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도저히 그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흑룡강성 평방 지역의 731부대는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전율이 느껴진다. 일본이 패전 뒤에 이 부대를 폭파하고 떠나기 전에는 교도소를 능가하는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을 뿐 아니라 이곳의 모든 정보가 새나가지 않도록 이곳은 철저히 외부 세계와 차단된 하나의 거대한 왕국이었다. 731부대에 들어선 139개의 건물에는 각종 세균실험을 할 수 있는 시설물들과 함께 이곳에 근무하는 일본군의관의 숙소와 군인가족 사택, 학교, 세탁소, 예배당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부대 안에 비행장까지 갖추고 중국내 세균전을 위한 생체실험이 이뤄진 곳이다. 현재 중국정부는 731부대를 복원하여 이곳에서 자행한 일본군의 만행을 그대로 재현해놓고 있다. 이곳에서는 모든 실험대상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이뤄진 것으로 팔에 세균을 주입하는 밀랍인형을 비롯하여 잡아온 여성의 배를 가르는 모습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천인공로할 일이 벌어졌음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 중국 하얼빈 731부대유적지 전시관의 이시이시로 모형(왼쪽), 악명높은 생체실험의 대부 이시이시로의 731부대 시절 모습 그 가운데서 눈에 띄는 곳은 731부대에서 빼놓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때는 서기 758년, 일본 조정의 관리 오노노타모리(小野田守)는 발해대사로 임명되어 발해땅을 밟는다. 사신의 임무를 다 마친 뒤에는 발해사신 양승경(揚承慶)과 함께 귀국하는데 이 이야기는 일본의 정사인 《속일본기(續日本紀)》 천평보자(天平寶字) 2년 9월 18일자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 758년이면 일본은 나라시대(奈良時代)의 중반기이며, 발해(渤海)는 698년에 건국하여 60년이 지날 무렵이다. 일본과 발해사신의 왕래는 발해가 일본을 34차례 방문하였고, 일본 역시 발해를 13차례 방문 할 만큼 교류가 컸다. 비행기로 다니는 지금도 중국 흑룡강성에 있는 발해 동경성을 가려면 쉽지 않은 데 당시 해상으로 왕래를 해야 했던 것을 감안하면 발해와 일본의 교류는 매우 밀접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중국 흑룡강성 발해 유적지 예전에《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 일본과 발해의 교류 이야기를 읽으면서 1천여 년 전의 역사가 바로 어제의 일처럼 느껴졌던 적이 있는데 지난 9월 말 흑룡강성에 있는 발해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나는 또 다시 발해의 건재를 실감했다. 가도 가도 끝없는 황금들판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발해 동경성터는 그 넓이가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19세기 많은 조선 난민들이 연변지역에 이주해 와 도문강 연안에 정착하였다. 1905년 일로전쟁(러일전쟁)후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되었다. 1907년 8월 일본은 소위 조선사람의 생명 안전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용정촌에 기어들어 불법적으로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세우고 중조변계분쟁을 일으켰다. (가운데 줄임) 그뒤 1909년 11월 2일 간도일본총영사관을 세워 산하 5개 영사분관을 두고 방대한 경찰 기구를 설립하여 간도를 포함한 동북지방의 침략 발판으로 삼았다. 전시실은 진실한 물증과 역사자료를 이용하여 간도일본총영사관의 내막을 폭로하고 있다. (필자가 문구를 읽기 쉽게 수정) ▲ 악명 높은 용정 시내의 간도총영사관 건물, 지금은 용정시인민정부 청사로 씀 이는 길림성 용정 육도하로(六道河路 869)에 있는 옛 간도일본총령사관 터에 있는 간도일본총영사관 죄증 전시관 앞에 있는 안내문이다. 1909년에 세운 건물 치고는 제법 튼튼해 보였는데 옛 간도일본총사령관 터에 여러 채의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 중앙 건물은 룡정시인민정부 청사로 쓰고 있으며 청사 건물 뒤에는 일본의 잔학성을 전시하고 있는 중국식 표현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지난 9월 27일 분화 이후 계속해서 희뿌연 화산구름과 화산재를 내뿜는 일본 나가노현의 온타케산(御岳山, 御嶽山) 분화 사건으로 지금 일본열도는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지 못하고 있다. 연일 방송과 신문에서 머리기사로 보도되고 있는 온타케산의 비극은 이 산을 오른 등산객들이 맞이한 참혹한 죽음일 것이다. 10월 7일 현재 희생자가 54명으로 밝혀진 상태에서 행방불명자들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고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이번에 분화한 온타케산은 표고 3,067미터로 나가노현에서 향토후지(鄕土富士)라고 불릴 만큼 지역민들에게 사랑 받는 산이었다. 향토후지란 지방에 있는 산으로 후지산에 견줄 만큼 높고 큰 산을 말한다. 이제 바야흐로 단풍철인지라 산을 찾는 이들이 점점 늘어가는 이때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맞닥트린 산정상의 분화에 등산객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 중 등산을 떠난 집에서는 노심초사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소리가 들린다. ▲ 일본 나가노현의 온타케산(御岳山, 御嶽山) 분화를 알리를 방송 ▲ 분화 전의 온타케산(御岳山, 御嶽山) 섬나라이면서도 산악국가라고 할 만큼 높고 험한 산이 많은 일본은 온타케산을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일본의 절에는 한국처럼 대웅전(본당)이 있고 웬만한 곳이면 목조탑이 있게 마련이다. 한국처럼 돌탑은 드물고 대부분 나무로 탑을 만드는데 나라(奈良) 흥복사 5층탑 같은 것은 아름다운 탑으로 손꼽히고 있다.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백제 성왕 때는 아스카 지방이 불교가 성했고 이어 나라, 교토 순이다 보니 당시로서 천리길이나 되는 동경은 그다지 불교가 성하지 못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북쪽 지방인 아키다(秋田) 같은 곳은 더더욱 불교 전래가 뒤처졌다. 이러한 아키다현에 손꼽히는 3중목탑이 있어 이채를 띤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목탑이 들어선 곳이 절이 아니고 신사(神社)다. 아키다현(秋田縣)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이 삼중탑은 히요시하치만진자(日吉八幡神社) 안에 세워져 있는데 이 이름 또한 특이하다. ▲ 아키다현 히요시하치만신사(日吉八幡神社)에 있는 삼중탑 일본에는 히요시신사(日吉神社)와 하치만신사(八幡神社)가 원래 각각의 독립된 신사다 그런데 유독 이곳만은 이 두 신사가 하나가 돼 있으며, 게다가 신사에 삼중탑이 들어 선 것도 특이한 일이다. 이곳 신사에 불교를 상징하는 삼중탑이 들어 선 것은 1707년인데 지금으로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일본말에 시니세(老鋪)라는 말이 있다. 노포라고 한자로 쓰는 이 말은 말 그대로 오래된 점포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뜻만을 지닌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국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일본국어사전 풀이를 보면 선조 대대로 가업을 지키며 이어 가는 것 이라고 되어 있으니 전통을 이어가는 가게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 시니세의 하나인 오뎅집으로 유명한 다까키야(高木屋) 이러한 시니세는 578년 창업한 회사로 기네스북에 오른 일본 유수의 건축회사인 금강조(金剛組)를 비롯하여 된장류를 만드는 670년 된 마루야핫쵸된장식품(まるや八丁味), 가마쿠라 말기인 1333년에 창업한 전통과자점 구로다센넨도(田千年堂)가 있다. 전통과자나 빵집으로 치자면 시니세(老鋪)가 가장 많은 분야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1000년 가까운 전통 가게가 일본 전국적으로 즐비하다. 또한 국수를 만드는 미와소멘야마모토 (三輪そうめん山本)도 1717년에 창업을 했으니 올해로 297년째이고, 술 만드는 가게 역시 겐비슈조(菱酒造,1505년 창업)처럼 500년 이상 된 가게가 수두룩하다. 또 시니세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차를 생산하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일본 사이타마현에는 움직이는 지장보살 신앙(마와리지조우, まわり地藏)이 남아 있는데 이는 지장보살상을 보관함(子)에 담아 집집으로 옮겨 모시는 신앙이다. 올해로 261년째인 이 풍습은 사이타마현 하뉴시 혼가와마타(埼玉 羽生市)에서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관동지방을 흐르는 큰 강인 도네강(利根川)이 흐르는 지역이다 보니 잦은 홍수 피해가 있던 곳이다. 치수시설이 여의치 않던 시절 홍수가 나면 강 인근 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러다 보니 자연재해를 막아주길 바라는 민간신앙이 성행 할 수밖에 없었다. ▲ 이동용 지장보살상(왼쪽), 마을 주민이 지장보살상을 지고 다른 집으로 모셔가는 모습 오지조사마(지장보살님)라 부르는 이 불상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보관함에 담아 집에서 집으로 옮겨 모시고 있는데 이를 처음 만든 것은 천초종원사(淺草宗円寺)의 한 스님이 이 지역에 오고나서부터다. 쇼아쇼닌 (松阿上人)이라 불리는 이 스님은 이 마을에 와서 마을사람들이 늘 불안하게 사는 것을 보고 300여 집을 찾아다니며 시주금을 모아 지장보살상을 만들게 된다. 노송나무로 불상을 만든 스님은 불상을 담을 함을 만들어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1978년 10월 필자는 다이토쿠지로부터 특별히 1시간동안 어떤 그림이든 마음대로 사진을 찍어도 좋다는 특별 허락을 받았다. 나는 그때 고려왕이 등장하는 양유관세음도를 골라 찍었다. 그 사진이 1978년 코리아저널 표지에 실린 것이다. 그림이 너무 높이 걸려 있어 바닥에서 찍을 수 없어 삐꺼덕 거리는 사다리를 여섯 번이나 오르락 거리며 촬영한 것이다. 위는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 1910-96)이 지은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녀는 미국출신의 동양미술사학자로 일본 교토의 다이토쿠지(大德寺)에서 오랫동안 불교미술을 공부하여 15세기 일본의 선화가 셋슈 연구로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일본문화의 원류가 한국문화라는 확신을 갖고 1978년부터 86년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을 비롯한 한국문화와 관련한 수많은 논문과 저서를 집필했다. 일본에 보존되어 있는 한국미술에 관한 한 필자가 다른 누구보다도 이 분야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한국의 문화재가 일본에 많이 가 있지만 그것은 일본작품 내지는 대부분 중국 것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침 9시 반 차를 몰아 마이즈루를 향했다. 해마다 아내랑 둘이서 추도식이 열리기 이삼 일 전에 가서 추도비 주변을 깨끗이 치우고 향을 사른 뒤 가져간 꽃과 과일 그리고 곡주를 올리면서 희생된 조선인들을 기렸으나 올해는 아내가 일이 있어 혼자 다녀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도비 주변의 무궁화는 탐스런 꽃을 피웠고 원한의 바다는 잠잠했다. 요즘 건강이 안 좋아 장거리 운전이 몹시 피곤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몇 번이나 쉬면서 왔다. 하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우키시마호 폭침의 비극을 알리는 추도비에는 꼭 다녀 올 생각이다. 요에(余江勝彦) 회장을 비롯하여 많은 지역민들이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를 지켜주는 고마움이 이곳에 올 때마다 든다.” 이는 교토에서 우리 토박이말로 시를 쓰는 재일동포 시인 김리박 선생이 우키시마호 폭침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에 다녀와서 쓴 글의 일부다. 일본표기로는 “우키시마호침몰순난자비(浮島丸沈殉難者の碑)”라고 부르는 이 추도비의 유래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없는 가슴 아픈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 1978년 8월 24일 세운 우키시마호 폭침 희생자 추모비 일제강점기 일본의 탄광에서, 군수공장에서 힘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미신의 폐해는 이처럼 매우 심각하지만 그 뿌리는 더더욱 널리 뻗어만 가고 있으니 오늘날 위생상의 관점에서 보면 완연한 하나의 적국(敵國)의 모습이기 때문에 결코 두고 볼 수 없다. 이에 마땅히 예의 주시하고 힘을 다하여 이러한 관행을 과감히 고치고 미신을 각성시켜 경계하지 않으면 감히 어찌 위생을 거론할 수 있겠는가 이는 1915년 6월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위생과에서 펴낸 《조선위생풍습록, 朝鮮衛生風習錄》의 머리말 끝부분이다. 이 책은 격언편, 속언편, 민간치료편, 미신요법편, 관행편으로 나뉜다. 그런데 조선인의 생활을 예의 주시하겠다라는 말도 우습지만 이 책의 머리말처럼 조선인의 위생이 장말 심각했을까 의문이다. 책 내용을 보면 오줌으로 눈을 씻으면 눈병이 낫는다., 이가 아플 때 아이의 오줌으로 양치하면 통증이 그친다., 부스럼에 똥을 바르면 낫는다. 같은 위생상 문제가 있는 것도 보이지만, 실제 그런 풍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의적으로 왜곡했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위생풍습록(朝鮮衛生風習錄)》네 나오는 눈병 부적 그림 또 이 책을 보면 그렇게 위생이 나빠 조선인에게 문제가 있다고 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