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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는 이야기

가짜 독립유공자에게 빼앗긴 훈장 되찾는데 28년

김구 주석 경호원이었던 황영식 애국지사의 기구한 사연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버님은 광복군 출신으로 이름은 황영식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황영석이라는 이름의 가짜 독립운동가가 아버님 대신 대통령표창장을 가로채는 바람에 각고의 노력 끝에 28년만인 1991년 4월 13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아 아버님 영전에 바쳤습니다. 그러나 좀 더 일찍  아버님 살아생전에 훈장을 받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

 

지난 10월 28일 일요일 낮 2시,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황영식(본명 황차식, 1913-1969) 지사의 아드님인 황부일(63) 씨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이렇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 황영식(1991년 애국장 추서)과 어머니 김봉식(1990년 애족장 추서) 지사는 부부 독립운동가로 황부일 씨는 당시 자료를 보여주면서 가짜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이것이 가짜 황영석이 가로챘던 대통령표창장입니다. (지금은 회수하여 황부일 씨에게 전달된 상태) 여기 보시면 1963년 8월 13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발행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는 아버님(황영식)이 살아 계실 때 였는데 가짜가 표창장을 가로채는 바람에 아버님은 살아생전에 당신의 독립운동 공적을 나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상태로 1969년 눈을 감으셨습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황영식 이름 끝자 부분의 '식'자와 비슷한 '석'자 이름의  가짜가 아버지에게 돌아가야할 표창장을 가로채버린 것이었다. 엉뚱한 사람에게 도둑맞은 표창장을 되돌리기 위해 황부일 씨는 생업을 팽개치고 증빙 서류를 챙겨 부산에서 서울 보훈청(지금의 보훈처)을 여러해 드나들었다.  그 때 일을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듯 황부일 씨는 대담 내내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

 

사실 기자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찾아 글을 쓰는 사람이라 이번에 황부일 씨의 어머니인 광복군 출신 김봉식 지사를 취재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부산에 살고 있는 황부일 씨의 전화번호를 어렵사리 알아내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고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기자는 대뜸 “아버님도 혹시 독립운동을 하셨습니까?”라고 물었다. 대답은 “맞다”는 것이었다.

 

황부일 씨 부모님은 부부 독립운동가지만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어머니 김봉식 지사나 남편 황영식 지사 어느 쪽에도 부부라는 표기가 없어 기자는 황부일 씨 어머니(김봉식 지사) 혼자서 독립운동을 한줄 알았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부부가 함께 독립운동을 한 예가 많은지라 통화가 되자마자 아버지의 독립운동 여부를 물었던 것인데 아뿔사! 아버지의 독립유공 열매를 엉뚱한 사람이 가로챘다는 말에 단숨에 부산으로 달려갔다.  황부일 씨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버지는 26살 때인 1939년 말 고향인 경북 영일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가셨습니다. 1940년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중국군 중앙전시간부훈련단 한청반(韓靑班)에서 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 이어 이범석 장군이 이끌던 중국 서안의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활동하였습니다.  어머니는 1940년 2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하여 항일투쟁을 하던 중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군되자 중국 서안에 본부를 둔 광복군 제5지대에 편입되었습니다. 이후 1942년 5월 제5지대가 제2지대로 개편됨에 따라 아버지와 같은 제2지대 대원으로 활약했지요.

 

아버지는 이후  1944년 4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였으며, 그해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이 무렵 임시정부는 중경에 있었음) 내무부 자리로 옮겨 백범 김구 주석의 경호원(경위대원)이 되어 활동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영어, 일어, 중국어에 능통했으며  1945년 6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로 발령이 나서 경리처 소속의 양복과원(粮服科員)으로 복무하였습니다. 양복과원이란 말 그대로 군대의 식량과 의복을 책임지는 부서로 요즘으로 치면 군수과 또는 병참부서에 해당할 겁니다.”

 

 

광복 후 고국으로 돌아온  황영식 지사는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가  국군이 창설되면서 육사7기로 졸업하여 장교로 복무했다. 그 뒤 1961년 육군중령으로 예편했다. 그때 황영식 지사 나이 48살 때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에 육사 7기는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눠서 뽑았는데 전반기에 지원한 경우, 광복군 출신에게는 특혜가 있었음에도 아버지는 일부러 후반기에 지원하셨습니다. 그 까닭을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께서 욕심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전역 시에 받은 얼마 안 되는 퇴직금으로 아버지는 부산시내에서 양과점(제과점)을 냈지만 오래가지 않아 문을 닫았고 56살로 숨을 거두기까지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하셨습니다. 공교롭게도 어머니가 1969년 4월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3달 뒤인 7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중국에서 광복군 활동한 것을 인정 받아 황영식 지사는 1963년 8월 13일, 다른 광복군 출신 323명과 함께 대통령표창장을 받기로 되어있었으나 당시 행정당국의 안이하고 무성의한 독립유공자 행정 처리로 독립운동을 한 적이 없는 엉뚱한 황영석(82년 사망) 씨에게 표창장이 수여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당시 담당자가 조금만 관심을 가졌어도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황부일 씨는 말했다. 왜냐하면 당시에 아버지와 같이 광복군 활동을 한 분들이 많이 생존해 계셨기 때문에 '황영석' 이라는 이름은 광복군으로 활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더욱이 표창장이 수여될 무렵 황부일 씨는 어렸기때문에 부모님의 독립운동 서훈에 대한 사실을 잘 몰랐다고 했다. 
 

 

 

그러다가 황부일 씨가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83년으로 28살 때의 일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숙부(황정식 씨)로부터 아버지가 광복군이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그때부터 전국의 광복군 출신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증빙 자료를 수집하여 보훈처에 신청하는 과정에서 1987년, 아버지 황영식 지사가 받아야 할 표창장이 황영석이라는 엉뚱한 사람에게 수여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황부일 씨는 잘못 수여된 아버지의 표창장을 되찾아오는 싸움을 시작했다. 하루 벌어먹고 살기도 힘든 마당에 부산에서 서울 총무처(당시에는 총무처에 보훈신청을 했음)까지 오르내린 것만도 수십 차례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63년 대통령표창이 엉뚱한 사람에게 수여된지 28년만인 1991년 4월 13일, 감격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아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기까지 황부일 씨가 겪은 고초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노정이었다.  "보훈처와 총무처에서는 엉뚱한 사람에게 아버지의 표창장을 수여한 사실이 드러날까봐  무려 3년여 동안 15차례의 증빙 서류 보완을 요구하며 이 문제를 지연시켰다"며 혀를 찼다. 황부일 씨는 끈질긴 집념으로 생계도 팽개친 채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일념으로 뛰어다닌 끝에 1987년 보훈청(현 보훈처)으로 부터 "황영석 씨에게 수여된 표창장은 오류였다"는 시인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보훈처가 시간을 질질끌면서 증빙 서류를  보완하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전국에 흩어져 있던 광복군 출신의 아버지 동료를 찾아다니는 등 생업에 위협을 받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광복군 출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영영 묻힐 뻔했던 아버지의 공적이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알고 어느 자식이 포기하겠는가? 라고 황부일 씨는 기자에게 되물었다.

 

이러한 아드님의 노력 끝에 1991년, 드디어 아버지 황영식 지사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게 되었다. 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겠다고 나선 이래, 가짜가 표창장을 수여받은 사실을 뒤늦게 알고 그것을 되찾아오기 위한 투쟁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광복군이자 김구 주석의 경호원으로 활동하던 아버지의 명예가 담긴 표창장을 되찾기까지 걸린 5년의 시간은 아드님 황부일 씨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이었다.  아버지의 훈장은 어머님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은 1년 뒤의 일이다. 훈장은 어머님의 경우 사후 21년 만에, 아버지는 사후 22년 만에 추서 받은 것이다.

 

“지금도 용서가 어려운 것은, 당시 아버지가 광복군으로 활동한 사실을 입증하는 온갖 서류를 갖춰 제출해도 계속 차일피일 미루며 검토해주지 않았던 점입니다. 안이하고 무성의한 태도로 정확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이미 가짜에게 표창장이 발급되어 버리고 나자 보훈처는 스스로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미온적인 자세를 취했던 것이지요. 하도 질질 끌기에 이상하다 싶어 알아보니 실무차원에서는 가짜에게 표창장이 발급된 것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윗선에서 결재 도장이 안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거대한 벽에 부딪친 심정이었습니다.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습니까? 죄지은 사람 취급을 당하면서 구걸하다시피 보완서류를 접수하고 나면 가서 기다리라고 하고 감감무소식일 때 가장 큰 비애를 느꼈습니다.”

 

당당한 광복군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경호원 출신이던 아버지 황영식 지사의 공적을 입증하는 일은 다행히 광복군 출신의 아버지 동료들이 너도 나도 흔쾌히 인우보증을 서줘서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서류를 몇 해씩 담당자 서랍 속에 잠재웠던 공무원들의 처사는 지금 생각해도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황부일 씨는 힘주어 말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중국 서안의 광복군 제2지대에 함께 있었지만 인우보증을 위해 광복군 출신 어르신들을 만나보니 오히려 어머니(김봉식 지사) 이름을 더 잘 알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제2지대에 있다가  중경에 자리한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경호원으로 떠나는 바람에 동지들이 더 오래 함께 복무했던 어머니 이름을 더 잘 기억했던 것이지요. 당시 광복군 출신으로 아버지의 인우보증을 서주었던 오서희(1922-1996, 1990년 애국장), 김상준(1916-1996, 1990년 애국장) 지사님 등의 노력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 황부일 씨는 말했다.

 

그는 이어,  “아버지는 영원한 광복군이셨습니다. 청렴한 군인의 본보기로 사신 분이란 걸 나중에 알게 되었지요. 당시 떠도는 이야기로 병참장교 도장 하나면 평생 먹고 살 재산을 마련했다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아버지는 집은커녕 방 한 칸도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서운하지만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잎새에 이는 한줄기 바람에도 걸림이 없는 대한의 진정한 광복군으로 살다 가신거지요.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인과 함께 부산에서 식당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황부일 씨는 ‘진정한 광복군 출신 부모님’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컸다. 올 초 뇌경색이 온 뒤 지금은  회복중인 황부일 씨는 그러나 아주 정확한 발음과 기억으로 부모님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즈음 가짜 독립운동가들이 판치는 뉴스를 보면서 황부일 씨는 과거 아버지의 표창장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한 생각이 되살아난다고 했다. 꿈쩍 달싹도 안하던 거대한 바위 앞에서, 진짜 독립운동가 아들이 던지던 달걀이 그냥 깨져버린 것 같지만 그 바위를 끝내 뚫어냈으니 그 노고에 손뼉을 치고 싶다. 아드님의 끈질긴 추적이 아니었으면 광복군 황영식 지사는 아직도 서훈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찔한 이야기다. 

 

백번 양보해서 행정담당자가 실수를 했다고 쳐도 이에 대한 오류를 발견했다면 그 즉시 확인하여 해결해주는 것이 독립운동가를 예우하는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온갖 서류를 가져오라고 헛걸음질을 여러번 시키면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아니고서야 어찌 황부일 씨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앞으로 국가보훈처는 이러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철처히 포상자 관리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담 중에 황부일 씨는 부모님과 관련된 사진과 관련 신문 자료 등을 기자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다. 1993년 5월 20일 <시사저널> 기사로  '청와대 독립유공자 재심사'라는 제목과 함께 '문제점을 낱낱이 파악해서 개혁하겠다,  포상기준을 최초 공개한다'라는 부제목의 기사였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독립유공자와 관련된 문제점은 별로 개선되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하다. 그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가짜 독립운동가(2018.10.1, 오마이뉴스, 20년 만에 밝혀진 가짜 독립운동가 집안의 진실) 들이 버젓이 훈장을 타가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정말 가짜들을 발본색원하는 일은 가능한  것인지, 그 방법은 무엇인지, 부부 광복군 황영식, 김봉식 지사의 아드님인 황부일 씨와의 대담을 통해 절실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