때 처남인 선박왕 오나시스를 능가하기도 했던 거물 해운업자였다. 리바노스는 정주영이 보여준 미포만 백사장 사진만 보고 선뜻 계약했다. 리바노스는 파격적으로 26만 톤짜리 배 두 척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정 회장, 나는 정 회장을 보고 계약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당신의 도전적인 모습에 반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내가 미쳤는지, 도박을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당신에게 배 두 척을 주문하겠소. 값은 척당 3095만 달러, 5년 반 뒤에 배를 인도해주시오. 우리 두 사람에게 모두 좋은 인연이길 빌겠소.”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만든 가장 큰 배는 고작 17000톤에 불과했다. 그런데 26만 톤짜리였으니 두 사람 다 미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계약금으로 14억 원을 받았다. 정말 정주영에게는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해운업계의 거물 리바노스도 무작정 도박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이미 바클레이즈은행의 정주영에 대한 신뢰를 확인했을 뿐만이 아니라 까다롭기로 유명한 영국 수출보험기구에서조차도 굳이 제동을 걸 의사가 없다는 정보를 이미 입수해놓고 있었던 데서 오는 자심감이기도 했다.  

1972323, 드디어 8000만 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현대조선소 기공식이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정주영이나 박 대통령 두 사람 모두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현대는 다음 해 6월 완공 목표인 현대조선소의 건설을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날마다 2200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었음은 물론 현대건설은 국내 공사 수주를 중지했다.  

방파제를 쌓고, 바다를 준설하고, 안벽을 만들고, 도크를 건설하고, 14만 평 공장과 노동자 5000명이 잘 수 있는 숙소까지 한꺼번에 짓는 엄청난 대역사가 벌어졌다. 직원 모두는 새벽에 일어나서 여기저기 고인 웅덩이 물에 대충 고양이세수를 하고는 일터에 나가 밤늦게까지 일한 다음, 잠자리에 들 때는 구두끈도 못 푼 채 자는 것이 일과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애로는 기술적으로 필요 이상 까다롭게 구는 로이드 선급협회 검사였다. 하기야 그들도 기껏 17000톤짜리 배를 만들어본 기술에 26만 톤짜리 배를 만드는 현대조선을 미쁘게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큰 배의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 배 밑창에 까는 자갈과 배를 만드는데 쓰는 소금까지 외국에서 수입해 쓰라고 요구했다. 자갈은 우리 땅에 얼마든지 널려 있었고, 우리도 뛰어난 천연소금을 생산하고 있는데도 외국에서 수입하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런데 비싼 돈을 내고 수입한 자갈이 이번에는 마모율이 높다며 까탈을 부렸다. 별 수 없이 우리 자갈로 대체해서 썼지만 선급협회 감독을 때려주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은 그렇게 까다롭게 굴었던 것이 나중에 보니 최고의 배라는 격찬을 듣게 된 요인이었음을 당시는 몰랐다.  

드디어 19743. 기공식을 하고 2년 만에 제2도크 안에서 작업이 끝난 26만 톤짜리 제1호선을 진수할 날이 다가왔다. 문제는 우리나라엔 26만 톤짜리 배를 움직일 만한 선장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항만청이 엔진 시동 전에 배를 움직이는 것은 항해규칙 위반이라면 제동을 걸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한국에서는 되지도 않을 대형 조선소 건설을 해온 정주영에게 이게 무슨 돼 먹지 않은 일이던가? 배는 선주에게 인도되기 전까지는 배라고 할 수가 없다. 그저 제조공정중일 뿐의 재공품(在工品)에 불과한 것 아니던가?  

그러자 정주영은 길이 270m, 높이 27m나 되는 배라기보다는 하나의 산이라고 표현해야할 무쇠덩어리에 직접 올라탔다. 이 배가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지 않은가? 더구나 정주영 자신은 조선소 건설공사 기간 중 차를 몰고 가다가 바다에 빠져 생사의 갈림길을 오고간 끝에 겨우 구조되기도 했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비바람 세차게 몰아치는 날 새벽 3시 혼자 숙소에서 지프차를 몰아 현장으로 가다가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갑자기 발견하고 피해 간다는 게 물속에 빠져버린 것이다. 천하의 정주영은 이때 침착성을 잃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차문을 연 다음 800m 되는 바다를 헤엄쳐 빠져나와 경비원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구출되고 난 정주영은 어느 누구에게도 화를 낼 수가 없어서 그저 물속이 참 시원하더군.”하며 우스갯소리로 순간을 넘겼었다.  

바클레이즈은행의 해외 담당 부총재로부터 인정받은 우스갯소리였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배가 아니던가? 그러나 이 거대한 무쇠덩어리가 뜰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아무리 숱한 피와 땀을 바쳤다 해도 물에 뜨지 않으면 고철덩어리에 불과하고, 배가 아니면 모든 것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저 아래에는 대통령 그리고 선주 리바노스와 나라 안팎의 저명인사들 1000여 명이 침을 꼴깍 삼키며 조선소 준공식과 대형 유조선 두 척의 명명식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정주영은 선장실에 직접 올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라고 큰소리치며 무면허 선장과 항해사 기관사들을 동원하여 배를 움직여 보도록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무면허 시운전은 우려한 대로 배의 몸체가 도크 가장자리에 스치기 시작했다. 등줄기에 땀이 죽 흘러내리는 순간이었다. 급하게 로프를 가져와 양쪽에서 잡아당겨 평형을 유지하도록 했다. 정주영의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모든 참석자들 역시 입에 침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 현대조선 26만통 유조선 진수식,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진수를 시작한 지 4시간 만인 새벽 5, 배 밑 프로펠러가 큰 물거품을 만들며 거대한 무쇠덩어리가 물위로 미끄러졌다. 순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는 일시에 와아하는 함성이 터졌다. 직접 몸을 부대끼며 배를 만들어냈던 노동자들은 서로 껴안으며 눈물을 글썽인다. 해냈다는 자부심이 온몸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정주영은 구경만 했던 선장들에게 이제 모두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라며 호통을 친다. 그냥 지나칠 정주영이 아닌 것이다.  

유조선은 제2도크 앞바다를 빠져나가 마지막 공정인 외장공사를 위해 반대편 전하만 1호 안벽에 정박했다. 미포만 백사장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현대판 봉이 김선달 아니 정선달이 되어 세계를 떠돌던 때로부터 30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17000톤짜리 배 건조 경험의 나라에서 26만 톤의 유조선을 만들겠다고 덤볐을 때 많은 이가 미친 사람 취급을 했지만 정주영은 그들에게 미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니 누가 미쳐야 미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조선업에 미쳤기()26만 톤 유조선에 미친() 것이다

현대조선은 그렇게 당당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한창 잘나갔다. 하지만 항상 승승장구하는 건 아니었다. 곧바로 위기가 찾아왔다. 1973년 불어 닥친 오일쇼크로 배를 주문했던 사람들로부터 배를 가져가지 않겠다는 주문취소가 잇따랐다. 현대조선이 만든 배 가운데 세척이 울산 앞바다에 떠 있었다. 그 중 한 배는 리바노스가 주문한 배였다. 당당하게 고고의 소리를 냈던 현대조선은 이제 어찌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