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드니 금일도 상봉에 임 만나 보겠네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임 만나 보겠네 갈 길은 멀구요 행선은 더디니 늦바람 불라고 성황님 조른다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성황님 조른다” 얼마 전 JTBC ‘펜텀싱어’라는 음악 프로그램에서는 서도민요 <몽금포타령>이 울려 나왔습니다. 시즌3에서 2위를 차지한 '라비던스'라는 그룹의 노래인데 이들은 소리꾼 고영열을 이끔이로 베이스바리톤 김바울, 테너 존노, 뮤지컬배우 황건하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도민요 <몽금포타령>에 경기민요 <배띄워라>를 조합해서 불렀지요. 한 블로거는 자신이 음악 교사라며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음색들이 귀를 의심할 정도로 하나로 어우러진다. 오직 자신들의 개성과 빛나는 목소리는 하나도 포기하지 않은 채 그냥 그냥 하나가 되어 들린다.”라고 칭찬합니다. 이날 라비던스의 <몽금포타령>은 민요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조차도 민요의 매력에 씸취하게 만들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몽금포타령>은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 나온 가장 많이 알려진 황해도민요로 <장산곳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짚신은 볏짚으로 삼은 신발로 초혜(草鞋)라고도 하며, 재료에 따라 왕골신[菅履]ㆍ청올치신[葛履]ㆍ부들신[香蒲履]도 있는데 특히 짚신과 같은 모양이지만 삼[麻]이나 노끈으로 만든 것을 ‘미투리’ 또는 삼신[麻履]이라 하며 이는 짚신보다 훨씬 정교하지요. 짚신의 역사는 약 2천여 년 전 마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국 송나라 마단림(馬端臨)은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마한은 초리(草履)를 신는다.”라고 했는데 이 초리가 바로 짚신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그의 책 《성호사설》에서 “왕골신과 짚신은 가난한 사람이 늘 신는 것인데 옛사람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선비들은 삼으로 삼은 미투리조차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니, 하물며 짚신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라고 개탄합니다. 이익의 개탄처럼 조선 후기로 오면서 짚신 신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풍조가 생겼지만, 그 이전엔 정승을 했던 선비들도 짚신을 예사로 신었습니다. 짚신은 원래 처음 삼을 때는 왼쪽 오른쪽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만듭니다. 다만 오래 신으면서 오른쪽 왼쪽으로 나뉘는 것이지요. 또한 조선 초기엔 양반과 평민 사이에서 옷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어제는 삼일절 제102돌을 맞는 날이었다. 이날은 아침 10시 탑골공원에서 정부 주최 102주년 삼일절 기념식이 열렸다. 하지만 이날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은 낮 11시 고구리ㆍ고리(高句麗ㆍ高麗)연구소(이사장 서길수)가 주최하는 동북공정 침탈 보고회와 12시에 진행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침탈한 우리 역사 되찾기 3ㆍ1선언식”이었다. 서길수 이사장은 비대면 zoom 시스템을 통한 보고회에서 “1996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공산당은 우리역사 침탈을 국책사업으로 골라 뽑은 뒤, 2002년 중화인민공화국 공산당 동북 3성(길림성, 요령성, 흑룡강성) 위원회 선전부ㆍ사회과학원과 함께 공식적으로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침탈 프로젝트를 실시했다”라고 지적했다. 서 이사장은 이어서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은 겉으로는 사회과학원을 앞세워 대한민국과 논의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중국공산당 길림성위원회 선전부와 사회과학원을 중심으로 역사침탈(동북공정)을 꾸준히 강행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2002년 2월부터 2008년 말까지 ‘동북공정’을 강행하고, 2009년 「동북 변강 역사와 문화 학술연구토론회(東北邊疆歷史與文化學術硏討會)에서 동북공정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여기 만취한 선비가 흐느적거리면서 갈 ‘지(之)’ 자로 걷고 친구들이 부축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 후기 화가 김후신(金厚臣)이 그린 <대쾌도(大快圖)>로 자본담채, 크기 33.7 x 28.2 cm, 간송미술관 소장입니다. 이 그림을 그린 때는 살벌한 금주령이 내려진 영조임금 때였습니다. 술을 빚거나 마시는 것을 엄하게 다스리던 시절이었지만 금주령 앞에 희생당하는 건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이었지요.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 하는 백성은 술을 빚어 팔았다고 잡혀가고, 몰래 술 마셨다고 잡혀가지만, 금주령이 내려진 대낮에도 양반들은 거리낌 없이 술을 마시고 대로를 활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름을 날렸던 조선의 많은 유명 화가들도 술에 취해야만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 많습니다. 조선의 대표적 주당 화가들을 보면 우선 심한 술버릇과 기이한 행동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음을 물론 마침내는 눈밭에서 술에 취해 얼어 죽은 최북이 있지요. 또 술에 취해야 그림을 그렸던 장승업, 술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섭섭해할 정도였으며, 호를 ‘취화사(醉畵史)’로 붙였던 김홍도, 역시 호를 취옹(醉翁)이라 붙였던 김명국도 그 대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3.1만세운동 102돌 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삼일절을 맞아 3.1만세운동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미국 AP통신 임시특파원 앨버트 W. 테일러(1875∼1948)도 기억해야만 합니다. 원래 앨버트 테일러는 1896년 조선에 들어온 광산 사업가였는데 AP통신 특파원으로도 활동하면서 3.1만세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을 나라 밖에 알렸습니다. 특히 테일러는 3.1만세운동 독립선언문을 손에 넣은 뒤 이를 일제에 압수당하지 않기 위해 3.1만세운동 전날 태어난 아들의 침대 밑에 숨겨두었다가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 테일러가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 짓고 살았던 가옥 '딜쿠샤'(Dilkusha)의 원형이 복원되어 삼일절을 맞아 개방합니다. 서울시는 2017년 딜쿠샤 고증 연구를 거쳐 2018년 복원 공사에 착수, 건물 정면 토지 매입비 등 모두 43억 원을 들여 지난해 12월 완공했습니다. 딜쿠샤 내부 1ㆍ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살 때의 모습을 당시 사진 6장을 토대로 재현했다고 하지요. 가구 등은 대부분 1800년대 후반∼1900년대 초반 출시된 고전 제품을 사서 배치했고, 구하지 못한 물건 일부는
석 양 - 한 임 동 오늘 하루의 일을 마치고 떠나는 뒷모습 아름답다. 언덕 위 굽은 소나무도 고운 빛으로 따라 물든다. 만나고 헤어지는 아쉬움은 다 하지 못한 사랑이더라 그대 눈에는 내가 빛나고 나는 그대로 하여 빛나느니 이태준(李泰俊, 1904~1970)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라 평가받는데 그가 쓴 단편소설 가운데 삼인칭 전지적 시점의 <석양(夕陽)>이란 작품도 있다. <석양>은 주인공 매헌이 경주 유적지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 타옥이 떠나므로 맞게 되는 황혼을 암시하며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이다. “‘가버리었구나!’ 종일 마음이 자리잡히지 않았다. 술도 마셔보았다. 담배를 계속해 피워도 보았다. 저녁녘이 되자 바람은 어제보다 더 날카로운 것 같으나 매헌은 해변으로 나와보았다. 파도 소리는 어제와 다름없었다. 타옥의 말대로 파도 소리는 유구스러웠다. 석양은 해변에서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각각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속히 황혼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이태준은 <석양>에서 파도 소리는 어제와 다름이 없었고, 석양은 해변에서도 아름답다고 애써 강변한다. 그럼에도 그 아름다운 석양은 각각으로 변하고 마침내는 황혼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한해 가운데 보름달이 가장 크고 밝다는 정월대보름입니다. 정월은 예부터 사람과 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화합하고 한 해 동안 이루어야 할 일을 계획하고 비손하며 점쳐보는 달이라고 했습니다. 《동국세시기》에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하는 것을 망월(望月)이라 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운수가 좋다."고 하여 이날은 남녀노소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며 저마다 소원을 빌었습니다. 대보름날 아침 일찍 일어나면 '부럼 깬다' 하여 밤, 호두, 땅콩, 잣, 은행 등 견과류를 깨물며 한해 열두 달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도록 빕니다. 또 부럼을 깨물 때 나는 소리에 잡귀가 달아나고 이빨에 자극을 주어 건강해진다고 생각했지요. 또 아침 일찍 일어나 사람을 보면 상대방 이름을 부르는데 이때 상대방이 대답하면 '내 더위 사가라!'고 하는데, 이름을 불린 사람이 그걸 알면 “먼저 더위!”를 외칩니다. 이렇게 더위를 팔면 그해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재미난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 대보름날엔 세 집 이상의 성이 다른 사람 집의 밥을 먹어야 그해 운이 좋다고 하며, 평상시에는 하루 세 번 먹는 밥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은 명절의 하나인 정월대보름입니다. 정월대보름의 다른 이름은 원소절(元宵節), 원석절(元夕節), 원야(元夜), 원석(元夕), 상원(上元), 큰보름, 달도, 등절(燈節), 제등절(提燈節)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특히 신라 제21대 소지왕(炤智王)이 까마귀의 도움으로 죽음을 모면했다고 하여 까마귀를 기리는 날, 곧 “오기일(烏忌日)”이라고도 합니다. 정월은 노달기라고 하여 설날부터 정월대보름까지 이어지는 민속놀이와 세시풍속이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전해오는 속담에 “설은 나가서 쇠어도 보름은 집에서 쇠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설은 새해가 시작하는 때이므로 객지에 나간 사람도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지내고 조상에게 예(禮)를 다하고 이웃에게 인사를 다녀야 하는데 부득이 설을 집에서 쇨 수 없다면 정월대보름에라도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보름 이후부터는 슬슬 농사철이 다가오므로 농사 준비를 위해서도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월보름임에도 여전히 나들이 중이면 ‘철(농사철)을 모르는 사람이요, 철이 없는 사람이요, 농사와 연을 끊은 사람’이라고 해서 욕을 먹었고 농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한센병을 온몸으로 껴안고 살다간 천형(天刑)의 시인 한하운의 <전라도 길 - 소록도로 가는 길> 시 일부입니다. 신발도 아니고 일본의 일할 때 신는 신발겸용 버선인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고 피를 토하듯 노래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5년 전인 1916년 오늘(2월 24일)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의 남쪽 섬 소록도에 자혜의원이라는 이름으로 한센병 환자 100명을 수용하는 시설을 설립했습니다. 그 뒤 일제는 1931년 만주 침략 이후 나예방법을 제정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일반 사회로부터의 차별과 절대적 격리정책을 소록도에 적용하였지요. 소록도 갱생원은 1930년대 말에 이르면 세계 제2위의 규모를 '자랑'하는 대규모 수용시설이 되었지만, 동시에 환자들의 강제노동, 감금, 생체실험, 단종 등이 마구 이루어져 마치 종신감옥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한센인들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전남 구례 지리산 자락에는 유서 깊은 절 화엄사가 있습니다. 화엄사는 멀고먼 인도에서 오신 연기조사가 지은 절로 알려져 있는데 연기조사는 효성이 지극한 스님이었습니다. 화엄사 대웅전 뒤편 언덕을 효대(孝臺)라 부르는데 이곳에는 4마리 사자가 석탑을 떠받치고 있는 4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이 있습니다. 그 4사자석탑 4마리 사자 한가운데에는 연기조사의 어머니가 합장하고 단아하게 서 있습니다. 석탑이 마주 보이는 곳에는 아담한 석등이 하나 있는데 이 속에는 연기조사의 모습이 어머니를 우러르고 있지요. 머나먼 고국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의 마음속에는 늘 어머니가 자리잡고 있었고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연기조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들만을 보고싶어 했을 어머니를 그리며 즈믄해(천 년)를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대각국사 의천은 연기조사의 효심을 시로 읊었는데 효대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온 말이지요. 국보 제35호 지정된 4사자석탑은 남북국시대(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탑의 높이는 5.5m이고 탑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72과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