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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조선은 유교의 한 유파인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다. 정신이 성리학에 이상을 둔 탓인지, 조선은 건축을 각종 예술품을 비롯한 생활도구의 전반적인 가치가 성리학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맞추어졌다. 성리학은 사치를 금하고 근검과 절약을 우선하며, 산업은 농업을 위주로 공업과 상업은 천한 것으로 여겼다.
이런 연유로 그릇에 있어서도, 고려가 크고 우아하고 귀족적인 청자를 발전시킨 반면 조선은 깨끗한 선비의 이상인 군자를 나타내고자 백자를 들여와 발전시켰다. 그 중에도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수 백자가 있는가 하면, 당시 유행하던 산수화 문인화 각종 길상문과 동물무늬가 있는 아름다운 백자에 산화코발트로 문양을 넣은 청화백자는 궁궐의 그릇들에 많이 사용되었다. 무늬가 없는 순수한 백자는 주로 민간에서 사용되었다.
조선의 청화백자는 경기 광주 분원리의 관요를 설치하여 도자 장인들에 의해서 생산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궁궐에서도 초기에는 순수 백자를 사용하다가, 세조대(1445년경까지)에 와서는 채색한 백자들이 사용되었으며, 광주에 분원을 설치한 후(1446년) 1449년 부터 청화백자는 일반인들의 사용을 금하였다. 이후 전 국토가 쑥밭이 되고만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고 백자를 만들던 수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고, 산천이 퇴락하여 백자의 생산도 쇠퇴일로를 걷다가 도자가마가 있던 분원에서도 도자기를 굽기 위해서는 충분한 물과 많은 목재가 필요하였음으로, 수목이 울창한 곳으로 이전하기도 하였다. 이후 1752년 분원을 광주에 고정하였다.
조선의 백자 중에서도 청화백자는 주로 궁궐에서 쓰이던 귀하고 사치스러운 기물이었다. 이는 왕실의 행사나 외국사신맞이행사, 제사 그리고 작은 청화백자는 왕가나 귀족들의 사후 부장품등으로 활용되었다. 청화백자에는 다양한 문양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려진 각종 무늬들 중에도 용무늬 그릇은 가장 귀한 그릇으로 왕가의 행사용으로만 사용되었다.
조선의 청화백자는 애초에 명나라에서 받아들인 기법이었는데, 그 기술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도자기 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본은 처음부터 도자기에 대하여 많은 관심이 있었으나, 도자기를 굽는 방법을 몰라 다도를 최고의 멋으로 여기면서도, 그릇이 변변치 못하여 조선에서 온 다기를 갖는 것을 사무라이들의 자랑으로 여겼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일으켜 국토를 쑥밭으로 만들면서도 도자기를 굽는 기술자들은 무척 대접을 잘 하였다. 그렇게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남아 도자기 산업을 발전시겼으며, 그들이 만든 도자기를 가지고 서양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사농공상의 철저한 신분제로 인하여 천대만 받고 살던 도공들이 일본에서는 최고의 장인으로 크게 우대되었으며, 일본에 끌려간 도공들은 조선의 기술에 일본의 상인 정신을 더 입혀 일본의 국가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일본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물건들도 팔았지만, 조선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도 더욱 철저히 쇄국하고, 더욱 더 성리학의 왜골수에 빠져들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백성들의 뛰어난 기술조차 잘 발휘하게 북돋아 주지 않고, 좋은 기술을 발휘할 터전을 마련해주지 못함으로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야할 기술자 기능인들이 대접은 커녕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세월을 지속하여 살았던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아름다운 청화백자를 보면서도,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한편 더 훌륭한 문화로 꽃피우고, 또 인간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살았던 선대 장인들의 삶에 안타까운 위로의 마음이 들었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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