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3대 통감이자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寺內正毅,1852-1919)는 동양 3국의 고문헌 18,000여 점을 끌어모아 고향인 야마구치에 가져갔다. 그가 죽자 아들 수일(壽一)이 그 장서를 모아 1922년 고향인 야마구치시에 데라우치문고를 설립하게 된다. 부자로 이어지는 문화재 약탈의 전승이다. 데라우치가 조선관련 문화재를 끌어모으기 시작한 것은 조선총독 취임 때부터이다. 그의 곁에는 책 전문가인 고도소헤이(工藤壯平,1880-1957)가 항상 곁에 있었는데 데라우치는 그를 조선총독부 내대신비서관(內大臣秘書官) 등의 자리를 주어 고서묵적(古書墨蹟)을 조사한다는 핑계로 규장각 등의 고문헌을 마음대로 주무르게 했다. 군인 출신의 무식한 데라우치를 도와 고도소헤이는 값나가는 유구한 고서들을 데라우치 손에 넘겨주었다. 지금 야마구치현립대학 도서관에 있는 데라우치문고 (1957년에 데라우치문고는 야마구치현립여자단기대학에 기증했다가 현재는 야마구치현립대학 부속도서관 소속으로 바뀌었다)는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양심 있는 일본시민들이 만든 동경의 고려박물관에서 펴낸
이외수 선생의 ‘닭도리탕=토박이말’에 한 표 [진단] 닭도리탕 어원도 모르는 한심한 국립국어원과 조선일보 이윤옥 최근 소설가 이외수 선생이 트위터에 “닭도리탕은 일본식 이름이 아니다.”라는 글을 올려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해 국립국어원도 트위터를 통해 “닭도리탕의 도리는 일본어 'とり(새)에서 온 것으로 보고, 이를 닭볶음탕으로 다듬었다. 도리의 어원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분명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고 밝혀 일부 언론에서는 이외수 선생이 망신당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일본말찌꺼기를 연구해온 필자는 이를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다음에 두 가지 쟁점으로 살펴 나눠본다. 쟁점(1) 이외수 선생이 주장하는 ‘도리=토박이말’에 대하여... 작가 이외수 선생은 일본말 도리(tori,とり)를 새(또는 닭 ‘니와도리지만 도리라고도 함')로 보지 않고 우리 토박이말로 보는 근거로 닭을 ‘도려내어(토막 쳐) 만든 요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말이 틀렸다기보다 이 말의 근거를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알다시피 닭도리탕을 만들려면 닭을 토막 내야 함은 상식이다. 통째로 인삼을 넣고 고아 먹는다면 삼계탕으로 간단히
조선일보는 구로다 망언 부추기지 말라 [논단] ‘오뎅’을 어묵으로 부르는 것이 어찌 ‘언어 내셔날리즘’인가 이윤옥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구로다 가츠히로(黑田勝弘, 71) 씨의 조선닷컴 글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어 붓을 들었다. 조선닷컴(인터넷판 조선일보)에 소개된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는 “한국의 애국자들은 오뎅이라는 일본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오뎅을 어묵꼬치로 바꿔 부르고, 일부 포장마차에서도 메뉴판에 그렇게 쓰고 있다.”며 상대가 일본이 되면 한국은 언어 내셔널리즘으로 고생한다고 했다. 이어 “와사비는 고추냉이로, 낫토는 생청국장이라고 바꿔 말해야 한다며 일본어를 거부하는데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요즘은 그렇게 까다로운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 먹을거리에까지 일본을 트집 잡는 사람은 이제 옛날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이 담긴 글을 인용하여 “조선닷컴 토론장 2012-02-17”에는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이러한 구로다 씨의 말은 일본어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생각해볼 가치도 없는 말이라고 제쳐 놓겠지만 그가 주장하는 ‘언어 내셔널리즘’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구로다 씨의 한국인 추종자들을 위해 두 가지만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 (1) 올해로 기미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93돌이다. 그 뜨거운 함성으로부터 약 100년 가까운 세월에 이르고 있지만 한일관계는 매끄럽지 못하고 찜찜하기만 하다. 오만한 식민역사의 반성은커녕 일본이 한국땅 독도에 품은 검은 야욕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래 가지고야 어찌 사이좋은 ‘이웃’임을 말할 수 있으랴! 지지난 주에 이어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를 통해 일제강점기 조선문화재 약탈이야기를 모두 4회에 걸쳐 실어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오만의 역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 (3) -고려불화의 90%는 일본에 있다- “한국인들이 가장 간절하게 반환을 원하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천리대학(天理大學)에 있다. 또한, 13~14세기 고려불화는 90%가 일본에 있다.” 위 이야기는 양심 있는 시민들이 만든 동경의 고려박물관에서 펴낸 유실된 조선 문화 유산 -식민지 하에서의 문화재 약탈, 유출, 반환·공개 책 20쪽에 나와 있는 말이다. 이 책에는 구체적으로 약탈된 조선의 문화재 행방을 소개하고 있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문화재는 고
일본열도를 뒤덮는 “히나인형”의 의미 슬슬 한 쌍의 인형이 일본열도를 뒤덮을 시간이다. 그 한 쌍의 이름을 히나인형(ひな人形)이라 부른다. 히나인형은 남자와 여자 형상을 한 부부금실이 좋은 원앙처럼 꼭 쌍으로 만드는데 그 재료는 실로 다양하다. 도자기의 고장인 아리타(有田)나 이마리(伊万里)같은 곳에서는 도자기로 만들기도 하고 젊은 사람들은 현대식으로 응용해서 창작 히나인형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비단옷을 겹겹이 입혀 헤이안시대의 화려한 왕실을 나타내기도 한다. 규모도 왕과 왕비를 나타내는 달랑 한 쌍의 인형을 만드는가 하면 층층시하 상궁과 하녀, 악사와 잘 차린 음식까지 표현한 히나인형도 있다. 인형을 즐기는 층도 다양해서 개인이 사다가 집에다 모셔 놓기도 하지만 호텔로비나 기념관 등에 대규모 히나인형을 전시하는 곳도 있다. 아예 웬만한 도시에서는 히나인형을 전시하는 기간을 한 달씩 잡고 전국 구경꾼들의 발걸음을 끄는데 이름하여 히나마츠리(雛祭り)다. 이날을 위해 수백 년 가업으로 히나인형을 만들고 만든 인형을 전시하여 마을을 관광도시로 만든다. 히나인형을 새겨 넣은 과자며 액세서리 소품을 만들고 앞다투어 히나인형을 활용한 이벤트를 여는 등 일본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 (2) - 오구라가 약탈해간 조선 유물들 - 오구라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가 게걸스럽게 긁어모은 한국의 값나가는 유물들은 그의 사후 보존회에 의해 보존되다가 1982년 동경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유물은 일본의 중요문화재 8점, 중요미술품 31점을 포함한 1,110점이다. 세목을 살펴보면 조각 49점, 금속공예 128점, 도자기 130점, 칠공예(漆工藝) 44점, 서적 26점, 회화 69점, 염색작품 25점, 토속품 2점, 고고시대 유물 557점이다. 시대별로는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시대, 고려, 조선에 이르는 전 시대를 망라하고 있다. 특히 고고유물(考古遺物)은 낙랑시대와 삼국시대의 고분출토품인 기와류와 통일신라시대의 귀중한 금속공예와 토기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고분출토품’이라는 말인데 고분이란 주로 왕릉이나 고대 통치자의 무덤을 말한다. 국보급 문화재를 싹쓸이해간 것도 용납할 수 없거늘 신성한 왕릉을 파헤쳐서 문화재를 약탈해갔으니 그 패륜적 행위를 어찌 말로 다하랴! 《잃어버린 조선문화유산, 동경 고려박물관 발행》18쪽에 보면 “오구라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 (1) 동경 우에노공원(上野恩賜公園) 안에 있는 동경국립박물관은 일본 최고(最古)이자 최대 박물관이다. 본관, 동양관, 법륭사보물관 등 5개의 전시관과 자료관을 갖춘 곳으로 소장품 수만도 11만 건을 넘으며 국보 87건, 중요문화재 622건(2009. 3. 31 현재)을 보유하고 있다. 이곳에 한반도에서 약탈한 오구라콜렉션이 자리하는데 총 1,111점이 전시되고 있다. 오구라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는 1903년에 조선에 건너와 대구에서 전기사업권과 금융업으로 일약 부자가 된 이래 조선의 문화재 수집에 열을 올렸다. 그는 도굴품도 개의치 않고 사들인 사람인데 그의 광적인 유물 수집은 도굴꾼과 꿍짝이 맞아 소중한 가야 시대 고분이 마구잡이로 파헤쳐지는 불행을 만들었다. 오구라는 하나 둘 손에 거머쥔 문화재가 값나가는 것이라는 평을 듣자 그 야심을 조선 전역에 뻗치게 되는데 정당하게 문화재를 입수하지 못할 때는 협박과 공갈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금속문화재 수집가로 알려진 김동현 씨는 오구라의 공갈과 협박을 무릅쓰면서 우리의 문화재를 고집스럽게 지켰는데 그가 지킨 문화재는 지금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챠우쉔화(朝鮮花)는 조선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중국땅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무덤에 핀 노오란 들국화를 현지인들이 애처로워 부른이름입니다. 지난해 1권에 이어 이번에 2권을 펴냈습니다.다시 삼월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였던 만주벌의 챠우쉔화,사할린의 챠우쉔화,후쿠오카 치쿠호 탄광의 챠우쉔화, 아우내장터의 챠우쉔화를 이 계절에 생각하는 것도의의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삼일절을 앞두고 이윤옥사룀 =============================================================== 여성독립운동가가 없었다면 광복도 없었다 [서평] 이윤옥 시인의 ≪서간도에 들꽃 피다≫2권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김영조 “권총으로 삶을 마감한 아들 주검을 확인하는 어미의 가슴 속에 구멍 하나 뻥 뚫렸다 휑하니 불어오던 그 겨울의 모진 바람 한 자락 뚫린 가슴을 휘젓는다” 위는 최근 펴낸 이윤옥 민족시인의 “시로 읽는 여성독립운동가 20인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 2권(도서출판 얼레빗)에 나오는 “종로경찰서에 폭탄 던진 김상옥 어머니 ‘김점순’” 시 일부다. 아들의 주검 앞에서는 살아있는 어미도 이미 주검이다. 앞서 간
슬슬 한국은 각 급 학교의 졸업철이다. 졸업식장에 울려 퍼지는 애국가 제창은 학창시절의 마지막 추억이 될지 몰라서인지 식장의 애국가 제창은 여느 때보다 우렁차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의 졸업식장 풍경이다. 이웃나라 일본은 졸업식장에서 기미가요(국가,國歌)를 부르느니 못 부르느니 문제로 졸업과 입학 때만 되면 시끄럽다. 더불어 히노마루(국기, 國旗)에 대해서도 경례를 못하겠다고 버티는 교사와 학생들이 속출하고 있다. 대관절 무슨 곡절인가! 2008년 오사카 시립중학교 졸업식장에서 일어난 국기, 국가 제창 거부 사건은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당시 졸업생 160명 중 159명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으니 교장 선생의 붉으락푸르락하던 모습은 애써 떠올리지 않아도 상상이 갈 것이다. 이날 졸업식 후에 교장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당장 3학년 담임 5명과 부담임 3명이 시교육위원회에 ‘문제교사’로 고발되었다. 오사카 시립중학교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교사와 학생들의 집단 ‘국기(國旗)·국가(國歌) 거부’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데 특히 1999년 (평성 11년)
일본에 신사나 절 입구에 가면 커다란 선간판에 액운이 든 날을 표시해 놓은 “액막이 안내판”이 빠짐없이 놓여 있다. 일본말로는 “야쿠도시, 厄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일본 위키피디어에서는 “일본에서는 액재(厄災)가 자주 드는 나이가 있다. 이 풍습은 이미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부터 유래한다. 이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사람들은 예부터 뿌리 깊게 믿고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 액이 든 나이는 지방이나 절, 신사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아래 사진(교토 청수사 안의 지주신사)에 보면 남성은 24살을 앞뒤로 1년을 주의해야 하고 여성은 18살을 전후해서 큰 고비를 넘겨야 한다. 또 남성은 41살과 60살을 인생의 큰 고비로 보고 있으며 여성은 32살과 36살을 주의하도록 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하여 미신이라든가 하는 말도 있지만 일본의과대학의 병리학자인 가네코(金子仁)씨는 ≪액년의 과학(厄年の科學)≫에서 19살과 25살은 청춘기에 해당하고 또 33살과 42살은 청춘기를 지나 중고년기의 과도기인지라 인생의 굽잇길에서 남성은 사회적으로 책임이 무거워지는 때로 정신적, 육체적인 피로가 많고 여성은 자녀양육 시기로 매우 분주하고 힘든 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