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주 KBS1 텔레비전 ’다큐인사이트‘ 프로그램에서는 <어느 수집가의 초대, 인왕제색도>가 방영되었습니다. 국보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겸재 정선이 76살 때인 1751년(영조 27) 자기가 살던 지금의 효자동 쪽에서 보고 비 온 뒤의 인왕산 경치를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삼성 고 이건희 회장이 가지고 있던 것을 유족들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인데 올해 4월 28일부터 8월 28일까지 <수집가의 초대 – 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 전시되었던 작품입니다. 이 그림에는 특징 있게 생긴 인왕산의 바위를 하나하나 그려 넣었습니다. 그 아래에 안개와 나무들을 그려 넣어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구도를 이룹니다. 특히 나무와 집들이 있는 가까운 곳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인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렸으며, 멀리 바라보이는 원경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고원법(高遠法)으로 표현했습니다. 또한 안개와 산등성이는 엷게, 바위와 나무들은 짙게 처리하였지요. 그리고 먹색의 강렬한 흑백 대비로 굴곡진 산의 골짜기를 생생하게 그려 화폭에 변화와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이 작품이 그려지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주변 사람들을 보면 초ㆍ중ㆍ고 12년 동안 국어를 배우고, 대학국어까지 공부한 사람들 모두 글쓰기는 참 어려워합니다. 그 까닭은 학교에서 배우는 국어가 그저 입시에 맞춰서 공부했을 뿐 학교에서 제대로 된 글쓰기 교육을 받지 못한 까닭입니다. 여기에 언론이나 지식인들이 모두 잘난 체에 급급한 나머지 어려운 말을 마구 써대기 때문에 일반인들로서는 글쓰기가 두려워진 것입니다. 576년 전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그 목표를 어려운 한문이 아닌 글자로 백성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도록 하려 함이었습니다. 곧 글쓰기는 쉽게, 누구나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되도록 짧은 글이어야 하지요. 어떤 이는 한 글월(문장)을 5줄이 넘게 이어 쓰는데 그러면 분명히 임자씨(주어)와 풀이씨(술어) 관계가 명확해지지 않으면서 글을 읽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글이 됩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말을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한 낱말을 빼도 말이 통하면 그 말은 과감히 빼버려야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다해서 뛰었다.”에서 ‘불구하고’는 일본말로 쓸데없는 군더더기입니다. 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병(病)> - 허홍구 너는 누구냐고 물었습니까? 이름은 병이지만 여러 형제가 있어요 앞뒤가 꽉 막혀 소통되지 않는 곳을 찾아들어요. 막힌 공간에 병이 든다는 것은 다 알잖아요 소통이 없으면 몸도 맘도 괴롭고 답답해요 공기도 통해야 하지만 피도 잘 통해야 하고 마음도 잘 통해야 서로 사랑하게 되잖아요 고집불통 불평불만 욕심 많고 질투하는 맘은 스스로 어둡고 답답한 공간에 갇히게 되지요 한 번뿐인 인생인데 건강하게 살다 가야겠지요 마음 활짝 열어놓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세요. 조선시대는 기록의 나라였는데 세계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따위가 그 증거다. 그런데 그건 나랏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개인들도 기록하고 또 기록하면서 살았다. 그 가운데 노인병 다스림의 기록 《정청일기(政廳日記)》도 그 하나다. 《정청일기》는 영의정이면서 영중추부사인 75살 노수신의 병을 다스리는 상세한 기록이다. 1588년(선조 21년)부터 시작해서 1590년 3월 11일까지 병색이 깊은 노수신의 건강상태와 음식 그리고 약 수발 상황이 자세히 쓰여 있다. 기록을 보면 날마다 먹은 식사는 밥을 위주로 탕국, 구이, 마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며칠 뒤면 576돌을 맞는 한글날입니다. 한글날을 맞아 이때만 되면 반짝하는 행사들이 여기저기서 열립니다. 그러나 이때만 반짝할 뿐 진정 한글을 사랑하는 모습은 잘 보이질 않습니다. 한글날을 그저 넘길 수 없다는 듯한 마지못한 행사들 뿐입니다. 한글날을 맞아 정말 종요로운 일은 우리말과 한글을 진정 자랑하는 일입니다. 세종이 579년 전에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가장 종요롭게 생각한 것은 ‘백성 사랑’이었습니다. 한문에 능통한 절대군주였던 세종이 자기의 권위는 내려놓고 백성과 소통하려 한 것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와 있는 창제의 목적에는 분명히 한자를 몰라 억울한 일이 생겨도 호소하지 못하는 백성이 쉽게 쓸 수 있는 글자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글 닿소리와 홀소리 28자를 만들었는데 이는 세상 어떤 글자보다 많은 11,172자를 만들 수 있어 그 어떤 나라 말이나 소리나 표현할 수 있는 위대한 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세종보다도 한문을 잘 안다고 할 수 없는 지식인들이 온통 어려운 한자말을 섞어 쓰며 잘난 체하고 외국어를 써야만 지식인인 체 마구 영어를 씁니다. 예를 들면 ‘예술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대란치마”는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 여성이 적의(翟衣, 왕비와 왕세자빈을 비롯하여, 왕대비나 대왕대비와 같은 왕실 적통의 여성 배우자들이 입는 법복(法服)이나 원삼(圓衫, 조선시대 부녀자들이 입던 예복) 따위 예복 차림을 할 때 아래옷으로 갖추어 입는 치마입니다. 치마는 다홍이나 남색 비단으로 만들고 치마를 장식하기 위한 스란단은 두 층으로 붙이는데 윗 스란단 너비는 22~25cm, 아래 스란단 너비는 15~19cm입니다. 스란단에 황후는 용무늬, 왕비나 왕세자빈은 봉황무늬, 공주나 옹주는 ‘수(壽)’, ‘복(富)’, ‘남(男)’, ‘다(多)’ 따위의 글자나 석류ㆍ불로초ㆍ연꽃 등의 그림을 금실로 짜거나 금박을 놓습니다. 대란치마 말고 궁중 여인들의 옷으로 “스란치마”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평상시 당의를 입을 때 아래옷으로 갖추어 입는 치마입니다. 또 이 스란치마는 적의나 원삼 등의 예복 차림을 할 때 대란치마 안에 입는 옷이기도 한데 스란단은 대란치마와 달리 한 단만 붙입니다. 요즘 혼례식 때 신부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서양에서 온 하얀 드레스를 입지만 전통혼례를 하면서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대란치마를 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동 반 자 - 고정애 거리에서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네거리에 이르러 의견이 갈렸다 목적지까지 A는 왼쪽 B는 오른쪽 오른쪽이 정답인데 A가 더 우기는 통에 180도 반대로 가고 있었다 갈림길에서 티격태격 서로 옳다며 잘못되게 가기도 하는 A 그리고 B 내 안에도 그 두 사람 살고 있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서》, 《청춘은 아름다워라》, 《유리알 유희》 등을 읽었지만, 특히 당시 우리나라에 《지와 사랑》이란 이름으로 뒤쳐 펴낸 책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인상 깊게 읽었다. 소설에선 나르치스(지성)과 골드문트(사랑)란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실제 사람의 마음속에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내용으로 기억되고 있다. 사람은 평생 끊임없는 내면의 갈등을 겪으면서 살아간다. 사실 인생이란 크고 작은 갈등과 선택 속에서 헤매다가 죽는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은 도덕이나 규칙 속에서 살게 마련이지만, 그런 삶 속에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또 하나의 요소, 곧 욕망과 쾌락이 불쑥 고개를 내밀어 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판소리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이면서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올랐는데 부채를 든 1명의 소리꾼이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창(소리)ㆍ아니리(사설)ㆍ발림(몸짓)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극적 음악입니다. 본래 판소리는 춘향가ㆍ심청가ㆍ수궁가ㆍ흥보가ㆍ적벽가ㆍ변강쇠타령ㆍ배비장타령ㆍ옹고집타령ㆍ강릉매화타령ㆍ무숙이타령ㆍ왈자타령ㆍ장끼타령ㆍ가짜신선타령(또는 숙영낭자전) 등 12마당이었으나, 현재는 춘향가ㆍ심청가ㆍ수궁가ㆍ적벽가ㆍ흥보가 등 5마당만이 전승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적벽가’는 ‘화용도(華容道)’라고도 하는데 중국 구전 역사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적벽대전을 중심으로 빌려와 소리하고 있지요. ‘적벽가’는 원래 충의를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당성이 없는 권력에 의해 전쟁에 동원되어 죽음으로 내몰리는 민중들의 한과 이에 대한 항의와 풍자 또한 중요한 부분이라고 합니다. “생이별 하직허고 전장에를 나왔으나 언제나 내가 다시 돌아가 그립든 자식을 품 안에 안고 아가 응아 어루어 볼거나 아이고 아이고 내 일이야”라는 사설이 바로 그런 대목입니다. 그런데 그 ‘적벽가’를 완창 소리로 들어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몇 해 동안이나 비바람 소리를 내었던가 여태껏 지녀온 작은 거문고 외로운 난새의 노랠랑 뜯지도 말자더니, 끝내 백두음 가락을 스스로 지어서 읊었거니 위 시는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 3대 여류시인의 하나로 불리는 매창(李梅窓, 1573-1610)이 지은 시 <거문고를 타면서[彈琴]>입니다. 매창은 천민 출신으로 뛰어난 시인이었던 유희경과 가슴 시린 사랑을 나눈 걸로 유명하지요. 매창은 지녀오던 거문고로 <난새의 노래>와 <백두음> 사이 고민하다가 <백두음>을 지어서 노랠 부릅니다. 여기서 ‘난새의 노래’란 새장에 갇힌 새의 외로움을 노래하는 것이고, 백두음은 늙어가는 여인이 자신의 흰머리를 슬퍼하는 노래입니다. 매창은 희경을 그리워하다가 그렇게 슬픔을 노래했습니다. 매창은 열 살 되던 해 부안의 내로라하는 시인 묵객이 모두 모인 백운사 시 짓기 대회에서 구경삼아 갔다가 실로 절묘하기 이를 데 없는 시를 지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한 뛰어난 여류시인입니다. 시와 가무에도 능했던 매창은 광해군 2년(1610) 세상을 떠나자 그녀가 끔찍이 사랑하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추 분 - 정양 밤이 길어진다고 세월은 이 세상에 또 금을 긋는다 다시는 다시는 하면서 가슴에 금 그을수록 밤은 또 얼마나 길어지던가 다시는 다시는 하면서 금 그을수록 돌이킬 수 없는 밤이 길어서 잠은 이렇게 짧아지나 보다 어제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추분(秋分)이었다. 그런 뜻으로 우리는 추분을 중용(中庸)의 도를 생각하게 하는 날로 받아들인다. 더함도 덜함도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해가 진 뒤에도 어느 정도의 시간까지는 빛이 남아 있어서 낮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길게 느껴진다. 이때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추분 이후부터 동지까지 양기보다는 음기가 점점 더 성해져 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마음속에 따뜻한 모닥불을 지펴나가야만 한다. 추분 무렵 고구마순은 물론 호박고지, 박고지, 깻잎도 거둔다. 또 목화를 따고 고추도 따서 말리며 벼를 거두고 그 밖에 잡다한 가을걷이도 한다. 이때 농촌을 가보면 붉은 고추, 노란 호박고지, 검은깨 등을 말리느라 색색이 아름답다. 또 추분이 지나면 날이 쌀쌀해지므로 예전엔 이불솜을 트기 위해 솜틀집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겨울나기 채비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아직도 햇볕이 쨍 내리쬐는 한낮에는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여름의 끝자락에 명창 정광수를 기리는 <제2회 정광수 전국판소리경연대회(대회장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가 서울 종로구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렸다. 종로구청(구청장 정문헌)이 주최하고 (사)정광수제판소리보존회(이사장 정의진)가 주관하여 9월 17일과 18일 이틀 동안 성황리에 열린 것이다. 과연 ‘정광수’는 어떤 분인가? 정광수(丁珖秀, 1909년 ∼ 2003년)는 철종ㆍ고종 때의 명창 정창업의 손자로, 15살 때 국창 김창환에게 ‘춘향가’를 공부하면서 소리에 입문했고, 28살 때 유성준 명창에게 ‘수궁가’와 ‘적벽가’를, 정응민 명창에게 ‘심청가’를, 이동백 명창에게 ‘적벽가’ 가운데 ‘삼고초려’ 대목을 공부했다. 한때 대동가극단에 참여해 임방울ㆍ이화중선ㆍ박초월 명창과 함께 활동했으며, 1939년 동일창극단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판소리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노력을 버리지 않았다. 8·15광복 뒤 광주에서 광주국악원을 창설하고 후진을 양성하다가, 1964년 유성준제 ‘수궁가’로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74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