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한국 대중음악사의 거목이자 민족문화의 수호자이셨던 이무성 화백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선생님은 1972년 새마을노래 제작을 총괄하시며 1,000여 작품의 음반을 기획하신 음악계의 거장이셨습니다. 특히 김민기 선생의 ‘아침이슬’ 음반을 기획하여 한국 민중가요의 새 지평을 여신 분이기도 합니다. 대도레코드사 전무이사로 35년 동안 재직하시며 한국 대중음악 발전에 헌신하셨고,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원, 한국음반산업협회 대의원으로 활동하시며 음악계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음악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탁월한 화백으로서, 평생을 한국화와 역사 기록화를 그리며, 우리 민족의 정신을 화폭에 담아내셨습니다. 특히 선생님께서 한국문화와 한글, 그리고 여성독립운동가 그림을 그리실 수 있었던 것은 <우리문화신문>과의 특별한 인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007년 2월 16일 첫 작품을 시작으로 2025년까지 무려 700여 편의 작품을 <우리문화신문>에 올리시며,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셨습니다. 이무성 화백님과 이윤옥 시인이 함께 여신 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은 <우리문화신문>이 서울 중구청 등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역사적인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지는 오늘, 온 겨레 아니 평화를 꿈꾸는 전 세계인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소풍가는 날을 기다리며 밤잠을 설레듯 밤잠을 제대로 못자고 이 편지를 씁니다. 저는 철도고 1학년 때부터 한글운동, 말 운동을 해오며 남북통일, 언어 문제를 연구해 온 남녘의 한글학자이자 훈민정음학, 세종학을 강의하고 있는 김슬옹입니다. 슬기롭고 옹골찬 저의 꿈이자 우리 겨레의 큰 꿈을 위해 감히 한 가지 청원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통일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딛었으니 해야 될 일이, 서둘러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다급한 일이 많겠지만 북남(남북) 연합 '정음청(언문청)'을 먼저 설립해 주십시오. 통일이 되면 언어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것입니다. 지금도 겨레말큰사전으로 준비는 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제가 정음청을 제안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훈민정음이야말로 남북을 하나로 잇는 가장 강력한 끈이라는 것입니다. 훈민정음에 담긴 인류 보편의 평등사상과 소통정신이야말로 새로운 통일시대 소통의 이념이 될 것입니다. 인류가 낳은 최고의 언어학자 세종 이도는 누구나 쉽게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서울 인사동은 전통문화의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 인사동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인사동 들머리(안국동 쪽)에 있습니다. 커다란 붓이 먹물을 묻혀 동그란 획을 긋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조형물은 2007년 서울디자인재단의 “서울시 도시 갤러리 프로젝트”의 하나로 인사동 상징물 지명공모 당선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붓대에 한글은 전혀 없이 한자로 “大韓民國傳統文化藝術中心仁寺洞”이라고 새겨놓은 것입니다. 인사동이 중국 거리도 아니고 저렇게 해놓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저런 조형물을 만들고, 심사위원들은 그걸 당선작으로 뽑았는지 어이가 없습니다. 그런다고 중국 관광객이 더 많이 올 거라고 착각하신 건가요? 서울시장에게 항의전화라도 해야할 모양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의정부에 있는 ‘신숙주 선생묘’에 가면 1971년에 한글학회에서 세운 ‘문충공고령신숙주선생한글창제사적비’가 있다. 보한재 선생이 나신 554돌을 맞이하여 당시 한글학회 허웅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앞장서서 세운 사적비다. 신숙주는 훈민정음 반포와 보급에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학자요 관리였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 《운회 번역》,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직해동자습》 등 훈민정음 보급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 모든 책에 그의 이름만이 빠짐없이 올라간 것만 보아도 그 업적을 가늠해 볼 수 있다(표1 참조). 그렇다면 한글 혜택을 누리는 후손으로서 세종의 뜻을 이어 남긴 그의 큰 한글 업적을 기려야 할 책무가 있다. 사실 한글창제사적비는 한글학회가 아니라 한글을 쓰는 남북한 온 겨레가 세워야 할 사적비였다. 그런데도 우리 후손들은 그의 업적을 제대로 모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가 세조 편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폄하하고 있다. 사육신, 생육신의 삶은 고결하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사육신이나 생육신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가 세조 편에 선 것을 단순한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서울시 종로구 내수동, 세종문화회관 뒤쪽에 있는 주시경 마당에서 가까운 곳에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들이 세운 조선어학회 곧지금의 한글학회(회장 권재일, 이사장 김종택)가 있다. 조선어학회는 원래 3호선 안국역 근처에 있었는데 광복 뒤 이곳으로 이사 왔다. 원래는 허름한 집이었지만 조선어학회 33인 가운데 한 분이신 애산 이인 선생이 많은 돈을 기증하고 국민 모금과 정부 후원으로 1977년에 지금 건물을 지은 것이다. 학회 앞에는 주시경 선생의 가슴상과 이 학회의 정신을 잘 드러내는 얼말글 새김돌이 학회의 뿌리와 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바로 한글학회는 어렵고 힘든 시기에 한글을 지키고 가꿔온 사람들이 세운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학회이기도 하다. 1908년 8월 31일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들이 지금의 연세대 옆 안산에 자리 잡고 있는 봉원사에 모여 우리 말글 연구를 통해 우리 말글을 지키고 가꾸자고 ‘국어연구학회(회장, 김정진)’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한글학회의 뿌리다. 무려 100년이 넘은 가장 오래된 학회로 봉원사에 가면 그것을 기념하는 새김돌을 세워놓았다. 안타깝게도 주시경 선생은 1914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서울시 도봉구 방학로 17길 46호 132-8541476(성종 7)∼1506(중종 1). 조선의 제10대 왕./재위 1494∼1506.◓ 장소 서울 창동역에서 우이동쪽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 채 10분도 안 돼 방학로 쪽으로 들어서면 ‘연산군 묘’라는 교통표지판 글씨가 보인다. 바로 방학로 17길 옆 야산에 조선시대 10대왕으로 가장 포악했던 비운의 임금, 한글 탄압의 악명을 떨친 연산군 무덤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 세종대왕의 한글 연구를 도왔던 한글 공로자인 정의공주 무덤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어 한 지역에 한글 공로자와 탄압자가 같이 있는 셈이다.또한 도봉구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일제 말기에 기적적으로 소장하여 고이 보관해 온 간송 전형필 선생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무덤이 있는 야산 옆은 원당 공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지만 비운의 왕, 포악스런 왕의 무덤이라 그런지 무덤 자체는 쓸쓸해 보인다.왕족의 무덤은 크게 능과 원과 묘로 구분한다. 능은 왕과 왕후의 무덤이며 원은 세자, 세지빈 또는 왕을 낳은 친아버지, 친어머니가 묻힌 곳을 가리킨다. 묘는 그 외의 왕족의 무덤을 말하는데 연산군은 쫓겨난 임금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썼을까요. 말은 오래 전부터 하고 살았지만 책을 읽고 쓰는 글자생활은 신분에 따라 달랐지요. 양반들만이 주로 글자생활을 했는데 그것도 우리말과 전혀 맞지 않는 한자를 빌어다 썼어요. 한자는 이웃나라인 중국 글자지요. 글자로 쓴 글을 한문이라 불러요. 세종 임금이 우리 글자를 만들기 전까지는 한자와 한문을 주로 썼어요. 세종대왕은 조선시대 네 번째 임금이셨지요. 세종 임금 전까지는 우리 글자가 없었으니 중국글자인 한자를 빌어다 썼습니다. 얼마나 불편한지 상상해 보세요. 말로는 “엄마 저 배고파요.”라고 말하고는 쓰기는 중국 사람들처럼 “母 我饑”라고 썼지요. “난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고는 “我愛你(나-사랑해-너)”라고 썼어요. 말 차례도 다르지요. ‘사랑해’라는 말이 우리말에서는 끝에 왔는데 중국어는 가운데 있지요. 중국말은 영어 차례와 비슷합니다. 영어로는 “I love you"라고 하니 사랑한다 love 가 중국말처럼 가운데 있지요. 그나마 이런 한자는 양반들만 맘껏 쓰고 중인들은 이런 한자를 쉽게 뜯어 고친 이두라는 글자를 썼답니다. 일반 평민이나 천민들은 글자(한자)를 쓸 생각도 못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울산 중구 병영12길 15 ‘외솔최현배선생기념관’ 울산 중구에는 2009년에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관이 생겼다. 물론 생가터는 기념관 옆에 있다. 그 주변은 한글마을로 지정이 돼 기념관의 위상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 온다면 울산 시외버스를 이용하거나 울산역에서 내리면 5003번 리무진 버스를 타고 기념관이 있는 병영사거리까지 30여분을 달리면 된다. 버스를 내려서 골목길을 천여 미터 올라가면 한글마을답게 한글 관련 각종 글맵시와 현수막이 눈에 띈다. 울산은 대표적인 공업 도시이지만 많은 문화와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빼어난 국어학자이자 올곧은 겨레 얼을 지키고 가꿔온 외솔 최현배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나 울산의 역사를 새로운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 지역이 한글 마을로 지정된 건 2014년이다. 현재까지 한글 마을 조성을 위해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더욱이 한글 마을 가까운 곳에 2015년 8월에 시작한 한옥 마을이 조성될 예정이어서 한글 마을은 더욱 다함께 즐기는 마을이 될 것이다. 외솔 기념관은 지상 1층, 지하 1층으로 저서, 유품 등을 전시하는 전시관과 다목적 강당, 한글교실, 영상실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보한재 신숙주(申叔舟, 1417년 8월 2일(음력 6월 20일) ~ 1475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태어난 곳: 전라남도 나주 한글마을 무덤이 있는 곳: 경기도 의정부 고산동 산 53-7 올해는 보한재 신숙주 선생 탄신 600돌이 되는 해다. 훈민정음 반포와 보급, 국방, 외교 등 그가 남긴 업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세조 집권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빛나는 업적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장소 ------------------------------------------------------------------ 신숙주는 훈민정음 반포와 보급에 절대적인 업적을 남긴 조선 전기의 학자요 관리였다. 43번 국도를 따라 의정부에서 남양주 방향으로 가다 교도소 입구 건너편 고산동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로 들어서면 ‘신숙주 선생묘’라는 길안내 교통표지판이 보인다. 여기서 조금 더 가다 고산초등학교를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고 그 왼쪽 산 중턱에 바로 보한재 신숙주 무덤과 한글 공적비가 있다. 이 묘소는 신숙주의 무덤과 신도비, 사적비가 있는 곳으로 고령 신씨 문중공파 종중에서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다. 무덤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지난 1월 21일. 한파가 몰아친, 눈발이 날린 토요일, 전국독서새물결모임 독서아카데미 초중고 학생들 37명을 데리고 한글가온길 답사를 했다. 마지막 답사지인 세종로공원의 한글글자마당에서 한글가온길의 의미를 되새기며 모두들 한글만세를 외쳤다. 세종대왕 동상을 뒤로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길 건너 정부종합청사 쪽으로 오게 되면 세종로 공원이 있다. 여기에는 2011년도에 먼저 조성된 글자 마당과 2013년도에 조성된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탑이 있다. 글자마당은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자긍심을 높이기 위하여 한글 첫소리(19자), 가운뎃소리(21자), 끝소리(27자) 글자로 조합 가능한 11,172자를 재외동포, 다문화가정, 국내거주 외국인, 새터민 등을 포한 전국민을 대상으로 공모하여 11,172명이 각각 한 글자씩 직접 쓴 글씨를 돌에 새겼다. 마침 이때 공모하여 자신의 글씨가 뽑힌 박정애 세종연수원 대표가 참가하여 공모 경위와 글맵시를 설명해 참석자들의 손뼉을 받았다. ‘릱’이란 글자인데 ‘ㄹ’자를 태극 모양으로 하여 천지자연의 조화를 담은 한글의 가치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