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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과 고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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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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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 동산에서 내려다본 고분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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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 윗 동산에서 본 고분군들 |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가야는 경상남도 김해의 금관가야가 기원 전 42년 김수로왕을 왕으로 세우면서 여러개의 가야연맹국가로 존재하였으며,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가야만의 독특한 토기와 철기를 발전시켜 500여년을 생존하다가 562년 신라 진흥왕에 의하여 멸망당할 때까지 신라와 백제 그리고 왜의 사이에서 번성했던 고대국가였다.
가야는 반도의 동남쪽의 내륙에 위치하여 바다도 그리 멀지 않지만, 내륙의 산간지방으로 쉽게 접근할 수도 없는 곳에 위치하여 치열한 각축속에서도 살아남았지만, 그 역사적인 기록이 많지 않아 잊혀진 왕국이었다. 근래 가야시대의 고분발굴을 통하여 차츰 그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래도 본 모습을 알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실정이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 부여와 함께 5국이 존재했던 한국 고대국가의 당당한 일원이었다고 하여, 보통 한국의고대국가를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으로 한정하는 것에 반하여 고대 한민족은 고조선의 후계 국가로 크게 5국이 각축을 벌이던 시대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고조선은 동이계열의 많은 국가들의 연합체였는데, 그 연합체의 붕괴로 그들은 한반도의 살기좋은 남쪽으로 내려와서 각자 또 다른 나라를 세웠는데 그 중에 한 국가가 가야라는 것이다.
그 가야는 신라와 많은 투쟁을 하면서 하나씩 신라에 귀속되었는데 ,신라에 복속되면서 귀족들의 많은 수가 신라의 귀족이 되기도 하였지만, 또 신라에 귀속하기 싫은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대 일본의 국가형성에 큰 세력이 되었다. 그래서 일본에도 가야관련 유적들이 많이 발굴되고 있는 것이다.
신라가 통일전쟁을 일으킬때 그 선봉에 섰던 김유신장군도 가야왕족출신이며, 마지막 대가야의 음악의 성인으로 이름이 높던 우륵 또한 가야의 귀족이었다. 가야금이란 명칭 또한 가야사람들이 즐기던 악기라는 뜻이니.. 가야의 문화수준이 결코 신라에 못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경상도 고령 지산동 산등성이에는 수많은 고분군들이 있었지만, 그게 무덤인줄 몰랐기에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당시 무덤을 쓰던 때에도 양지바른 곳을 택하여 왕과 귀족들의 묘들을 썼던 것을 보면, 체계화된 풍수지리가 발전하지 않았었지만, 인간은 양지바르고 물빠짐이 좋은 곳을, 죽은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좋은 길지로 선택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것이 바로 자생풍수의 증거로 볼 수도 있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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