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처음으로 제 사진으로 달력을 만들어보았습니다. 퍼블로그라는 업체에 사진을 보내주면 멋진 달력을 만들어주네요. 물론 달력 제작대금은 지급해야지요. 처음에는 어떤 사진으로 달력을 꾸며볼까 생각하다가, 제가 살고 있는 청화아파트에서 찍은 사진으로 달력을 꾸미기로 하였습니다. 이제 올 9월이면 재건축 중인 아파트가 준공됩니다. 그러면 4년 동안 정든 청화아파트를 떠나야 하기에 이번 달력은 청화아파트로 꾸며보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내년에는 제 사무실이 있는 코엑스 주위를 담은 사진으로 달력을 꾸며볼까 합니다. 달력 표지사진입니다. 퇴근할 때 버스에서 내려 아파트를 쳐다볼 때, 저녁노을이 아파트를 비추는 것이 눈에 들어와 찍었습니다. 1월이라 눈 온 풍경을 담아보았습니다. 2월 사진은 아파트 옥상에서 건너편 서쪽 능선의 건물에 걸린 해를 망원렌즈로 당겨찍은 사진으로 정했습니다. 3월 사진 4월 사진은 아파트 옥상에서 일몰 후의 아파트 모습을 사진에 담아보았습니다. 5월 6월이라 꽃 사진으로 정해보았습니다. 7월 사진은 비오는 밤의 사진입니다. 하얀 비옷 입고 우산 쓰고 가는 아내를 앞에 두고 찍었습니다. 8월 사진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10. 23.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고맙게도 KBS 강석훈 기자가 문상을 와주었습니다. 강기자는 자기가 쓴 책이 곧 나온다더니, 10. 31. 초판이 나오자마자 나에게도 책을 보내주었습니다. 바로 《조선의 大기자 연암》이란 책입니다. 대(大)기자라니? 연암을 좋아하고 열하일기를 애독한 나로서는 순가 ‘대기자’에 혼란스러웠으나, 이내 강 기자가 연암을 ‘대기자’라고 부르는 것을 알 것도 같았습니다. 머리말에서 강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하일기는 대기자의 면모와 식견, 실력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대장정의 르포르타주다. 르포르타주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단편적인 보도가 아니라 특정 주제나 지역 사회를 심층 취재한 기자가 취재 내용과 식견을 바탕으로 뉴스와 여러 에피소드, 논평 등을 종합적으로 완성한 기사이다.” ‘그래! 기자의 관점에서는 《열하일기》에서 연암의 대기자의 면목을 읽어낼 수 있겠구나!’ 그런데 강 기자는 연암이 능숙한 대기자의 필치로 《열하일기》를 썼을 뿐 아니라, 연암 스스로 《열하일기》에서 자신을 ‘기자’라고 했답니다. ‘으잉? 이건 무슨 말이야? 당시에는 ‘기자’라는 개념도 없을 때 아닌가?’ 1780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박수중 선배님이 《물고기 귀로 듣다》 시집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번에도 말학(末學) 후배인 저에게까지 시집을 보내주시니 늘 죄송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번 시집은 8월 15일에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광복절에 세상의 빛을 받았으니 더욱 의미가 있네요. 그동안 선배님 시를 보면 인간의 개성은 말살되고 규격화되고 소외되는 현대사회에 대해 일침(一針)을 놓는 시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바로 전의 시집은 시집 제목 자체를 아예 《규격론》이라 하여 이러한 비판의식을 더욱 앞세웠지요. 이번 시집에도 ‘규격론2’를 실어 그런 비판의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가끔 주인에 끌려 양재천을 산책합니다 걸으면서 절대 다른 개에 한눈팔 수 없어요 나는 일찌감치 중성수술을 받았어요 씨를 함부로 뿌려 족보의 희소가치를 망치면 안 되니까요 수술대 위에서 나는 하염없이 울었어요 내 귀한 후손을 볼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만 나는 웬일인지 눈물을 많이 흘려요 눈물 자국으로 눈 주위 얼굴 주변 털이 뭉쳐버리자 주인의 뜻대로 미안용(美顔用)으로 눈물샘까지 제거당했어요 나는 웃프게 웃프게도 더 이상 울 수도 없게 되어버렸어요 시 ‘규격론2’의 뒷 부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제가 어제 제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오랫동안 묵혀두고 있다가, 잠실나루역 앞 ‘서울책보고’에서 드디어 살 수 있었던 책 《잠수복과 나비》에 대해서 말씀드렸었지요? 그때 같이 산 책에 《반쪽의 고향》도 있습니다. 이 책 역시 오랫동안 목록 속에 잠자고 있다가 ‘서울책보고’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 책은 1996년 7월 30일 나왔으니, 26년 만에 돌고 돌아 저에게까지 왔네요. 이 책의 저자 이상금은 일본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15살에 해방을 맞으면서 고국으로 오신 분입니다. 저자는 이대 유아교육과 교수로 오랜 세월 재직하다가 1993년에 일본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반쪽의 고향》이란 제목으로 내셨습니다. 제목이 왜 《반쪽의 고향》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책은 일본어로 일본에서 먼저 나왔습니다. 서문을 보니 저자는 일본 청소년의 21%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다면서, 저자 가족의 생활사를 통해서 일본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구체적인 역사를 그들에게 읽히고 싶었답니다. 이야기 자체가 일본에서의 성장사(成長史)이고, 저자 또한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일본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흰물결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진의장 초대전 <그림은 바다를 품고>에 다녀왔습니다. 진의장 화백이 서울법대 선배, 더 범위를 좁힌다면 서울법대 문우회(文友會)의 선배이기에 더욱 시간을 내어 전시회에 갔다 온 것입니다. 진 화백은 서울법대를 나와 제10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오랜 세무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제5대, 6대 통영시장(2003 – 2010)을 지냈습니다. 진 화백의 이력으로 보아, 진 화백이 처음부터 화가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겠지요? 그래서 문우회 단톡방에 진 선배님 전시회 소식이 올라왔을 때, 솔직히 의무감에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진 선배님이 은퇴하고 노후 소일거리로 그림을 그리는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시장에 들어가 그림들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단순한 소일거리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그림에서는 웅혼한 기백이 뿜어져 나오고, 자유로운 영혼이 춤추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이건 내가 알고 있는 전문화가의 그림 그 이상이었습니다. “어떻게 평생을 공무원으로, 정치인으로 살아오신 분이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알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장 도미니크 보비(1952~1997)가 쓴 《잠수복과 나비》를 읽었습니다. 참, 이 책에 대해 말하기 전에 제가 어떻게 이 책을 읽게 된 지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저는 책을 읽다가 나오는 참고문헌이나 언론에 나오는 서평을 보고 마음에 드는 책은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적어둡니다. 사람들이 추천하는 책들도 이렇게 목록에 적어두고요. 《잠수복과 나비》도 이 가운데 어떤 경로로 제 살 책 목록 속에 들어간 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오랫동안 제 목록 속에서 잠자고 있었습니다. 오래전에 절판된 책이라 당최 살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얼마 전에 잠실나루역 앞 ‘서울책보고’에서 드디어 이 책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서울책보고’는 서울시가 운영하는 헌책방으로, 여기에는 많은 헌책방이 서가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때도 아산병원에 문상가다가 들러 검색대에서 큰 기대를 걸지 않고 검색하는데, 어? 검색 결과 창에서 《잠수복과 나비》가 반짝반짝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검색 결과가 알려주는 서가로 달려가, 드디어 2008년도에 나온 《잠수복과 나비》를 제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잠수복과 나비》를 쓴 장 도미니크 보비는 세계적인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박노해 시인이 5번째 사진에세이집 《아이들은 놀라워라》를 냈습니다. 박 시인은 지난 20여 년 동안 팔레스타인, 아프카니스탄, 미얀마, 남미 안데스, 쿠르드족 지역 등 분쟁지역이나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지역을 다니면서 평화를 전파하며 그들의 삶을 사진에 담아왔지요. 주로 흑백 아날로그 사진으로 담아왔는데, 그동안 이렇게 담아온 사진을 지역별 또는 주제별로 나누어 여러 차례 전시회도 열었고 사진에세이집도 낸 것입니다. 이번에는 이러한 지역의 아이들을 담은 사진에세이집을 냈네요. 물론 사진에세이집 뿐만 아니라, 라 카페 갤러리(종로구 자하문로 10길 28)에서 같은 제목으로 사진 전시회도 열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나눔문화> 임소희 이사장은 감사하게도 저에게까지 책을 보내주었습니다. 박노해 시인이 지난 20여 년간 만나온 세계 아이들의 강인하고 눈물겨운 모습이 담겼습니다. 전쟁터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안아주고, 지구마을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울며 기록해온 시인의 이야기가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아이들은 희망이어라. 아이들은 어둠 속 빛이어라.” 인류의 희망인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노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아래 사진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예! 윤봉길 의사가 거사 뒤 체포되는 것으로 알고있는 사진입니다. 윤 의사는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축하 겸 전승축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진 뒤 현장에서 체포되었지요. 저는 학교 다닐 때 근대사 시간에 이 사진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렇기에 저는 잡혀가는 사람이 윤봉길 의사라는 것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끝없이 의문을 던지는 강효백 교수는 《新 경세유표》에는 싣지 않았지만, 이 사진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졌습니다. 강 교수는 1999년 상하이영사관에 근무하면서 이 사진에 의문을 가지고 조사를 벌였던 것입니다. 윤 의사 의거 직후 상하이타임스는 4월 30일 자 기사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폭탄이 터진 뒤)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군중들 사이에 조선 사람 윤봉길이 있었다. 그는 군경들에 의해 구타당해 쓰러졌다. 주먹, 군화, 몽둥이가 그의 몸을 난타했다. 만일 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바로 그 조선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곧 그 회색 양복은 갈기갈기 찢겨 땅에 떨어졌다. 잠시 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가 쓴 《新 경세유표》를 읽었습니다. 강 교수는 대만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베이징대학과 중국인민대학 등에서 강의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대만대표부와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중국대사관 외교관을 12년 동안 지낸 중국통입니다. 그렇기에 《G2시대 중국법 연구》, 《중국인의 상술》, 《차이니즈 나이트 1ㆍ2》 등의 중국 관련 책들을 냈으며, 이 밖에도 다양한 저술 활동을 하면서 모두 30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新 경세유표》는 올 1월 말에 나온 책입니다. 《경세유표》라면 우리가 잘 알듯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도중 쓰신 책 아닙니까? 다산은 썩어빠진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체제 등을 어떻게 하면 올바른 방향으로 고칠 수 있을까 고민하고 고민하면서 《경세유표》를 쓰셨지요. 그러니까 《新 경세유표》라면 강 교수가 현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고민을 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쓴 책임을 직감할 수 있겠네요. 강 교수는 책 머리말에서 ‘나는 의문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학문은 세상의 모든 마침표를 물음표로 바꾸는 데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렇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세상의 모든 음악을 주유한 김진묵 선생님이 《새》라는 수필집을 내셨습니다. 그런데 표지의 제목 옆에는 ‘김진묵 다큐멘터리 에세이’라고 되어 있네요. 지난 30여 년 동안 선생의 삶을 다큐멘터리처럼 펼쳤기에 다큐멘터리 에세이라고 하는군요. 수필집을 펼치니 1982년 5월의 출근길을 잠깐 언급하고는 1988년 5월 아카시아 향기 자욱한 아침부터 다큐멘터리는 펼쳐집니다. 그런데 왜 1988년 5월부터일까요? 이날 선생의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선생은 38살의 나이로 음악잡지 《월간 객석》의 기자가 되어 한창 정력적으로 활동할 때였습니다. 선생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침 9시’ 이는 지상명령이다. 오랜 세월, 아침 9시를 위해 단잠을 포기하고 허겁지겁 과속을 했다. 충혈된 눈의 눈곱을 찬물로 닦아내고 9시를 향한 질주가 계속되었다. 매일 아침 9시까지 굴러 내린 돌을 정상에 올려놓아야 했다. 파도가 지속적으로 몰려오듯 9시를 향한 질주가 반복되었다.” 저는 김 선생님을 뵐 때마다 ‘자유로운 영혼’을 봅니다. 그런 자유로운 영혼이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을 계속하였으니, 마음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