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하와이 이윤옥 기자] 전수산 지사를 그리며 - 다이아몬드헤드 공원묘지에서 먼 이국땅서 잠든 그대 극락조화 한 다발 안고 찾아간 날 무덤 뒤 다이아몬드헤드산은 빛났고 와이키키 바다 바람은 뺨을 간지럽혔다오 어린 딸 옥희를 안고 하와이땅 밟은 그대 억척스레 독립자금 모아 상해임시정부의 기틀을 잡고 헐벗은 조국의 애국지사 후손을 도운 고운 마음 고이 감추고 이제는 지친 몸 마음 모두 내려놓고 다이아몬드헤드 공원묘지에서 조국의 무궁함을 비는 그대여! 독립의 역사 지워지지 않는 한 그대의 애국혼 영원하리라! - 이윤옥 - 전수산(1898~1969)애국지사가 잠든 호놀루루의 다이아몬드헤드 공원 묘지(DIAMOND HEAD MEMORIAL PARK)를 찾은 시각은 18일아침 10시(현지시각)였지만 이미 태양은 한여름처럼 뜨거운 열기를 뿜고 있었다. 봉분이라든가 묘지석이 없는 미국의 공원묘지는 그야말로 하나의 공원(PARK)처럼 평온한 곳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푸른 잔디밭 같지만 자세히 가보면 바닥에 묻힌 사람의 작은 묘지석이 박혀있다. 전수산 지사의 무덤을 찾아가기 위해 하와이에 도착한 날(13일, 현지시각) 외손자인
[우리문화신문=하와이 이윤옥 기자] 와이키키 해변의 고운 백사장에는 4월 16일(현지시각)인데도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 탓인지 비키니 차림의 해수욕객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기자는 와이키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하와이 최초의 이민선이 갤릭(Gaelic)호가 닿았던 선착장에 들렸다가 와이키키 쪽으로 걸어 보았다. 와이키키해변 주변 공원에서 고기를 구워먹다가 싫증이 나면 바닷물로 풍덩 뛰어들어 더위를 식히는 하와이 사람들을 바라다보면서 114년전 이민선을 타고 낯선 땅에 내려 고생길로 접어들 사탕수수 밭으로 향했을 선조들을 떠올렸다.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갤릭호에는 101명의 한인이 타고 있었는데 일본의 제지로 이민이 중단된 1905년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을 위해 건너왔다. 첫 이민선이 뜬지 2년 뒤인 1905년 4월, 여성독립운동가 황마리아 (1865~ 1937)지사도 고국 평양을 떠나 아들과 딸을 데리고 도릭선편으로 하와이 노동이민의 첫발을 내딛었다. 당시 큰딸은 19살(강혜원)이었으며 17살이었던 아들 강영승의 노동이민에 가족이 동반하는 식으로 이민 길에 나선 것이었다. 무려 한 달여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장녕(1881~1932) 선생은 충남 천안 출신으로 대한제국의 육군 부위(副尉)로 복무하던 중 군대가 해산되자 일가족을 거느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이세영(李世永)·양성환(梁聖煥)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경학사(耕學社)의 정신을 준수하여 낮에는 개간과 농업에 종사하는 한편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9년에는 서 일(徐一)·현천묵(玄天默)·김좌진(金佐鎭)·계 화(桂和)·조성환(曺成煥)·박성태(朴性泰)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참모장 및 참모관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북로군정서에서 세운 단기속성 사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이범석(李範奭)·김홍국(金洪國)·최상운(崔尙雲) 등과 함께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0년 말에는 청산리독립전쟁 이후 밀산(密山)에서 3,500여명의 대병력을 거느린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 조직되자 참모장으로서 총재 서 일, 부총재 홍범도(洪範圖), 조성환 등과 함께 대일 무력항쟁을 계속하였다. 1922년 6월에 재만군사기관이 통합하여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참모로서 윤세용(尹世茸)·손병헌(孫炳憲)·오석영(吳錫永)·독고 욱(獨孤旭) 등과 함께 참모부장인 이천민(李天民)을 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이상정지사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지은 시인 이상화의 형으로 경상북도 대구 출신이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일하면서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육영사업을 하며 독립운동에 가담, 활동하였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는 동만주(東滿洲)에서 중국 풍옥상(馮玉祥)의 서북국민부대(西北國民部隊)에서 준장급 참모(准將級參謀)로 활약하였으며, 장개석의 부대와 통합됨에 따라 국민정부(國民政府) 정규군 소장(少將)으로 항일전선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무렵에는 남창(南昌) 항공협진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36년에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자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중국 육군 참모학교의 교관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1939년 4월에는 민족전선통일을 기하기 위한 청년호성사(靑年呼聲社)를 조직하고 이건우(李健宇)와 함께 잡지 청년호성(靑年呼聲)을 창간하였다. 또한 1940년 9월에 광복군(光復軍) 창설을 적극 지원하였다. 1941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에 다시 선출되었으며, 194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교육자이며, 역사학자였던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고 했다. 또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라고 했으며, 일제강점기 선승 만공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다. 스님으로 시인으로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에 우뚝 섰던 만해 한용운의 흔적은 인제 만해마을과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 등이 있지만 뜻밖에 남한산성에서도 만났다. 바로 남한산성만해기념관이 그곳인데 만해사상연구가인 신구대 전보삼 교수가 자료수집한 것들을 바탕으로 세웠다. 건국공로최고훈장인 '대한민국장'과 만해 생전의 각종 저술과 유물, 3·1운동 당시 만해의 옥중투쟁을 보여주는 신문자료, 희귀본인 「님의 침묵」 초간본 및 100여 종의 「님의 침묵」이본과 만해관련 연구서 등 6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는 뜻을 세우다”, “불교인으로의 지향”, “3ㆍ1운동의 선봉에 서서”, “침묵의 미학”, “설중매화”, “심우장의 정절”, “만해가 떠난 그 후” 따위로 나누어 그의 삶을 정리했다. 주욱 이 순서대로 사진과 설명글을 더듬다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가운데 어제(31일) 오후 2시, 동대문구 신내동에 살고 계시는 생존 독립운동가 유순희 애국지사를 찾아뵈었다. 올해 92살의 유순희 애국지사는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지만 흔쾌히 기자의 방문을 허락해 주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유순희 애국지사를 찾아뵈려고 했던 것은 5년 전부터 지만 그때마다 몸이 안좋으시다고 집에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허락지 않으셔서 줄곧 찾아뵙지 못하다가 어제 간신히 뵙게 된 것이라 기자는 더욱 기뻤다. 어제 유순희 지사님을 함께 찾아 뵌 분은 생존 독립운동가이신 오희옥(92살) 지사님 이었다. 오희옥 지사님과 유순희 지사님은 서로 왕래를 하시던 터였지만 몇 해 전부터는 유순희 지사님의 건강이 날로 안 좋아 번번이 방문 계획이 취소되곤 했던 것이다. 수원에 사시는 오희옥 지사님을 모시고 서울의 끝자락 동대문구 신내동에 살고 계시는 유순희 지사님 댁을 찾아 나선 길은 메마른 대지 위에 촉촉한 봄비가 내리고 있었고 아파트 주변에 심은 산수유 꽃이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황해도 황주 출신인 유순희 지사는 광복군 제3지대에 제1구대 본부 구호대원(救護隊員)으로 광복이 될 때까지 활동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저는 윤 시인님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인 입니다. 어렸을 때 윤 시인님의 주옥 같은 시를 만나고 난 뒤부터 윤 시인님의 시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윤 시인님의 한국어 시를 일본어로 번역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한국어 공부를 한 것이 어언 40여 년에 이릅니다. 그로부터 윤 시인님의 시 번역을 제 평생의 과제로 삼아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윤 윤동주 시인님! 저에게 번역은 자기 자신의 시를 창작하는 것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윤 시인님의 시를 일본어로 수준 높은 완성된 변역 시로 만드는 작업은 원시(原詩)에 대한 겸허한 자세이며, 또 그래야만 윤 시인님을 낳은 나라의 문화와 민족에 대한 존경을 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100년의 세월이란 꽤나 먼 느낌이지만 그래도 저는 윤 시인의 작품을 늘 곁에 두고 살아서인지 시공(時空)을 뛰어 넘어 윤 시인님이 항상 곁에 있는 듯 가깝게 느끼고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윤동주 시인님 기뻐해 주십시오. 제가 그토록 원했던 윤 시인님 시를 2015년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백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일대기를 사진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특별전이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 기념관에서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백범이 독립운동을 펼치던 당시의 모습을 차곡차곡 사진으로 선명하게 보여주는 전시회여서 관람객은 그 당시의 시대상은 물론 김구 선생의 일대기를 눈으로 체험해 볼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의 기념관에서 오는 3월 8일까지 이어지는 '여주독립운동가 및 백범 김구 선생 특별사진전'을 통해 독립된 나라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데 있어 선각자들의 역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특히 이번 특별전은 여주 출신 독립운동가인 원필희, 강영조, 엄항섭 등의 사진과 독립운동 내용을 담은 35점의 내용물들이 상세하게 표현돼 있어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위태로운 국가의 명운 앞에 기꺼이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사투를 건 투쟁을 통해 우리는 독립된 조국에서 살아가는 행복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게 한다. 이번 사진전시에는 광주백범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사진들도 전시돼있어 1919년 3ㆍ1운동의 독립정신을 학습하고 여주 독립운동가를 포함한 애국선열들의 업적들을 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이는 65살의 나이에 폭탄 의거로 순국의 길을 걸은 강우규(1855-1920) 의사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 남긴 말이다. 나라를 빼앗은 흉악한 일제에 온몸으로 저항한 것이야말로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 것이지만 강우규 의사는 겸손하게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청년들의 교육’을 걱정했다. 그러한 강우규 의사의 숭고한 나라사랑 실천 행동 뒤에는 탁명숙(1900-1972)이라는 여성독립운동가가 있었지만 이를 아는 이는 드물다. 그런가하면 핏덩이 갓난아기를 남겨두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박치은(1886-1954)애국지사도 있다. 박치은 애국지사는 남편 곽치문(1882-1922)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감옥에 들어갔는데 핏덩이 갓난아기를 둔 몸이었다. 철창 밖에서 젖이 먹고 싶어 우는 아기를 일제는 끝내 면회시켜주지 않아 눈앞에서 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꽃샘바람이 아직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가운데 어제(27일) 늦은 3시, 서울교육박물관(정독도서관 내)에서는 ‘신여성 김란사 -시대를 앞서간 여성의 위대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아주 특별한 전시회 개막식이 있었다. 김란사(金蘭史, 1872~1919, 그간 남편 성을 따라 하란사(河蘭史)로 부름)란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들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란사는 당시로는 드문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한국 최초의 문학사 학위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이화학당 교사 시절 유관순에게 ‘조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다오.’라며 민족혼을 심어준 인물이다. 특히 미국 유학에서 갈고 닦은 영어 실력과 이화학당에서 보여준 민족교육 활동 등이 인정되어 고종황제로부터 1919년 6월 파리강화회의(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위하여 승전국들이 파리에서 개최한 강화 회의로 전쟁에 대한 책임과 영토 조정,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 등을 협의함)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 승인’을 받아오도록 명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1919년 1월21일 일제의 독살로 알려진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가 있었고 이어4월김란사 역시 북경에서 독살로 의심되는 죽음을 당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