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파란 하늘에 뭉개구름도 두둥실 떠있는 낙산사에 올라본다. 보살은 대승불교에 도입된 수행자로서 최고의 위치에 이른 분으로, 소승불교에는 없는 존재이다. 소승불교가 자신의 깨달음을 주 수행의 목적으로 삼고 수행의 마지막에 아라한이 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대승불교는 자신의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세상살이 고통속에 신음하는 중생들을 그냥 두고 혼자 깨달은들 그것은 궁극적인 수행자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없는 현세에서는 관세음보살을 비롯한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미륵보살 대세지보살 금강장보살 허공장보살 인로왕보살 등이 각각의 위치에서 중생들의 고통도 덜어주고 지혜도 갖게하며 지옥에까지 찾아가서 구해준다고 믿는 것이다. 많은 보살 중에서도 특히 관세음보살은 현세에 살아가는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책임지고 구해준다고 믿는 보살중의 보살이기에 전국의 모든 절에는 관세음보살이 대부분 모셔져 있다. 특히나 낙산사는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고 믿는 관세음보살의 성지이기에 많은 참배객들이 연중 무휴로 붐비는 곳이다. 낙산사에는 의상대사가 기도하던 자취도 있고 또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직접 만났다는 전설같은 곳이기에 특히 기도효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민족(배달겨레)이근세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조선은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독립황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 독립하기 위함이 아니고, 일제가 한국땅을 집어삼키기 위한 술책에 놀아난 것이었다. 조선이 청나라에 상국으로 모시는 사대를 지속한다면 조선을 식민지속국으로 삼고자 할 때 마다 상국인 청나라가 기득권{?}을 주장하며 간섭하겠기에, 이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하여 일본은 조선의 왕이었던 고종에게 청나라 제후에서 벗어나독립된 황제국이 되기를 권유하였다. 이에 고종은 1897년조선이란 국호를 버리고 한(韓)이라는 우리민족의 옛날 국가인 만주지역에 있었던마한 번한 진한 명칭을 찾아내 그 공통점인 한(韓)을국호로 정하여 황제국으로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이 없는 상태에서 이름만 바꾼다고 당장 황제국이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한제국은 황제국으로 선포했으나, 그동안의 구태와 악습을 타파하는 자체적인 개혁을 하지 못하고 기득권층 안에서 세력을 잃지 않으려는내분에 세월을 허송하다가 결국 외세를 끌어들여 스스로 패망의 길에 접어들었다. 지도자들은 스스로 개혁 대신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함께 살기를 외치다 먼저 가버린 백남기 할아버지 ! 그러나 이승을 떠난 영혼은 고이 갈 수도 없게 되었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영혼과 육체가 함께 할 때이고,그 때는공기가 콧구멍을 통해폐를 통하여 들어가 그 신선한 공기 속의 산소를 심장이온 몸 구석 구석까지 보내주고, 구석 구석에 쌓여있던 노폐물과 탁한 공기를모아서 다시 폐를 통해 콧구멍으로 내 보낼 수 있을 때사람은살아간다. 그런데 그런 숨쉬기가 안되고 외부의 깨끗한 공기가 몸속으로 전해지지 못하면 구석 구석에 노폐물이 쌓이고, 세포는 죽어가고, 결국심장도 멎어 버린다. 그런 상태가 되면 육체 속에 깃들어 있던 영혼은 이제 더이상 머물지 못하고몸밖으로 나와 한동안 평생 깃들어 있던 육체의 주변을 맴돌다가 결국 저 세상으로 간다고 한다. 평생을 머물렀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영혼은 그 아쉬움이 얼마나 클까? 살아있는 보통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영혼을 감지하는 능력이 특별한사람들은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그육체가 있는 이승을 떠도는 영혼에게 이제 그만 세상 일을 잊고 고이 저세상으로 잘 가길 바라며 천도제를 지낸다. 그런데 백남기 할아버지는 쉽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불우한 시절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서양식 그림을 그리며 살았던 천재화가 이중섭. 하지만 천재화가로서의 대접은 커녕 늘 먹고살 양식이 없어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하여 불우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이중섭. 그는 자신의 뛰어난 그림에 대한 능력을 끊임없이 발휘하고자 부단히 애썼으나, 식민지 지배하에 태어나고 광복뒤에는 다시 한국전쟁으로 마음껏 그림을 그릴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재주가 그림 그리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그의 그림은 자신과 가족을 먹여살릴 돈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살수도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그림 그릴 종이조차 없어서 담배갑속에 들어있던 은박지를 얻어서 그린 은박지화는 오직 그만이 그렸던 화판이었고, 이제는 그의 그림을 대표하기도 한다. 그는 늘 함께하고 싶은 가족을 전쟁통에일본으로 보내고, 초청장을 기다리며 혼자 쓸쓸히 가족을 그리며 살다가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갔다. 하지만 그의 그림속에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등장하고, 늘 해맑은 미소는 있을지언정 슬픈 자신의 모습은 없었다. 평범한 보통사람의 삶을 그리도 그렸지만 그는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고 살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화도령 철종(조선 25대왕)의 예릉이다. 철종은 1831년 태어나 1863년 33세에 승하하였다. 그는 1844년 14세 되던 해그의 형인 회평군이 옥사함에 따라 온 가족이 강화로 유배되어 몰락한 왕가의 자손으로 평범한 농촌의 총각으로살았다. 그러다 1849년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 의 명으로 궁궐로 들어와 덕완군으로 책봉되었다가 제24대 헌종의 뒤를 이어 제25대왕이 되었다. 그를 궁궐로 불러들인 순원왕후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이끌던 안동김씨 가문에서 김조순의 큰딸로 태어나 순조의 왕비가 되었다가 헌종과 철종에 걸쳐 수렴청정을 하면서 안동김씨가의 규수를 왕비로 책봉하였고, 그 안동김씨의권력독식으로 조선의 온갖 부패가 만연하여 안동김씨에 줄을 서지 않으면 아무리뛰어난 선비요 학자라도 쓸모가 없었고, 안동김씨에 줄만 대면 지방의 관리부터 중앙의 요직까지 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그런 조선후기의국정을 문란게 하는데 큰 공헌(?)을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때 조선에는 김삿갓이 나타나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쉬운 시로 풀어내면서 관리들의 비리를 고발하였다. 안동김씨는 이씨 왕손중 훌륭한 사람을 택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여름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연꽃들도 이제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꽃의 열매인 저 연밥속에 들어있는 씨앗이 새 생명이 다시 새싹이 되어 돋아나는 내년 봄을 기약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것만이 세상의 진리임을 다시 한 번 느껴봅니다.
[우리문화신문=최 우 성 기자] 서기 600년대 백제 익산지역에 세워졌던 미륵사는 9층목탑과 더불어 9층석탑도 지어졌다. 석탑은 목탑에 비해 그 규모는 작았지만, 돌을 다듬어서 탑을 쌓는 것은 처음 있는 일로 그 작업은 난관이 아닐 수 없었다. 석탑은 가운데 세운 목탑의 좌우에 세우되 그 형태는 목탑의 형태를 흡사하게 하면서도 장식은 간략화 하였다. 그 재료는 돌(익산에서 나오는 황등 화강석)이었으나, 마치 목재로 집을 짓듯 땅을 다지고 기단을 만들어 기단위에 주초석을 앉혔다. 또 목조건물의 구석과 가운데는 3칸 집처럼 4개의 돌을 기둥처럼 세우고, 그 위에는 목조건축물처럼 처마에 장식성과 장엄성을 표현하는공포를 두었다. 각층 맨 위지붕은 기와집처럼 경사지고, 처마는 곡선을 잡아서 다듬고 이를 마치 장난감 레고블럭을 쌓아 올리듯 9층까지 이르게 하였다. 맨 위에는 철제로 만든 찰주와 아름다운 상륜부를 세워 완성하였다. 이곳에 쓰인 돌들을 발굴해보니, 돌 하나의 무게가 2톤이 넘는 돌들도 많았다. 그렇게 크고 무거운 돌들을 정교하게 다듬는 일도 참으로 난해한 일이지만, 그 무거운 돌들을 어떻게 10m이상높이 까지 올릴 수 있었는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0여년 전까지만 하여도 익산 미륵사지에는 텅 빈 미륵사지에 쓰러져 가는 모습으로 겨우 서있는 모습의 서쪽 석탑만이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가 탄압받다보니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방치된 모습으로 수 백년의 세월이 흐르고 보니 목탑과 금당을 비롯한 모든 목조건축물은 자취도없이 사리지고,비바람 불에도 강한 석탑마져도 기울기 시작하여, 동쪽에 있던 석탑은 탑을 모든 석재가주변에 널부러지고 수 백년동안 흙먼지가 불어와 덮여서 그 위에서 주변 사람들은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왔다. 그런 뒤 조선이 망한뒤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와서 보니, 미륵신앙의 성지였던 이곳은방치된 미륵사터에는 무너져 내리는 서쪽의 석탑만이너무도 안타까운모습으로 서있었다. 그런데 석탑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보물은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였을 것인데, 그 흩어진 모습을 보니, 탑에불사리를 모시는 곳은 석탑의 가장 높은 부분인상륜부 근처였기에 저 미륵사지서쪽에 쓰러져가는 석탑에는 사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무너져 내려누군가 가져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더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서 고정시켜놓은 모습이었다. 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괘불은 불교전각의 내부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각밖에서 큰 행사를 할 때 그 행사에 부처님이 와서 계시다는 것을 뜻하기 위하고, 더욱 행사가장엄하도록 하기위하여걸었던 불화이다. 이러한 괘불은 대웅전 앞에 괘불대를 세우고 걸었고, 행사는 대웅전 앞 마당에서 주로 했다. 그 행사는 주로 영산재 수륙재 등에 내걸었으며, 더러는 가뭄에 비를 내려달라는 기우제에도 걸었다. 괘불의 내용은 주로 영산회상도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축약시켜서 그렸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설법할 때 하늘의 천신들과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보살들이 모두 나왔다고 하며, 우주 공간에서 악귀의 출몰을 제지하는 사천왕들이 그려져 있다. 부처님은 중앙에 서있는 모습으로 그렸고, 좌우 상부에는 부처님의 10대 제자를 5명씩 나누어 그렸으며, 그 아래에는 불법을 수호한다는 8대보살(문수, 보현, 관세음, 대세지, 미륵, 지장, 허공장, 금강장)을 배치하고 있다. 또 보살과 별도로 천상의 신을 대표하는 범천과 제석천이 중단의 아랫부분에 좌우에 있다. 그리고 맨 아래 하단에는 공간세계를
감모여재도는 사당이 없는 경우에 사당의 모습을 그대로 그린 그림으로 이동식 사당의 역할을 하였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유교국가였던 조선은 임금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하여는 효를 가장 중시 하였다. 그런데 임금과 부모는 살아있을 때만이 아니라, 죽은 선대 왕과 선대 조부모에 대하여도 똑 같이 중요시 하였다. 이에 조선은 초기에 국조오례의를 제정하여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의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였고, 그중에 길례(吉禮)는 제사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제사는 하늘에 사(社), 땅에는 제(祭)를 사람에게 지내는 제사는 향(享)을 문선왕인 공자에게는 석전(釋奠)이라 하여 대상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 불렀다. 국가가 정한 의례에 따라 거행되는 제사에 쓰는 그릇은세종실록의 "국조오례의" "제기도설"에 의거하면 35종의 제기가 있었다. 여기에 정한 제기는 모두가 금속으로 만든 것이었다. 또 국조오례의 "제기도설"에 정한 각종 제기는 고대 중국의 예서에서 그 영향을 받아 정한 것이다. 이렇게 정한 금속제기는 태종 이후로 금속의 공급이 부족하게 되자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