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 십여 년 전 도쿄국립박물관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오구라컬렉션(小倉 Collection)이 기증한 우리나라 문화유산들이 버젓이 전시되고 있었지요. 오구라는 1922년부터 1952년까지 조선에서 무려 1,100여 점의 문화유산을 약탈해 갔는데 이 가운데 39점은 일본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의 수준 높은 문화유산들입니다. 이 문화유산들은 오구라 사후인 1982년 그의 아들이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했는데 그 가운데는 견갑형 청동기, 금관 따위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름이 비슷한 ’오쿠라 컬렉션‘은 명치시대의 실업가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가 만든 것으로 초대총독 테라우치와 가까이 지내 부를 축적하면서 조선의 문화유산을 다량으로 약탈, 수집하여 일본 처음으로 ’오쿠라 슈코칸(大倉集古館)‘이란 개인 미술관을 만들었지요. ’오쿠라 컬렉션‘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터석탑 따위가 있습니다. 일본은 12세기부터 1868년 메이지유신 때까지 일본 정치를 지배했던 ’사무라이‘ 탓에 문화가 꽃 피울 수 없었기에 문화 콤플렉스를 가졌고, 문화유산이 돈이 된다는 생각으로 우리 문화유산을 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가유산청의 국가무형유산 가운데는 <나전장(螺鈿匠)>이 있습니다. 나전장은 옻칠한 기물 위에 무늬가 아름다운 전복이나 조개껍질을 갈고 무늬를 오려서 옻칠로 붙이는 기술이나 그 장인을 말하는데 ‘나전칠기장’ 또는 ‘나전칠장’이라고도 부르지요. 고려시대 이래 중앙 관서에 소속되어 왕실과 조정에 필요한 나전칠기를 만들었습니다. 조선 후기부터는 나전칠기가 대중화하면서 관서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 장인도 생겼습니다. 나전칠기를 만드는 과정은, 나무로 기본 틀인 백골(옻칠을 하지 않은 목기)을 짜고 그 표면을 사포로 문지르거나 틈새를 메워 고르게 한 다음 자개를 붙입니다. 그 뒤 연마, 옻칠, 그리고 광내기 과정을 거쳐 완성하지요. 자개로 무늬를 만드는 방법에는 자개를 실처럼 잘게 자른 '상사'로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드는 끊음질 기법과, 자개를 문질러 얇게 만들어 국화, 대나무, 거북이 등 각종 도안 무늬를 만드는 줄음질 기법이 있습니다. 나전 무늬는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는 모란ㆍ국화ㆍ연꽃 등의 식물무늬가, 조선 중기에는 화조(꽃과 새)ㆍ쌍학ㆍ포도ㆍ사군자 등의 무늬가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나전칠기를 만드는 데 가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소학(小學)》은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인데도 일반 서민과 글 모르는 부녀들은 스스로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바라옵건대 여러 책 가운데에서 일상생활에 가장 절실한 것, 이를테면 《소학》이라든가 《열녀전(列女傳)》ㆍ《여계(女誡, 여자의 생활과 처신 등에 관한 내용이 담긴 책)》과 같은 것을 한글로 뒤쳐(번역) 인쇄, 반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위로는 궁액(宮掖, 궁에 딸린 하인)으로부터 조정의 재상집에 미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사람 없이 다 배우게 해서, 온 나라의 집들이 모두 바르게 되게 하소서.“ 위는 《중종실록》 28권, 중종 12년(1517) 6월 27일 기록입니다. 어린아이들 또는 유교 입문자에게 초보적인 유교 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수신서(修身書,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양하는 책)인 ‘소학’ 등을 한글로 뒤쳐 조정의 재상은 물론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공부하여 모르는 사람 없도록 하자는 홍문관(궁중의 경서-經書와 문서 따위를 관리하고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하던 관아)의 뜻에 중종은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조선은 대부분 공식 문자 생활이 한문으로 이루어졌기에 언문(한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민가(民家)에 장정(壯丁, 나이가 젊고 혈기가 왕성한 남자)이 많지 않아 대개 어린아이와 부녀자로 야경을 돌게 하니, 어떻게 도둑을 막는 데 보탬이 되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하면 벌을 주거나 벌 대신 재물을 바치는 것이 뒤따르니, 연곡지하(輦轂之下, 임금이 타는 수레 밑이라는 뜻으로, 곧 서울)의 백성들이 밤에 편안히 자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혁파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이는 《성종실록》 241권, 성종 21년(1490) 6월 24일 기록으로 승정원이 임금에게 올린 말입니다. 임금이 야경을 돌게 하는 법은 본래 도둑과 화재(火災)를 막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으로서, 입법(立法)한 이후 이를 고통스럽게 여겨 원망하여 탄식하는 자가 많다고 하니, 혁파(革罷)하는 것이 좋을지 그 여부를 함께 의논하도록 하라고 한 뒤 승정원이 올린 뜻대로 혁파하였습니다. 좌경하는 법은 독신녀도 면할 수 없어서 간혹 사람을 사서 하기도 하고 간혹 여인이 스스로 하기도 했기에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고종실록 27권, 고종 27년(1890) 8월 30일 기록인 대왕대비의 행장(行狀, 사람이 죽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보 <세한도(歲寒圖)> 등 대를 이어 모은 여러 문화유산을 기증한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 선생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선생의 아들인 손성규 연세대 교수는 "지난 11일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가족장으로 모셨다"라고 17일 밝혔습니다. 선생은 마지막 순간에 소식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고, 가족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논의를 거쳐 조용히 장례를 치렀습니다. 개성 출신 실업가인 부친 손세기(1903∼1983) 선생과 함께 대(代)를 이어 모은 이른바 '손세기ㆍ손창근 수집품'은 그림, 책 등 다양한 종류의 문화유산이 포함돼 큰 관심을 끌었지요. 특히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이며, 그 값어치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는 국보 <세한도>를 나라에 기증한 것은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로 선생을 초대해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할 정도였습니다.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18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현재 집필 중인 책에 지난 11일 세상을 뜬 손창근 선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며 2020년 12월 9일 선생이 청와대를 찾았던 일을 소개했지요. 탁 전 비서관은 "청와대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영조실록》 6권, 영조 1년(1725) 6월 21일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흥양(興陽)의 나로도(羅老島)를 다시 태복시(太僕寺)에 예속시키고 목관(牧官)을 설치하였다. 나도로의 목장(牧場)은 폐지된 지 오래 되었다가 기해년(975)에 특별히 제주도(濟州島)의 종마(種馬) 1백80여 필을 사들여 섬에 방목(放牧)하여 왔는데, 이때 이르러 태복시의 계청(啓請)으로 인하여 이 명령이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축을 언제부터 길렀는지는 모르지만, 삼한시대 이전이었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삼국시대에는 말이 국방상의 이유로 중요시되었는데 이러한 말 목장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실려 있을 정도입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대규모의 목마장을 설치하여 말의 개량에 힘쓰기도 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제주도, 강화도, 나로도, 서울의 뚝섬 등 여러 곳에, 나라에서 관할하는 목장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주로 말을 기르기 위한 시설이었지요. 또 말을 기르는 것과 함께 임금에게 바칠 우유, 우락(치즈), 낙죽(우유로 끓인 죽)을 위해 젖 짜는 소를 특별히 길렀는데 ‘사복시(司僕寺)’라는 기관이 담당했지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14년에 개봉한 <상의원>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왕실의 의복을 만들던 공간 ‘상의원’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움을 향한 대결이 조선의 운명을 뒤흔든다는 이야기였지요. 옷 잘 짓기로 소문난 이공진 역의 고수, 어침장 조돌석 역의 한석규, 왕비 역의 박신혜, 그리고 임금으로 나온 유연석의 치열한 연기 대결이 볼만했던 이원석 감독의 영화였지요. 상의원(尙衣院)이란 조선시대 임금과 왕비의 옷을 만들어 바치고 내부의 금은보화와 임금이 쓰는 지ㆍ필ㆍ연ㆍ묵(紙筆硯墨 : 종이, 붓, 벼루, 먹)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공조(工曹) 소속의 관아입니다. 상의원에서는 일상적인 관례에 따라 매달 초하루와 보름, 생일, 명절, 절기에 대전, 대왕대비전, 중궁전, 세자궁, 빈궁 등 각 전과 궁에 정해진 물품을 진상하고, 왕실 의례가 있을 때, 또는 임금의 명령이 있을 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였지요. 상의원은 일정한 수의 공장(工匠)을 소속시키고 관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는데 세종 때에 467명이었던 공장이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 최고의 법전)》에 68종 597명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소속된 공장에는 성장(筬匠, 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개성 부근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아름다운 ‘청자 주전자와 승반(承盤)’이 있습니다. 아마도 고려시대 귀족들이 이 주전자에 담긴 술을 서로 따라 주며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색은 맑고 푸르며, 표주박 모양 주전자와 발 모양 승반이 한 벌을 이룹니다. 주전자는 술, 물 등의 액체를 담아서 따르는 용도며, 승반은 주자를 받쳐 주자에 담긴 액체를 보온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주전자와 승반은 2017년에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식물이나 동물, 사람 등 사물의 형태를 본떠 만든 청자를 ‘상형청자(象形靑磁)’라고 하는데, 이 주전자도 표주박 모양을 닮아 있어서 상형청자의 하나로 봅니다.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동그란 형태로 만들어 그사이를 짧은 원통형으로 연결하였습니다. 주전자의 주둥이는 바깥쪽으로 뻗어 있으며, 뚜껑은 반원형이고, 위에 고리를 만들어 달았습니다. 손잡이는 꼬여 있는 넝쿨 줄기 모양으로, 표주박과 함께 있는 구불거리는 넝쿨을 연상케 합니다. 이 주전자는 얼핏 보면 흑백 상감 기법으로 만든 작품으로 보이지만 그와 달리 그릇 표면에 흑색과 백색의 흙물을 이용하여 무늬를 그렸습니다. 따라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22년 한 일간지는 “표구, 미술품 보존 기술 넘는 예술”이란 제목으로 《표구의 사회사》라는 책 서평을 실었습니다. 특히 기사에는 “표구(表具): 그림의 뒷면이나 테두리에 종이 또는 천을 발라서 꾸미는 일”이라는 내용이 있었지요.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으로부터 ‘표구(表具)’라는 말을 수입해서 쓰는 바람에 비록 한자말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때 쓰던 ‘장황(粧䌙)’이란 말은 그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심지어는 《조선왕조실록》 원본에 ‘장황(粧䌙)’이라 쓰인 것을 국역한답시고 ‘표구’라고 했으니,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한국어와 일본어 비교에 정통한 이윤옥 박사에 따르면 “자존심 하나로 먹고사는 100년 전통을 가진 교토 야마기타(山北光運堂) 표구점 누리집에 소개하는 표구역사(表具の歴史)를 보면 ‘표구는 먼 아스카시대의 불교 전래와 함께 건너온 두루마리용 경전에서 유래한다. 이어 불화(佛画)에도 표구가 쓰였다’라고 밝힙니다. 또 ”여기서 아스카시대란 서기 592년부터 710년까지 118년 동안을 말하며 552년에 백제 성명왕으로부터 불상, 경전 등이 전해졌는데, 이를 보면 표구 기술의 원조는 한반도라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재청은 지난 5월 27일 <순천 송광사 영산회상도 및 팔상도>를 국보로 지정했습니다. 200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이십여 년 만에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순천 송광사 영산회상도 및 팔상도」는 송광사 영산전에 봉안하기 위해 한꺼번에 그린 불화로, 영산회상도 1폭과 팔상도 8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팔상도는 석가모니의 생애에서 역사적인 사건을 8개의 주제로 표현한 불화로, 팔상은 불교문화권에서 공통으로 공유되는 개념이지만 이를 구성하는 각 주제와 도상, 표현 방식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요.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 초기에는 《월인석보(月印釋譜)》의 불교경전 내용이나 교리를 알기 쉽게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변상도를 빌린 팔상도를 그리다가 후기에 접어들면서 《석씨원류응화사적》에서 제시된 도상으로 새로운 형식의 팔상도가 유행하였는데, 후기 팔상도를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순천 송광사 팔상도입니다. 현재 송광사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인 「순천 송광사 영산회상도 및 팔상도」는 화기(그림의 제작과 관련하여 발원자, 작가 등의 내용을 담은 기록)를 통해 1725년(조선 영조 1)이라는 제작 연대와 의겸(義謙) 등 제작 화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