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인선 기자 ] “조선은 독립의 때가 곧 온다고 힘을 모으자 동포에게 외치던 몸 왜놈에 잡혀 모진 고문으로 옥중 순국하던 날 산천초목도 울고 하늘도 울었어라“ 여성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를 펴낸 이윤옥 시인은 이렇게 김용창 지사를 노래했다. 어제(6월 11일)경기도 화성 향남면 김용창 지사 선영에서는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광복회 화성시지회(지회장 안소헌) 주관으로 독립운동가 김용창 지사의 추모제가 열렸다. 전통제례로 치러진 추모제는 초헌관에 김용창 지사의 동생 김용무 선생이, 아헌관에 채인석 화성시장이, 종헌관에는 안소헌 광복회지회장이 맡았다. 열아홉 청년 김용창(金容昶, 1926.8.3.~1945.4.3.) 지사는 경기도 향남면 출신으로 열다섯에 상경하여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환을 거쳐 체신국 경성보험관리소 직원으로 근무하는 한편, 야간에는 덕수공립상업학교(德壽公立商業學校)에서 미래를 꿈꾸며 학업에 정진했다. 그러다 1944년 보험관리소 판자벽에 연필로 "반도 2천 6백만 동포여. 자 일어서라! 조선 독립의 때가 왔다. 지금 와서 지원병이니 징병이니 하고 있다. 아아! 가련하도다."라고 써 붙이는 등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대위 [1878~1928] 선생은 평남 강서(江西) 사람으로 평남 평양에서 출생하여 기독교 학교인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한 후,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03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장경(張景) 등과 함께 미주 한인단체의 효시인 친목회(親睦會)를 결성하고 동포간 연락과 친목을 위주로 활동하면서 한인사회의 생활개선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05년 4월 동지(同地)에서 안창호등과 함께 미주 최초의 민족운동기관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과 동족상애(同族相愛)를 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06년 4월에는 상항(桑港)한인감리교회를 창립하여 한인 동포들의 구호사업과 교육계몽운동, 직업 알선 등의 활동을 수행해 나갔다. 1908년 6월 오레곤주 포트랜드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동년 12월 상항한인감리교회에서 미국내 한국어 출판의 효시인 『대도보』라는 주보를 발행하여 매부 본국과 세계의 정세를 전달하는 한편, 기독교의 복음 전도 및 교포 교양에 공헌하였다. 또한 같은 해 10월부터 최정익(崔正益) 등과 함께 하와이와 미주 본토에 있는 한인단체를 통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신건식 선생은 1889년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하여 덕남사숙에서 공부하다 상경하여 무관학교와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11년 형 신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한 후 항저우에 있는 의약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1912년 신채호, 신규식 등이 국권회복을 위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 활동에 참여하고 1925년 저장성 육군형무소 군의관 및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 외과주임으로 근무하며 난징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와 학생 등의 숙식 경비를 지원하였다. 1937년부터 난징에서 광복진선선전부에 소속되어 선전활동에 주력하였고, 1939년 제31회 의정원회의에서 충청도의원으로 당선되며 임시정부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1942년 임시정부에서 조직한 한국광복군의 지휘권을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간섭하자 의정원 동료의원과 합심하여 이를 되찾아 왔다. 1943년 재무부 차장으로 선임되었고, 의정원 분과위원으로 재정, 예산, 결산을 담당하며, 재정분야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오건해 선생은 1926년 경 남편 신건식 선생이 있는 중국으로 이주하여 이동녕, 박찬익 등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1938년에는 '남목청사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혁 [1875∼1939] 선생은 경기도 용인(龍仁) 사람으로 대한제국 육군정위(正尉)로 근무하던 중,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비분하여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919년 3·1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일경의 눈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0년에 산업의 진흥과 아울러 무력투쟁을 계획하여 백두산 아래 화룡현(和龍縣)에 자리잡은 대종교 총본사(大倧敎總本司)와 백두산 동북쪽인 왕청현(汪淸縣)에 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무장항일 투쟁을 하던 흥업단(興業團)의 부단장으로서 활동하였다. 한편 1920년 봄에는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徐一)과 경리담당인 계화(桂和)가 계속 병력증강에 힘써 백초구(百草溝) 기타 각지에서 약 300여명의 장정을 모집하고 또 이성규(李成奎)를 국내로 보내어, 대한제국시대의 육군 장교로 활약하던 김규식(金奎植)·홍충희(洪忠熹)·김찬수(金燦洙)·박형식(朴亨植) 등을 동반하여 올 때 그도 유우석(柳佑錫)과 함께 무송현(撫松縣)으로부터 와서 북로군정서에 참가하여 대일 항쟁에 전념하였다. 또한 1922년 8월 30일에 환인현 남구 마권자(桓仁縣南區馬圈子)에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백년편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글 형식의 글입니다.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 접수를 받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문의 : 02 -733-5027】 이월봉 지사님! 꽃보라 흩날리는 4월입니다. 이르는 곳마다 봄처녀들은 삼삼오오 흐드러진 봄꽃 곁에서 사진을 찍거나 연인들과의 데이트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여념이 없는 계절입니다만 청춘의 한 시절을 이역 땅에서 여자 광복군으로 보내야했던 지사님의 봄은 어떠셨는지요? 지사님께서 한국광복군 제2지대 여군반장 시절 군복 입은 모습의 흑백사진을 바라보고 있자니 부끄러운 질문을 드린 듯해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고 중국 땅에서 광복군에 지원 입대하여 뛴 세월을 굳이 계절로 말하라면 눈보라치는 겨울이 아닐는지요. 그것도 아주 혹독한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에 해당되겠지요. “당시 광복군에 속한 여군들은 여자라고해서 특수한 임무가 주어지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남자와 똑같은 일을 했지요. 토치카를 파면 같이 파고, 벽돌을 나르고, 모든 힘겨운 일을 남자와 똑같이 그대로 해냈지요” 이월봉 지사님께서는 1976년 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봄비가 추적거리고 내리는 어제 (14일, 토) 오후 2시, 기자는 서울중앙보훈병원에 입원 중인 생존 여성독립운동가이신 오희옥 애국지사(92살)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재활병동 3층에 입원 중인 오희옥 지사의 아드님은 기자의 방문에 맞춰 어머님(오희옥 지사)을 휠체어에 모시고 병실 옆 작은 휴게실에서 기다렸다. 지난달 3월 17일 갑작스럽게 쓰러지셔서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회복하여 병실로 옮기신지 2주째로 일반인의 면회를 받을 정도로 많이 회복되어 기자는 오희옥 지사님의 손을 꼭 잡고 인사를 나누었다. 아직 코에 연결된 호스로 미음을 식사대신 들고 계셔서 영양 상태가 안좋아서인지전 보다 여의셨지만 의식만큼은 많이 회복되어 기뻤다. 그러나 완전한 회복을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듯한 상태로 의료진들과 가족들의 정성스런 간호가 이어지고 있었다. 현재, 치료비는 국가유공자이기에 100% 국가가 부담하고 있지만, 24시간 전문 간병인을 써야 하는 입장에서 간병비 자부담이 다소 부담스럽다고 했다. 다음은 오희옥 지사의 아드님께서 기자에게 보내온 그간의 ‘병실일지’이다. 원문 그대로를 싣는다. "어머님(오희옥 지사)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19년 오늘(4월 11일)은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태어난 날입니다. 1919년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나라안팎 애국지사들 사이에선 독립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상해임시정부와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노령임시정부(露領臨時政府)는 수립 과정과 주체가 명확히 알려진 대표적인 임시정부들이었지요. 그 가운데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였으며, 이후 한성임시정부와 노령임시정부를 통합하여 명실상부하게 우리 겨레의 임시정부로 발돋움했습니다. 이날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李東寧), 국무총리 이승만(李承晩),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 외무총장 김규식(金奎植), 법무총장 이시영(李始榮),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 군무총장 이동휘(李東輝),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 등이 임명되었지요. 현재 한국 정부는 4월 13일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로 기념하고 있으나, 광복회에서는 4월 13일은 상하이임시정부 수립을 알리는 공문을 뿌린 날이고, 실제 결성일은 4월 11일이라며 임정 수립일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윤현진(尹顯振, 1892. 9.16.~1921. 9.17.) 선생을 2018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선생은 1892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만성재(晩惺齋)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5세가 되던 1907년 구포의 구명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09년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을 탐방한 뒤 깊이 있는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선생은 22세가 되던 1914년 메이지(明治)대학을 입학한 이후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목적으로 결성된 신아동맹당 당원으로서 반일운동에 앞장섰다. 1916년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약 3년 동안 대동청년단, 백산무역주식회사, 의춘상행(宜春商行), 기미육영회 등과 관계를 맺고서 비밀결사운동, 경제적 자립운동, 교육운동을 주도하였다. 3ㆍ1독립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1일 상하이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위원과 경상도위원, 국내 항일세력과 연락을 위한 의용단 조직, 독립신문 발기인 등을 맡으면서 임시정부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다. 1921년 2월 임시정부의 중책인 재무차장에 취임하
[우리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터졌구나 터졌구나 / 독립성이 터졌구나 15년을 참고참다 / 이제서야 터졌구나 피도 대한 뼈도 대한 / 살아 대한 죽어 대한 잊지마라 잊지마라 (2절 줄임) –탄운 이정근 의사 지음 ‘3.1독립가’ - 경기 화성 발안 3·1 독립만세 항쟁의 선구자인 탄운 이정근(灘雲, 李正根 1863-1919) 의사(義士) 순국 99주기 추모제가 어제(31일) 낮 11시, 향남읍 소재 탄운 선생 창의탑 (향남읍 삼천병마로 283-6번지)에서 열렸다. 사단법인 탄운 이정근의사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어제 추모제에는 광복회 경기도지회 안소헌 지회장을 비롯한 지역유지, 탄운장학금 수여자와 학부모 등 150여명이 모여 탄운 선생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겼다. 이날 추모제는 탄운 선생에게 올리는 추모제례로 초헌례(유족대표 이호원), 아헌례(광복회지회장 안소헌), 종헌례(탄운이정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 김겸)의 예를 갖춘 제례를 중심으로 이어졌으며 이어 헌화, 분향의 시간을 가졌다. 한편,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날을 기해 1천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다 현장에서 일헌병에 총검에 의해 순국의 길을 걸은 탄운 이정근 의사의 거사는 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지난 3월 17일(토), 급성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여성독립운동가 오희옥 지사(92살)는 발병 후 곧바로 수원 성빈센트병원으로 모셨다가 지난 22일(금)부터 서울중앙보훈병원 (강동구 진황도로 61길 53) 외과 중환자실로 옮겨 치료중이다 서울중앙보훈병원 외과 중환자실에서 8일째 입원 중인 여성독립운동가 오희옥 지사께서조금씩 회복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아드님인 김흥태(55살) 씨가 기자에게 알려왔다. 어제(30일, 낮 2시) 현재 오희옥 지사의 상태를 김흥태 씨가 전해온 소식 그대로 싣는다. “어머님은 MRI촬영차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빨리 쾌차하시길 기원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드리니 고개를 끄덕 거리셨습니다. 식사를 환자식으로 하니 기력이 지속적으로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지만 의식은 지속적으로 많이 돌아오고 계심을 느꼈습니다. 종이와 펜을 드리니 어머니 성함, 3월 30일, 이윤옥 교수님 등의 이름을 쓰셨고 힘이 부친 듯 금새 눈을 감으셨습니다. 의식은 있지만 몸은 많이 여의셨고, 가래로 약간 고생 중이시지만 전보다 좋아지신 것 같고, 목을살짝 움직이는 정도도 가능하십니다. 어머님은 많은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