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드디어 수능시험일이 왔다. 시험을 치고 온 아들에게 물어 보니 결과는 나와 봐야 알겠다고 명확하게 몇 점이라는 이야기를 안 한다. 수능점수가 채점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이제는 아들의 점수가 늘어날 리도 줄어들 리도 없게 되었다. 나오는 점수에 맞춰 학교를 고르면 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김 교수는 “이제 새벽기도도 끝났구나”라고 좋아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D데이는 수능시험일이 아니고 대학입시일이라는 아내의 선언에 김 교수는 할 말을 잊었다. 아들을 위해서라는데 들어내 놓고 항의할 수도 없고. 그저 고3 학부형이 된 것이 죄라면 죄라고 말할 수밖에! 김 교수는 수능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새벽기도회에 따라갔다. 날씨는 추워지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면 차 유리창에 성에가 서려 있어서 김 교수는 4시 반보다 더 일찍 일어나야 했다. 더 일찍 일어나서 차 시동을 걸고 성에를 제거하여야 5시 기도회에 늦지 않기 때문이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바람이 부는 날은 두꺼운 옷을 입어야 춥지 않았다. 그 와중에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아내의 잠자리 거부가 해제된 것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해제 이유가 한 권의 책 때문이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그런데 백일기도가 끝나기 전에 그만 사고가 나고 말았다. 어느 날 아내는 매우 기분이 씁쓸하다며 남편에게 하소연하였다. 교회에서는 입시가 점점 가까워 오자 고3 학부형을 모아서 특별히 함께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아내가 그 모임에 가보니 상대방의 자녀를 위해서도 기도하는 시간이 있단다. 그런데 기도는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면서 댁의 자녀는 어느 학교를 목표로 하는가를 묻더라는 것이다. 아들의 현재 점수로는 ㅅ대는 꿈꿀 수가 없다. 김 교수가 보기에는 ㅇ대나 ㄱ대도 바라보기가 어렵겠다. 아내 말에 따르면 다른 엄마들의 목표대학을 들어보니 대부분이 ㅅ대라는 것이다. 그 순간 아내는 ‘창피하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뒤 아내는 고3 학부형의 특별기도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김 교수가 들어보니 그 일은 목사님이 잘못한 것 같다. 고3 학부형들이 얼마나 신경이 예민한 상태에 있는가를 고3 자녀가 아직 없는 목사님이 잘 모르고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파편이 김 교수에게 튀었다. 아내는 더욱 새벽 기도에 매달리고, 웬일인지 그 사건 이후에는 잠자리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대답인즉 우리가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세 번째 만남 박 교수의 예상을 깨고 미스 최가 《아리랑》 제1권을 읽었기 때문에 약속대로 박 교수가 점심을 사게 되었다. “아니, 김 교수의 실력이 그 정도인 걸 몰랐는데.” “뭐 말입니까?” “아가씨 홀리는 재주 말이요. 어떻게 꼬셨으면 미스 최가 《아리랑》을 다 읽어요?” “미스 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문예반에 들어갔다네요. 방통대의 국문과에 1년 다니다가 중퇴했다나 봐요.” “그래도 그렇지요. 아마 미스 최가 김 교수에게 마음이 있는가 봐요. 김 교수, 조심해야겠어요.” “예, 조심해야지요. 그러나 자신이 없네요.” “그럼 뜨겁게 연애를 한번 해봐요. 우리 나이에는 젊은 아가씨하고 연애하면 젊어진다고 합디다. 소녀경(素女經)에도 있지 않소. 젊은 여자와 관계하면 젊은 기를 빨아들여 젊어진다고.” “대학교수가 돈은 없고. 우리는 한 달에 한 번만 만나기로 했어요. 매달 《아리랑》 한 권을 읽은 뒤에 연락하기로 했지요. 아리랑이 모두 12권이니까 최소 일 년은 만날 수 있겠네요. 아리랑이 끝나면 《태백산맥》으로 넘어가야지요.” “《태백산맥》은 몇 권짜리요?” “열 권이지요.” “꿈도 야무지시네.” “인생이란 꿈을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그렇다면 교수라는 직업은 어떠한가? 우선 ‘사’자가 붙지 않았으니 돈 잘 벌고 인기 있는 직종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경제학의 이론을 빌면 수요 공급에 따라 값이 형성된다. 교수 자리는 매우 제한되어 있는데, 최근에 교수를 지망하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아졌다. 당연히 학교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봉급을 많이 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교수봉급은 예전에 견줘 나빠졌다. 최근에는 계약제다 연봉제다 해서 교수 사회에도 경쟁이 도입되고 경쟁에 따른 불안이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람들은 흔히 대학교수들은 정년이 65살이어서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이다. 일반 직장은 대학을 졸업한 뒤에 바로 들어갈 수 있지만, 대학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석사 2년과 박사과정 최소 3년을 더 투자하여야 한다. 남들보다 5년 동안 돈과 시간을 더 투입하고서 교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정년 퇴직은 다른 직장보다 늦지만, 대신 진입 시기가 늦으므로 근무한 연수로 계산해 보면 결국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자기가 얼마 전에 제주도 학회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학회 행사를 마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김 교수는 차를 집이 있는 대치동으로 몰았다. 차를 아파트 내 주차장에 주차해 놓고 거리로 나와 택시를 탔다. 김 교수가 다시 보스에 도착하니 8시 30분이었다. 김 교수는 ‘어서 옵쇼!’라고 깍듯이 인사하는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박 교수 일행이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들도 식사를 마치고 방금 도착했다고 한다. 그날은 ㅇ 교수가 박 교수에게 연구과제와 관련하여 신세 진 일이 있어서 한 잔 산다고 했다. 과일과 양주를 주문하고 아가씨를 불렀다. 조금 후에 나타난 미스 최는 김 교수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그럴 법도 하지. 삼십 분 전에 헤어진 사람을 룸에서 다시 만나니 놀랄 수밖에. 호텔에서 만났을 때 미스 최는 까만 옷을 입었었는데, 어느새 노란색 옷으로 갈아입고 서 있었다. “웬일이세요, 오빠!” “너 보고 싶어서 박 교수님 따라왔다. 왜, 싫으니? 싫으면 다른 사람 옆에 앉거라.” “싫기는요, 저는 오빠 옆에 앉을래요.” 약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눈치채지 못한 박 교수가 미스 최를 바라보며 추궁하듯이 물었다. “미스 최. 자네, 아리랑이라고 아나?” “그럼요. 조정래 씨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이것저것 물어보니 아가씨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석촌 호수 근처의 연립주택에서 남동생과 함께 세 들어 사는데, 차는 세피아를 탄단다. 어머니는 2년 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새엄마와 신림동에 사신단다. 피자를 먹은 후 커피를 주문하여 마셨다. 즐거운 시간은 빠르다고, 시계를 보니 7시 반이 되었다. 창밖은 벌써 어두워졌다. 이층에서 내려다보니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씽씽 달린다. 보도에도 사람들이 바삐 걸어간다. 바쁜 사람들 틈에서 두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는 남녀가 왠지 다정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퇴근하는데, 이 아가씨는 출근해야 하는구나. 사람이 원래 낮에 일하고 밤에 자야 하는데, 이 아가씨는 그 반대로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김교수가 물었다. “몇 시까지 출근하나?” “8시까지 가면 돼요.” “그래 그러면 지금 나가야겠구나. 내가 태워다 주지.” 김 교수는 카운터에서 계산을 끝내고 주차증에 도장을 받았다. 계산서 액수가 만 원 이상이면 두 시간까지 주차가 무료라고 한다. 한 시간에 최소 오천 원은 쓰라는 이야기이다. 커피숍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이러다가 누구를 만나면 꼼짝없이 ‘호텔에서 나오는 두 남녀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아내와의 냉전은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아가씨와 전화한 이후 김 교수는 왠지 즐거워졌다.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되었다. 기다리던 금요일 오후가 되니 김 교수는 아가씨를 만날 생각에 사로잡혀 가벼운 흥분 상태가 되었다. 호텔에서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이후 처음인 것이다. 젊은 아가씨였던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이란 지금부터 20년 전 까마득한 과거 일이다. 그때 청년이었던 김 교수는 가슴이 뛰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제는 아내가 된 아가씨와 함께 다방에 가고 음악 감상실에 가고 고궁에도 갔었다. 아아, 인생은 무상하구나. 무심한 세월은 흐르고 또 흘러갔다. 그렇게도 곱던 아가씨의 모습은 간 곳이 없다. 아내의 눈가에는 이제 주름살이 생겼다. 내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아가씨는 중년의 아줌마로 변하였다.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던 아가씨는 20년이 지나자, 변하였다. 이제는 고3 아들의 수능시험 성적 1점이 직장 생활에 시달리는 남편보다 더욱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는 아줌마가 되었다. 냉전 중인 아내는 오늘 자기가 집에 늦게 들어가더라도 아무 말도 안 할 것이 뻔하다. 언제부터인지 남편은 아내의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옛말에 “홧김에 서방질한다”라는 말이 있다. 김 교수는 싸움이 오래 계속되고 남편으로서의 욕구가 채워지지 못하니 “홧김에 바람피운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심정이 되었다. (이 글을 읽는 전국의 아내들이 귀담아들을 속담이다.) 나뭇잎이 뚝뚝 떨어지는 어느 날 오후, 김 교수는 문득 미스 최에게 전화를 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가을 햇살은 따사로이 비치고 있었다. 햇살 속에는 약간의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바람이 한번 불 때마다 연구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오동나무에서 커다란 잎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김 교수는 자기의 인생도 언젠가 끝이 나고, 저 오동나무 잎처럼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상념에 사로잡혔다. 옛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인가 보다. 그날 김 교수의 행동은 분명 평소와는 다른 행동이었다. 왜 그랬을까?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 날은 매우 아름답고도 쓸쓸한 가을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김 교수는 미스 최에게서 받은 전화번호를 들여다보며 10초 정도 망설였다. 그러다가 김 교수는 크게 용기를 내어 전화번호를 눌렀다. 마침 미스 최가 받았다. “여보세요, 김00 교수입니다.” “아, 오빠세요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박 교수와 점심 내기를 하고 나서 며칠 뒤에 김 교수의 가정에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 교수는 고3 아들이 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늦둥이 아들이 하나 있다. 김 교수의 자녀 교육 방침은 자유방임에 가까웠다. 공부란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부모가 시킨다고, 과외 선생을 붙여준다고, 안 하는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3 아들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10등 이내의 상위권에 들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학급 석차가 10~20 등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정도의 실력이었다. 담임선생님 말로는 이러한 성적권의 학생들을 진학 지도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조금만 잘하면 이른바 서울대학(요즘에는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이면 다 서울대학이라고 부른다)에 보낼 수 있겠는데 그게 뜻대로 안 된다. 어느 가정이나 사정은 비슷하리라. 교육과 관련한, 남편은 대개 방임형이고 아내는 극성형이다. 대학까지 나온 어머니들은 자기 자녀가 대학에 못 가면 자기가 창피를 당하는 줄로 안다. 자기가 모자라서 자녀가 공부를 못하고 대학에 못 가는 줄로 잘못 아는 것이다. 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한 어머니들은 자기 자녀는 꼭 대학에 보내야만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지구는 쉬지 않고 태양 주위를 돌면서 가을이 깊어 갔다. 봄이 여자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는 말이 있다. 봄이 되면 여자들은 생기가 나고 멋도 부리고 싶고 노출되는 옷으로 치장을 하고 싶어진다. 여자들은 봄에 괜히 들뜬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속된 말로 하면 여자는 봄에 물이 오른다. 여자가 바람나기 쉬운 계절이다. 남자들은 가을이 되면 괜히 울적해지고 감상에 젖는다. 낙엽 떨어지는 돌담길을 걷고 싶어진다. 어디로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인생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상념에 사로잡힌다.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보고서 어떤 남자는 우울증에 빠진다. 어떤 남자는 시를 쓰기도 한다.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날,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떤 남자는 종교에 귀의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변한다”라는 깨달음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어려운 말로 표현한다. 여기서 행이라는 말의 의미는 광범위하다. 보이는 사물, 느끼는 감정, 관념적인 개념 등등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행이라고 말한다. 제행무상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는 뜻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