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화문과 궁터만 남은 한 많은 궁궐 ‘경희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세종대로 네거리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900m쯤 가면 서울역사박물관을 막 지나 오른쪽에 한자로 ‘興化門(흥화문)’이라고 쓰인 경희궁의 문이 보입니다. 광해군은 새문동(塞門洞 : 지금의 종로구 신문로 일대)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설이 나돌자, 이를 누르기 위하여 그 자리에 경덕궁(慶德宮)을 짓게 했습니다. 이 경덕궁은 영조 36년(1760) 이름을 경희궁으로 고쳤으며,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궐(東闕)인 창덕궁에 견줘 서궐(西闕)이라고 불렀지요. 이 경희궁에는 여러 임금이 머물렀는데 숙종은 이곳에서 태어났고 승하했습니다. 또 경종이 태어난 곳도, 영조가 승하한 곳도, 정조가 즉위한 곳도 이곳이었습니다. 경희궁은 창건 때 정전ㆍ동궁ㆍ침전ㆍ제별당ㆍ나인입주처 등 1,500칸에 달하는 건물이 있었으며, 그 넓이가 자그마치 7만 평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런 경희궁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전각이 헐리고, 일본인들의 학교로 쓰이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습니다. 특히 1907년 궁의 서쪽에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5년엔 경성중학교까지 들어서게 됩니다. 심지어 광복 뒤에도 이곳은 서울중고등학교로 쓰이면서
-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 2025-11-26 1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