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영조실록》 6권, 영조 1년(1725) 6월 21일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흥양(興陽)의 나로도(羅老島)를 다시 태복시(太僕寺)에 예속시키고 목관(牧官)을 설치하였다. 나도로의 목장(牧場)은 폐지된 지 오래 되었다가 기해년(975)에 특별히 제주도(濟州島)의 종마(種馬) 1백80여 필을 사들여 섬에 방목(放牧)하여 왔는데, 이때 이르러 태복시의 계청(啓請)으로 인하여 이 명령이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축을 언제부터 길렀는지는 모르지만, 삼한시대 이전이었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삼국시대에는 말이 국방상의 이유로 중요시되었는데 이러한 말 목장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실려 있을 정도입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대규모의 목마장을 설치하여 말의 개량에 힘쓰기도 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제주도, 강화도, 나로도, 서울의 뚝섬 등 여러 곳에, 나라에서 관할하는 목장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주로 말을 기르기 위한 시설이었지요. 또 말을 기르는 것과 함께 임금에게 바칠 우유, 우락(치즈), 낙죽(우유로 끓인 죽)을 위해 젖 짜는 소를 특별히 길렀는데 ‘사복시(司僕寺)’라는 기관이 담당했지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14년에 개봉한 <상의원>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왕실의 의복을 만들던 공간 ‘상의원’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움을 향한 대결이 조선의 운명을 뒤흔든다는 이야기였지요. 옷 잘 짓기로 소문난 이공진 역의 고수, 어침장 조돌석 역의 한석규, 왕비 역의 박신혜, 그리고 임금으로 나온 유연석의 치열한 연기 대결이 볼만했던 이원석 감독의 영화였지요. 상의원(尙衣院)이란 조선시대 임금과 왕비의 옷을 만들어 바치고 내부의 금은보화와 임금이 쓰는 지ㆍ필ㆍ연ㆍ묵(紙筆硯墨 : 종이, 붓, 벼루, 먹)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공조(工曹) 소속의 관아입니다. 상의원에서는 일상적인 관례에 따라 매달 초하루와 보름, 생일, 명절, 절기에 대전, 대왕대비전, 중궁전, 세자궁, 빈궁 등 각 전과 궁에 정해진 물품을 진상하고, 왕실 의례가 있을 때, 또는 임금의 명령이 있을 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였지요. 상의원은 일정한 수의 공장(工匠)을 소속시키고 관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는데 세종 때에 467명이었던 공장이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 최고의 법전)》에 68종 597명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소속된 공장에는 성장(筬匠, 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개성 부근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아름다운 ‘청자 주전자와 승반(承盤)’이 있습니다. 아마도 고려시대 귀족들이 이 주전자에 담긴 술을 서로 따라 주며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색은 맑고 푸르며, 표주박 모양 주전자와 발 모양 승반이 한 벌을 이룹니다. 주전자는 술, 물 등의 액체를 담아서 따르는 용도며, 승반은 주자를 받쳐 주자에 담긴 액체를 보온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주전자와 승반은 2017년에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식물이나 동물, 사람 등 사물의 형태를 본떠 만든 청자를 ‘상형청자(象形靑磁)’라고 하는데, 이 주전자도 표주박 모양을 닮아 있어서 상형청자의 하나로 봅니다.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동그란 형태로 만들어 그사이를 짧은 원통형으로 연결하였습니다. 주전자의 주둥이는 바깥쪽으로 뻗어 있으며, 뚜껑은 반원형이고, 위에 고리를 만들어 달았습니다. 손잡이는 꼬여 있는 넝쿨 줄기 모양으로, 표주박과 함께 있는 구불거리는 넝쿨을 연상케 합니다. 이 주전자는 얼핏 보면 흑백 상감 기법으로 만든 작품으로 보이지만 그와 달리 그릇 표면에 흑색과 백색의 흙물을 이용하여 무늬를 그렸습니다. 따라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22년 한 일간지는 “표구, 미술품 보존 기술 넘는 예술”이란 제목으로 《표구의 사회사》라는 책 서평을 실었습니다. 특히 기사에는 “표구(表具): 그림의 뒷면이나 테두리에 종이 또는 천을 발라서 꾸미는 일”이라는 내용이 있었지요.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으로부터 ‘표구(表具)’라는 말을 수입해서 쓰는 바람에 비록 한자말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때 쓰던 ‘장황(粧䌙)’이란 말은 그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심지어는 《조선왕조실록》 원본에 ‘장황(粧䌙)’이라 쓰인 것을 국역한답시고 ‘표구’라고 했으니,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한국어와 일본어 비교에 정통한 이윤옥 박사에 따르면 “자존심 하나로 먹고사는 100년 전통을 가진 교토 야마기타(山北光運堂) 표구점 누리집에 소개하는 표구역사(表具の歴史)를 보면 ‘표구는 먼 아스카시대의 불교 전래와 함께 건너온 두루마리용 경전에서 유래한다. 이어 불화(佛画)에도 표구가 쓰였다’라고 밝힙니다. 또 ”여기서 아스카시대란 서기 592년부터 710년까지 118년 동안을 말하며 552년에 백제 성명왕으로부터 불상, 경전 등이 전해졌는데, 이를 보면 표구 기술의 원조는 한반도라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재청은 지난 5월 27일 <순천 송광사 영산회상도 및 팔상도>를 국보로 지정했습니다. 200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이십여 년 만에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순천 송광사 영산회상도 및 팔상도」는 송광사 영산전에 봉안하기 위해 한꺼번에 그린 불화로, 영산회상도 1폭과 팔상도 8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팔상도는 석가모니의 생애에서 역사적인 사건을 8개의 주제로 표현한 불화로, 팔상은 불교문화권에서 공통으로 공유되는 개념이지만 이를 구성하는 각 주제와 도상, 표현 방식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요.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 초기에는 《월인석보(月印釋譜)》의 불교경전 내용이나 교리를 알기 쉽게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변상도를 빌린 팔상도를 그리다가 후기에 접어들면서 《석씨원류응화사적》에서 제시된 도상으로 새로운 형식의 팔상도가 유행하였는데, 후기 팔상도를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순천 송광사 팔상도입니다. 현재 송광사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인 「순천 송광사 영산회상도 및 팔상도」는 화기(그림의 제작과 관련하여 발원자, 작가 등의 내용을 담은 기록)를 통해 1725년(조선 영조 1)이라는 제작 연대와 의겸(義謙) 등 제작 화승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가무형유산엔 없지만, 시도무형유산에는 ‘필장(筆匠)’이 있는데 필장은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붓을 만드는 사람 또는 기술을 말합니다. 붓은 털의 품질이 가장 중요한데, 붓끝이 뾰족해야 하는 첨(尖), 가지런해야 하는 제(濟), 털 윗부분이 끈으로 잘 묶여서 둥근 원(圓), 오래 써도 힘이 있어 한 획을 긋고 난 뒤에 붓털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건(健)의 네 가지 덕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지요. 털의 재료로는 염소(백모)ㆍ여우ㆍ토끼ㆍ호랑이ㆍ사슴ㆍ이리ㆍ개ㆍ말ㆍ산돼지ㆍ족제비 등의 털을 쓰며, 특히 노루 앞가슴 털로 장식용 붓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장액붓’이라고 합니다. ‘제작과정은 우선 털을 고르게 한 뒤에 적당량을 잡아 말기를 한 다음 털끝을 가지런히 다듬는 ‘물끝보기’ 과정을 거친 뒤 대나무와 맞추고 마무리 작업을 하는 등 100여 번의 손이 가야만 하지요.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씨를 잘 쓰는 이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경지에 오른 사람은 도구나 재료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고 하지요. 선무당이 장구 나무란다는 말도 있고, 훌륭한 목수는 연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에는 ‘카멜리아힐’이 있습니다. ‘카멜리아힐’은 주로 동백꽃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최근엔 수국꽃으로도 유명합니다. 우리의 토종 동백꽃은 모두 붉은 홑꽃잎이며, 분홍동백과 흰동백은 아주 드물게 만날 수 있습니다. 겹꽃잎에 여러 가지 색깔을 갖는 동백도 흔히 볼 수 있지만, 이는 자연산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만든 고급 원예품종이 대부분입니다. 동백은 서남해안 지방은 물론 우리나라 섬 지방 어디서든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데 한국과 대만, 일본, 중국 등에 분포하는 동아시아 원산 꽃입니다. 문헌 가운데 고려 말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동백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백나무는 정부가 지정한 나라 밖 반출 승인 대상 생물자원으로 몇몇 자생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을 정도로 우리 토종 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동백(冬柏)으로 부르는 것을 학명이 ‘Camellia japonica L.’이라 하여 ‘카멜리아힐’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멋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카멜리아힐’에는 곳곳에 “동백 기념품은 여기”, “꽃 한 송이, 풀 하나가 모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5월 26일 서울남산국악당에서는 이애주한국전통춤회의 ‘법열곡(法悅曲)’ 공연이 열렸습니다. 특히 이날 본 승무는 그동안 많은 무대에서 보아온 모든 승무를 잊게 만든 거대한 춤이었지요. 승무가 느린 염불부터 빠른 당악까지 다양한 장단에 추는 춤과 북놀음까지 담고 있는 전통춤 중의 기본이자 법무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한성준에서 한영숙으로, 한영숙에서 이애주로, 이애주에서 그의 제자들로 이어진 전 과장 춤사위를 모두 담은 완판 승무였기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이날 승무는 삶의 온갖 몸짓이 함축적으로 표현된 춤일 뿐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그 사이 인간이 추는 춤은 삼재(하늘ㆍ땅ㆍ사람) 사상의 토대 위에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세를 연결하는 힘이 있어 춤 자체가 단순히 어떤 행위를 표현하기 위한 몸짓이 아니라, 우주 만물의 원리를 몸소 깨닫는 과정이기 때문이어서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의 승무에서는 짧은 시간 한 사람의 춤꾼이 한삼을 뿌리며, 북채를 들고 북을 두드리면서 무대를 사른다면 이번 무대는 7인의 춤꾼이 긴 시간 진리를 깨달아 마음속에 기쁨을 느끼며 법열을 뿜어내고 있었지요. 흔히 보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며칠 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말 "세종대왕 동상이 앞에 있는데 그 뒤편에 보이는 한자로 쓰인 현판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한 말에 누리꾼 가운데는 “수도 서울 한복판 광화문 현판 한글로 바꿉시다.“라고 댓글을 단 사람이 있는가 하면 ”힘들게 복원한 거 그냥 둬라, 한자로 쓰여있다 해서 한국 역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라고 부정적인 댓글을 쓴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반대 댓글을 단 누리꾼들을 보면 유 장관의 뜻을 제대로 헤아려 볼 생각 없이 무조건 반대만 한 것도 있어 보여서 안타까웠습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지금 달려있는 광화문 한자 현판은 세종 때의 원형도 아니고 고종 때 훈련대장 임태영이 세종 때 ’원형‘을 모른 채 썼는데 그것도 훈련대장이 직접 썼던 것이 아닌 복제품이어서 그 현판을 붙이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문화재로의 복원이 아닌 것입니다. 광화문은 한문에 능통했던 세종임금이 자기 기득권을 버리고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했던 경복궁의 정문인데 한자로 복제품을 만들어 붙이는 것은 문제입니다. 한글은 작은 중화를 벗어난 자주 문화를 상징합니다. 많은 세계인이 광화문을 배경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과 복지정책은 오늘날보다 훨씬 선진적이었는데 장애가 있어도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벼슬을 할 수가 있었지요. 예를 들면 조선이 세워진 뒤 예법과 음악을 정비하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허조(許稠, 1369~1439)는 어려서부터 몸집이 작고 어깨와 등이 구부러진 꼽추였습니다. 하지만 허조는 태종이 선위할 때 '이 사람은 내 주춧돌이다.'라며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결국 세종은 그를 좌의정에 올렸지요. 허조는 자기관리가 매우 철저했음은 물론 뇌물, 축재, 여색 등 부정부패와는 정말 완전히 담을 쌓은 벼슬아치였습니다. 자타공인 청백리인 맹사성조차 흑역사가 있었을 정도였지만, 허조는 정말 탈탈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오던 인물이었다. 이런 철저한 청백리 기질 때문에 조말생이 거액의 뇌물로 치부한 사건이 드러났을 때 세종이 파직하는 걸로 사건을 덮으려 들자 가장 강력하게 맞서서 조말생의 처형하라고 했을 정도였지요. 그 밖에 간질 장애인이었던 권균(權鈞, 1464~1526)은 이조판서와 우의정에 오르고 영창부원군에까지 봉해졌으며, 사팔뜨기였던 번암 채제공(蔡濟恭)은 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