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고인께서는 고지도 원본 위의 한자를 일필(一筆)로 똑같이 써 내려가기 위해 글씨 연습에 날마다 아침 2시간씩 3년을 투자하셨습니다. 고인께서 영인본으로 접한 고지도의 양은 1,000점을 넘었지만, 지병이 악화되어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생을 마감한 2007년 7월 31일까지 필사한 고지도는 100점이 되지 못합니다.” 이는 생의 마지막까지 고지도 필사를 하던 최현길(1952~2007) 선생의 배우자인 전소연 여사의 말입니다. 전소연 여사는 2018년 4월 남편인 고 최현길 선생이 필사한 고지도 35종 65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맡긴 바 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 전도인 『동여도』는 그 길이가 남북 7m에 이르는 초대형 (23첩) 작품입니다. 최현길 선생은 40대 중반까지 광고계에 몸을 담고 있다가 지병으로 전원생활을 시작하면서 2000년대 초 규장각에서 영인해서 펴낸 고지도의 아름다움에 큰 감명을 받고 본격적인 필사에 전념했습니다. 특히, 선생은 ‘전라도흥양현발포진지도’와 같이 국토를 아름답게 그려낸 회화의 관점에서 고지도를 골라 필사 작업에 매달렸지요. 최현길 선생이 기증한 고지도 필사본은 ‘아름다운 필사, 최현길 고지도 기탁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복궁 중건 비용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갔을까? 원납전! 원해서 내는 돈인가, 원망하며 내는 돈인가? 궁궐을 세우기 위해서 철거를 한다고? 영건의 아이러니! 과연 서민들이 자식처럼 달려와 궁궐을 지었을까? 경복궁 중건 현장은 좋은 일자리였을까? 국가의 막중한 공사를 방해한 부정행위들 등 모두 15개의 주제로 이뤄진 《경복궁 중건 천일의 기록》이 서울역사편찬원에서 나왔습니다. 이 책은 고종대 경복궁 중건의 역사상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엮은 책으로 일본 와세다대학에 소장된 《경복궁영건일기》를 통해 새로 발견된 내용과 흥미로운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서울역사편찬원은 《경복궁영건일기》와 관련해 국내에서 축적된 성과를 어떻게 하면 시민들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이강근 서울시립대 건축학과 교수를 비롯한 국내의 건축, 역사, 미술사, 국문학 전문가 등 다양한 집필진들이 15개의 주제로 고종대 경복궁 중건의 역사상을 안내하는 《경복궁 중건 천일의 기록》을 펴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경복궁 중건 공사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행위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기조차 합니다. <국가의 막중한 공사를 방해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옷감, 종이, 머리털 따위를 자를 때 쓰는 가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역사가 깊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아트로포스(Atropos)가 가위를 들고 정해진 실을 자르는 이야기가 나오며, 중국의 경우에는 후한(後漢)에서 송대(宋代)에 이르는 시기의 무덤 부장품에서 가위가 많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장차(長沙) 계화원(桂花園)의 여성 무덤에서 출토된 가위에는 ‘동진(東晉) 승평(升平) 5년(361)’이라는 기록과 함께 바늘과 가위 등 바느질 도구가 나오기도 했지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가위는 신라시대 643년 (선덕여왕 3년) 창건된 분황사석탑에서 출토된 사리함에서 나온 협가위입니다. 모양은 ∝형으로 손잡이는 없고 날을 엇갈리게 하려고 밑부분을 가늘게 둥글린 것이 특징입니다. 고려시대로 가면 철제와 동제(銅製)로 만든 가위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신라의 것과 같은 ∝형과 오늘날의 X형 모습 등 다양한 가위가 나타납니다. 조선시대는 고려의 것과 비슷한 X형 모양으로 재료는 무쇠가 대부분이고 철과 백동(白銅)을 쓴 것도 있습니다. 전북 진안에는 한국 가위의 역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가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진안가위박물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요즘 뉴스를 보면 “구정 앞두고 사랑 나눔 봉사활동 실시”, “구정 연휴 아시아 여행자의 선택은?”, “태국 두번째 ‘우한 폐렴’ 환자, 구정 앞 확산 우려”처럼 ‘설날’이 아닌 ‘구정’이란 말을 쓰는 여전히 쓰고 있습니다. 이 ‘구정’이란 말은 양력 신정에 대해 음력으로 쇠는 ‘설날’을 말하는 것이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것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1936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향토오락》이란 책을 펴낸 이후 우리말ㆍ우리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창씨개명으로 우리의 성과 이름까지 빼앗았으며, 풍물굿 등 민속놀이도 맘대로 즐기지 못하게 함으로써 겨레문화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또한, 양력설 곧 ‘신정’을 설날로 쇠는 일제는 우리 겨레가 오래전부터 쇠던 설을 ‘구정(舊正)’이란 말을 써서 지내지 못하게 하였지요. 그런데, 광복 뒤에도 정부가 양력을 기준력으로 삼으면서 양력설은 제도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1989년까지만 해도 양력 1월 1일부터 3일 동안을 공휴일로 했기에 성탄절과 함께 연말연시를 잔치처럼 지내는 게 굳어질 정도였지요. 그리고 우리 고유의 음력설은 ‘민속의 날’이라 하여 ‘이중과세’라는 허울 좋은 말로 하루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경자년(庚子年) 새해를 맞는 설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저기서 슬기전화(스마트폰) 연하장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연하장의 대부분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행복한 한 해 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에는 소망하는 일들이 모두 이뤄지기를 비손합니다.’ 등 거의 특성이 없는 엇비슷한 문구들뿐입니다. 그럼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새해 인사를 나눴을까요? “고모님께서 새해는 숙병(宿病)이 다 쾌차(快差)하셨다 하니 기뻐하옵나이다.” 이 글은 숙종임금이 고모인 숙희공주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숙종은 고모의 오랜 병이 완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숙병이 쾌차했다 하니 기쁩니다.”라며 아직 병중이건만 이미 병이 다 나은 것처럼 표현했지요. 그런가 하면 정조 때 사람 한경(漢經)은 하진백(河鎭伯) 집안사람들에게 문안 편지를 보냈는데 하진백이 과거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을에 있을 과거에서 급제했다며 미리 축하의 덕담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밖에 명성왕후(明聖王后, 현종 비)가 셋째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에게 보낸 편지, 인선왕후(어머니)가 숙휘공주(딸)에게 보낸 편지, 순원왕후(재종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는 설날 아침이면 일찍이 남녀노소가 설빔으로 갈아입고, 차례를 지낸 뒤에 할아버지ㆍ할머니, 아버지ㆍ어머니 등 집안 어른에게 세배한 다음 일가친척과 이웃어른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렸습니다. 요즘엔 직장인들이 회사 윗사람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리기도 하지요. 그런데 조선시대엔 새해 초 대문 안에 세함(歲銜)을 두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각사의 서리배와 각영의 장교와 군졸들은 종이에 이름을 적어 높은 관원과 선생의 집에 들인다. 문 안에는 옻칠한 소반을 놓고 이를 받아두는데, 이를 세함(歲銜)이라 하며, 지방의 아문에서도 이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김매순(金邁淳)이 한양(漢陽)의 세시풍속에 대해 쓴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따르면, 설날부터 정월 초사흗날까지는 승정원과 모든 관청이 쉬며, 시전(市廛) 곧 시장도 문을 닫고 감옥도 비웠다고 합니다. 이때는 서울 도성 안의 모든 남녀들이 울긋불긋한 옷차림으로 왕래하느라고 떠들썩했다고 하며, 이 사흘 동안은 정승, 판서와 같은 높은 관원들 집에서는 세함만 받아들이되 이를 문 안으로 들이지 않고 사흘 동안 그대로 모아 두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신지영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최근 일제 말기인 1944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북규슈 사가현 탄광에 강제동원됐던 소설가 안회남(1909~?)이 징용 경험을 바탕으로 광복 직후 펴냈던 자전적 소설 《탄갱(炭坑)》을 처음 공개했습니다. 이 소설은 안회남이 잡지 《민성(民聲)》을 통해 14회에 걸쳐 연재했던 것으로 1945년 12월 25일 《민성》 창간호는 '탄갱' 첫 회를 연재하면서 작가의 징용 체험에서 비롯한 작품이라고 소개했지요. 또 잡지는 "우리 문단의 중진 안회남씨가 작년 여름에 포악한 일본의 학정으로 규슈(九州) 탄광에 징용당해 갔던 사실은 아직도 우리 기억에 새로울 것이다. 수많은 동포와 함께 괭이를 들고 탄갱 속에서 굶주림과 헐벗음과 한숨으로 날을 보내었으니 여기 실리는 '탄갱'이야말로 그가 친히 체험한 생지옥의 적나라한 기록"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렇게 소설 《탄갱》에 소개된 강제징용은 일제가 1938년 4월 공포한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에서 비롯되었지요. 특히 일제는 노동력 보충을 위해 조선인을 강제노동에 동원했는데,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113만 혹은 146만 명에 달하는 것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태왕 전하가 덕수궁(德壽宮) 함녕전(咸寧殿)에서 승하하였다.” 이는 《순종실록부록》 순종 12년(1919년) 1월 21일 기록입니다. 101년 전 오늘 고종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공식적인 발표로는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로 인한 자연사였지만, 건강하던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독살설로 번졌습니다.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으며,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는 데서 고종의 독살설이 일었다고 하지요. 또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입속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30센티미터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는 것도 독살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고종의 장례는 국장이 아닌 대행태왕의 장례로 격하되었으며, 조선의 전통 장례가 아닌 일본 황족의 장례였고 행렬에만 조선 관례대로 하는 왜곡된 장례였습니다. 국장 절차를 기록한 《고종태황제어장주감의궤(高宗太皇帝御葬主監儀軌)》와 국장에서 의장 행렬을 담당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마지막 스물넷째로 ‘큰 추위’라는 뜻의 대한(大寒)입니다. 하지만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꼭 소한보다 더 춥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크게 힘쓸 일도 없고 나무나 한두 짐씩 하는 것 말고는 대부분 놀고먹기에 삼시 세끼 밥 먹기 죄스러워 점심 한 끼는 반드시 죽을 먹었거나 걸렀지요. 또 죽을 먹는 다른 까닭은 양식이 있는 겨울에 아껴서 돌아오는 보릿고개를 잘 넘기려는 의지도 들어 있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대한을 일컬어 겨울을 매듭짓는 절기로 보아, 대한의 마지막 날 곧 입춘 전날을 절분(節分)이라 하여 섣달그믐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날 밤을 해넘이라 하여, 콩을 방이나 마루에 뿌려 악귀를 쫓고 새해를 맞지요. 그 절분의 다음날은 정월절(正月節)인 입춘으로, 이날은 절월력(節月曆)의 새해 첫날이 됩니다. 이즈음에 해 먹는 음식은 호박죽인데 겨울철 호박죽을 먹으면 몸이 따뜻해지는 효과가 있어 손발이 찬 사람이 먹으면 매우 좋습니다. 또한, 호박 속 풍부한 비타민A가 감기에 대한 저항력도 높여 준다고 하지요. 또 추위를 이기는 데에는 생강차만 한 마실거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