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낮 땡볕 논배미 피 뽑다 오신 아버지 / 펌프 꼭지에 등대고 펌프질 하라신다 / 마중물 넣어 달려온 물 아직 미지근한데 / 성미 급한 아버지 펌프질 재촉하신다 / 저 땅밑 암반에 흐르는 물 / 달궈진 펌프 쇳덩이 식혀 시린물 토해낼 때 / 펌프질 소리에 놀란 매미 제풀에 꺾이고 / 늘어진 혀 빼물은 누렁이 배 깔고 누워있다" 위는 고영자 시인의 '펌프가 있는 마당풍경' 시인데 무더운 여름날 펌프가 있는 마당 풍경이 수채화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2,000년에 펴내 근세기 한국문학의 고전이라고 평가되는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도 “동네 입구로 들어선 꼽추는 헐린 외딴집 마당가로 가 펌프의 손잡이를 눌렀다. 그는 두 손으로 물을 받아 입을 축였다.”라는 대목이 나오는 걸 우리는 기억합니다. 지금 지구상은 온통 불볕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지요. 이렇게 몹시 더운 날, 예전엔 우물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가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수돗물을 쓰기 전에는 한동안 집집이 마당 가에 펌프가 있었습니다. 펌프는 압력작용을 이용하여 관을 통해 물을 퍼 올리는 기계입니다. 널찍한 마당 한쪽에 놓여 있던 펌프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43년 오늘(8월 3일)은 백산 안희제 선생이 숙원인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둔 날입니다. 백산 선생은 1916년 무렵 고향의 논밭 2천 마지기를 팔아 자본금을 마련하고, 뜻 있는 이들과 함께 부산 중앙동에 포목과 건어물 따위를 파는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세워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소규모였던 상회는 1917년 합자회사로 바꾸고 1918년이 되자 주식회사로 전환했는데 이때 중요 출자자는 안희제, 경주 최부자집 주손 최준, 경상우도관찰사를 지낸 윤필은의 아들 윤현태였지요. 백산무역주식회사는 독립운동자금을 위한 나라 안 독립운동기지로 삼기 위해 영남지역 지주들이 여럿 참여해 조직한 대규모 무역회사였습니다. 그런데 독립운동자금은 회사의 손익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지원해야 했기에 결손이 거듭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도 그걸 알고 있는 주주들은 1921년 한 차례, 1923년 두 차례나 자금을 보태 자금 위기를 막아주었는데 이러한 지원은 장부거래 형식을 띄었기 때문에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광복이 되고 귀국하여 경교장으로 온 김구 선생은 최준 선생을 불러 독립자금 지원에 고맙다는 말을 한 다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 조그만 가슴에 서리고 서려 있는 여인의 봄볕 같은 정을 붓끝으로 어떻게 그 마음마저 고스란히 옮겨 놓았느뇨?” 우리가 익히 아는 미인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 혜원 신윤복이 그렸는데 화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스스로 감격에 겨워 그림에 이런 글을 적어 놓았습니다. 사계절출판사에서 나온 《한국생활사박물관 10》에는 “다리(가체)를 구름처럼 얹은머리에 동그랗고 자그마한 얼굴, 둥근 아래턱, 다소곳이 솟은 콧날과 좁고 긴 코, 귀밑으로 하늘거리는 잔털”이라는 표현으로 이 여인은 우리 전통미인의 전형이자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평가했지요. 조선 후기의 현실적 소재를 다룬 이 미인도는 이 방면 으뜸 걸작으로 꼽히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 여인의 전통적 미인상의 한 전형을 보인 작품으로 비단천 먹 채색으로 그린 것이며, 사실적 기법으로 정통초상기법을 따라 머리털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입니다. 또 윤곽선(쌍선)을 그린 뒤 그 안에 채색하는 구륵법(鉤勒法)의 그림이라고 하는데 화폭은 113.9cm x 45.6cm로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또 하나의 미인도가 있습니다. 바로 윤두서의 손자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인도 불교를 전파하려고 중국에 온 스님 가운데 달마대사라는 분이 있었다. 달마대사는 원래 인도 남부에 있던 팔라바라는 왕국의 왕자였는데 중국에 건너와서 새로운 불교 곧 '선종(禪宗)'를 전파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전까지의 불교가 임금이나 귀족들을 위한 것이었던 것과 달리, 선종은 사람이면 누구나 본래 타고난 마음을 잘 터득하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 불교다. 달마대사의 이런 가르침은 귀족 종교를 쳐다보기만 하던 보통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으면서 널리 전파됐다. 이 달마대사는 신비로운 능력을 갖췄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달마대사를 그린 ’달마도(達磨圖)’를 통해 사람들은 달마대사를 오래 기억하고자 했다. 그런데 조선 중기 신필로 불렸던 화원 김명국은 특히 달마도로 유명했다. 달마대사 그림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달마대사는 원래 인도 남쪽 지방 출신답게,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는 갈고리처럼 그렸다. 또 눈썹은 매우 짙고 수염도 덥수룩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으며, 무얼 꿰뚫어 보려는 듯 아주 커다랗고 매서운 눈을 가졌다. 대체로 짙은 먹을 구사하면서도 간결한 구성과 빠른 필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독 재 자 - 허 홍 구 아침마다 수염을 깎는다. 내 몸에서 누리는 저 자유를 사정없이 잘라 버렸다. 오늘도 나는 독재자가 되었다. 제 몸에 생명도 잘라 버리는 무지막지한 권력은 독재자다. 지난 7월 8일 뉴스를 보면 미국의 올해 총기난사 사건이 339건이나 벌어져 사망자가 371명, 부상자가 1천429명으로 집계됐다고 한다. 총기난사 사건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22% 늘었단다. 미국은 현재 등록된 총기만도 3억 9천만 정이라고 하는데 한 마디로 미국 사람들은 총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가 보다. 하지만 그 총부리가 결국 자신들에게도 향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에 견주면 우리 겨레는 단군조선 때부터 ‘홍익인간’을 내세우며, 모든 사람이 함께 살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이 ‘홍익인간’은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이 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교육법의 기본정신이 되기도 하였다. “찬 서리 /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 조선의 마음이여”라고 김남주 시인은 <옛 마을을 지나며>라는 시에서 입동 즈음 정경을 얘기했다. 우리 옛 조상들은 그 맛있는 감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9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에서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 한기를 이장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이 무덤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무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무덤을 헤쳐나가자 죽은 남편을 향해 애끓는 사랑과 비통함을 토하는 편지가 나왔습니다. 유물들을 통해 밝혀진 것은 무덤에 묻힌 이가 1586년 31살의 나이로 갑자기 죽은 이응태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응태의 아내 곧 원이엄마는 한지에 한글로 편지를 써서 망자의 가슴에 덮어둔 것입니다.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하얘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시 이 편지가 발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조선판 '사랑과 영혼'이라며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지요. 그런데 무덤에서 나온 한글 편지는 1586년에 쓴 원이엄마 편지보다도 앞선 15C중반~16C전반에 쓴 것으로 보이는 군관 나신걸(羅臣傑)의 편지도 있습니다. “분(화장품)하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장마가 끝나자마자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불볕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불볕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지요. 더위는 세상을 점령했고 밤새 열대야에 시달리고, 낮에는 에어컨 바람 탓에 냉방병에 걸릴 지경이지요. 이러한 불볕더위 속에서도 코로나19 탓에 휴가도 제대로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그림 하나를 선사합니다. 바로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박연폭포>가 그 그것이지요. 작품의 크기는 세로 119.7㎝, 가로 52.2㎝인데 겸재가 그린 진경산수화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진경산수화의 진수라고 평가되는 그림은 《박연폭포》와 함께 《금강전도》, 《인왕제색도》가 겸재의 3대 명작으로 꼽히지요. 특히 이 《박연폭포》는 보는 그림이 아니라 듣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우렛소리를 거느린 높이 37m 폭포의 물줄기는 단박에 내리그은 정선의 붓끝에서 세차게 귓전을 때립니다. 특히 길게 과장해서 그려진 폭포수는 그림 아래 개미만큼 작게 그려진 선비와 시동 때문에 크게 대비됩니다. 그 대비는 소리의 크기를 인물의 크기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16년 전인 1905년 오늘(7월 29일)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가쓰라-태프트협약(Katsura-Taft Agreement)”이 맺어진 날입니다. “가쓰라-태프트협약”은 그해 7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은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타로가 회담하여, 미국의 대필리핀 권익과 일본의 대조선 권익을 상호 교환 조건으로 승인한 밀약입니다. 그 협약의 중심 내용은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일본이 양해하고,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보호권 확립을 양해하는 일입니다. 이후 이 비밀 협정을 바탕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었으며, 1910년 8월 조선을 강제 병합해 식민지로 만들었고 그해 9월 미국은 이를 승인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종은 미 국무부에 “우리는 미국을 형님과 같은 나라라고 생각하오.”라는 말을 전했을 정도로 미국이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 줄 것을 기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일본에 “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했으면 좋겠다”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고 하지요. 또 그의 딸 엘리스가 조선에 와서 조미 우호를 위해 축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월 뉴스엔 “대한체육회가 이른바 '맷값 폭행'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최철원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 당선인(마이트앤메인 대표)의 인준을 최종 거부했다.”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보전에는 “이때 본읍 김좌수가 흥부를 불러 하는 말이, ‘돈 삼십 냥을 줄 것이니 내대신 감영에 가서 매를 맞고 오라.’ 흥부 생각하되, ‘삼십 냥을 받아 열냥 어치 양식 사고 닷냥 어치 반찬 사고 닷냥 어치 나무 사고 열 냥이 남거든 매 맞고 와서 몸조섭하리라.’“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매품팔이 대목이죠. 실제 조선시대에 이런 매품팔이가 있었을까요? 《승정원일기》에 “돈을 받고 대신 곤장을 맞는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매품팔이가 있었던 게 분명하지요. 특히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장유승 책임연구원이 쓴 글에 보면 조선후기 문인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 나오는 직업적 매품팔이가 소개됩니다. 그런데 아내가 채근하는 바람에 고작 7냥씩 받고 하루 세 번이나 매품을 팔았던 사람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겨우 7냥? 그런데 조선시대 법전에 곤장 백 대는 7냥의 벌금으로 대납할 수 있었기에 흥부전의 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나무를 다루어 집 짓는 일이나 가구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목수 또는 목장(木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목장에는 크게 둘로 나누어 대목장과 소목장이 있습니다. 《경국대전》에는 대목장과 소목장의 구별 없이 목장으로만 기록됐으나 고려시대에도 집을 짓고 가구를 짜는 두 분야의 영역은 따로 있었지요. 이 가운데 먼저 대목장(大木匠)은 큰 건물 곧 궁궐이나 절 그리고 집을 짓는 책임자를 말하는데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해 전통을 잇도록 합니다. 목조건물을 짓는 데는 목수 외에 기와장이(蓋匠)ㆍ흙벽장이(이장-泥匠)ㆍ단청장(丹靑匠-가칠장假漆匠)ㆍ석수(石手) 등과 긴밀히 협조해야 하지만, 대목장이 건물을 설계하고 공사의 감리까지 겸하는 까닭에 건축에 있어서 총책임자입니다. 그런가 하면 집 지을 때 문짝ㆍ반자ㆍ난간을 만들고 장롱 따위 가구를 만드는 소목장(小木匠)도 있습니다. 소목장 역시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었지요. 예전에는 궁궐이나 절을 짓는 일이 아주 중요했기에 이 목장들에게 벼슬도 내렸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통일신라의 관직을 보면 도시행정을 관장하는 전읍서(典邑署)에 전문직으로서의 목수가 상당하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