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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돈키호테와 다람살라 방문기

달라이 라마와 간디의 비폭력

다람살라 공항 폐쇄, 돌아돌아 예정보다 24시간 늦게 귀국
한국의 돈키호테와 다람살라 방문기 (25)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청전 스님도 지적했지만, 달라이 라마가 주장하는 핵심 사상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라”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가 게릴라 지도자에게 비폭력을 요구한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달라이 라마는 인도의 간디를 만나서 비폭력을 배웠다고 한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려면 폭력을 휘두를 수는 없을 것이니, 친절과 비폭력은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귀국한 뒤 어느 날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친구를 만나 점심을 먹으며 다람살라 갔다 온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대뜸 하는 말이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은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가 1959년에 망명한 이후에 티베트에 남아 있는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을 추종하여 총을 들지 않고 단순히 시위만 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멍해졌다. 그렇게 볼 수도 있구나.

 

친구는 이어서 말했다. “우리나라 불교를 보라. 임진왜란 때에 사명당과 서산대사는 승병을 일으켜 싸웠다. 외적이 침입하면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칼을 들고 싸우는 것은 스님이라도 당연한 것이다. 인류사를 되돌아보면 모든 전쟁에서 힘 있는 자가 이기고 역사는 이긴 자가 기록한다. 전쟁에서 진 민족은 사라진다. 달라이 라마가 게릴라 부대를 해산시킨 것은 전략적으로도 매우 어리석다. 나중에 중국과 자치권을 두고 협상할 때에 무스탕 지방의 게릴라 군을 협상 카드로 쓸 수가 있었는데, 게릴라를 해체시킨 후에 무슨 협상이 이루어질 수가 있겠느냐?”

 

달라이 라마와 간디와 예수

 

 

대답이 궁해진 나는 이렇게 질문했다. 그럼 너는 간디의 비폭력은 어떻게 보느냐? 그것도 무책임한 것이냐? 그러자 친구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협상의 상대에 따라서 달라져야 한다. 달라이 라마가 상대한 모택동은 무지막지한 지도자이다. 모택동이 조종한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2,300만 명이 죽었다. 모택동은 티베트인의 민간인 시위를 탱크와 대포로 진압하지 않았느냐? 간디가 상대한 영국은 그래도 기독교 문명국가로서 그렇게 막무가내는 아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달라이라마의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라.’는 가르침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라고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예수나 석가나, 달라이 라마나 모두 종교 지도자이다. 종교 지도자는 현실 세계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종교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특히 냉엄한 국제 관계는 외교의 원리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트럼프의 미국과 시진핑의 중국이 무역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라. 무역 전쟁은 협상이며 모든 협상은 주고받는 원리가 적용된다. 모든 협상은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종교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우리는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달랐다.

 

인터넷으로 “달라이 라마 방한 추진회”를 검색해 보았다. 다음과 같은 정보가 나온다.

 

달라이 라마를 한국에 초청해 온 국민들과 함께 생명ㆍ평화ㆍ행복의 메시지를 함께 나누기 위한 목적으로 달라이 라마 방한 추진회가 2013년 12월에 발족되었다. 해남 미황사의 금강스님, 여수 석천사의 진옥스님, 그리고 서강대의 박광서 명예교수가 공동대표를 맡았는데 서명 운동을 벌여 2017년까지 14만 명의 서명을 받았다. 방한 추진회는 그동안 여러 차례 다람살라를 방문하여 들은 달라이 라마의 법문을 엮어서 2017년 5월에 《한국인을 위한 달라이 라마의 인생론》이라는 책을 펴냈다.

 

달라이 라마의 한국사랑은 각별하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는 방한 추진회 순례단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언제든 여건이 된다면 다른 약속을 미루고서라도 한국에 먼저 가겠다.”

“한국에서 김치를 먹어보고 싶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참배하고 싶다.”

“한국의 지식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특히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를 떠나 인도로 망명하면서 가져온 티베트 대장경 3질 중 1질을 1967년에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달라이라마가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 방문은 불가능

 

2018년 가을에 티베트 임시정부는 방한 추진회에 공문을 보내어 달라이라마가 노쇠하여 건강상의 이유로 장거리 비행은 할 수 없게 되었고, 한국 방문은 불가능하다고 전해왔다. 공문을 받고서 방한 추진회는 해산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청전 스님과 작별하고 낮 1시 출발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택시로 다람살라 공항으로 갔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내려가는데 40분이 걸려 공항에 도착하였다. 자세히 보니 공항의 이름은 다람살라가 아니고 Kangra Airport라고 쓰여 있다. 델리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받고, 짐을 부친 후에 대합실에서 기다렸다. 점심이 마땅치 않아서 공항 매점에서 인도 라면을 하나씩 사서 뜨거운 물을 부어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12시 30분 쯤 되었을까? 갑자기 대합실에 있던 여행객들이 술렁거렸다. 그러더니 우리가 비행기에 실었던 짐이 다시 실려 나온다. 뭔가 돌발 사태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공항 직원에게 물어보니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비행기가 못 뜬단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짐을 찾고, 줄을 서서 여행사 직원에게서 비행기표를 환불받는다. 우리도 줄을 섰다. 직원은 현금으로 환불해주는 것이 아니고 비상사태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환불해 주겠다는 증서를 프린트하여 준다.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다람살라 공항 폐쇄

 

다람살라 공항은 폐쇄되었지만 델리 공항은 정상적으로 운행을 한단다. 외국인 여행객에게 당신들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았다. 다람살라로 다시 돌아가서 기다리겠다는 사람도 있고, 택시를 대절하여 10시간 달려서 델리로 가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밤 12시 30분에 델리공항을 출발하여 인천공항으로 가는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야 한다. 시계를 보니 이미 오후 1시 30분이다. 택시를 대절하면 비용도 만만하지 않을 것이고, 또 10시간 걸린다는데 비행기 출발 시간에 맞출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나는 퇴직하고 백수이기 때문에 다람살라에서 며칠 기다려도 괜찮지만, 병산은 3월 2일 개강 날자에 맞추어 반드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병산은 서울에서 다람살라까지 5,000km를 걸어온 순례자이다. 온갖 돌발 상황을 수없이 많이 겪었을 것이다. 나는 병산의 결정에 무조건 따르겠다고 말했다. 병산은 한참 동안 휴대전화(손말틀)로 이것저것 검색해 보더니,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가까운 캉그라(Kangra)로 간다. 캉그라에서 3시간 버스를 타고 호시아르푸르(Hoshiarpur)로 간다. 호시아르푸르에서 밤 10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9시간 타면 델리에 내일(2월28일) 아침 7시에 도착한다. 하루 종일 델리에서 기다리다가 밤 12시 30분에 출발하는 아시아나 비행기를 탄다. 그러면 우리는 예정보다 정확히 24시간 늦게 3월 1일 오전에 한국에 도착한다.

 

내가 그러자고 동의하니 병산은 휴대전화로 아시아나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중간의 기차표도 휴대전화로 예약을 했다. 버스표는 예약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아, 정말로 좋은 세상이다. 이 모든 것을 손바닥 크기의 작은 휴대전화로 해결한 것이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면 90분 만에 델리 공항에 갈 수 있었는데 변경된 코스를 따라서 택시, 버스, 기차, 릭샤를 타고서 18시간 만에 델리 공항에 도착하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둔 테러 단체가 인도에서 폭탄 테러를 일으켜 인도 사람들이 죽고, 인도는 보복으로 파키스탄 북쪽 국경 근처에 있는 테러 단체 훈련소를 공군기로 폭격하고, 파키스탄 공군기가 출격하여 공중전이 일어났는데 인도 조종사 한 명이 죽고 한 명은 포로로 잡혔단다. 두 나라 모두 핵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국제 사회가 긴장을 했는데, 다행이 파키스탄 정부에서 포로로 잡은 조종사를 곧 석방하고 타협을 해서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이 와중에서 분쟁이 일어난 지역에 가까운 인도 북서부 공항 4개가 안전상의 이유로 폐쇄되었는데, 다람살라 공항이 포함된 것이었다.

 

나는 달라이 라마를 만날 목적으로 인도에 왔을 뿐, 인도를 여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 유명한 타지마할도 보지 못했고, 바라나시에서 시체를 태우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국경 분쟁이 일어나 인도의 속 모습을 짧게나마 경험해 볼 수 있었다.

 

 

 

먼지가 풀풀 나는 낡은 시외버스를 3시간 타 보았고, 시끄럽고 느린 완행열차를 9시간이나 타 보았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하루 종일 시간이 남아서 우리는 예정에 없던 간디 기념관도 구경하고 한국 식당에 가서 김치도 먹었다. 델리의 거리에서는 구걸하는 거지도 보았다. 릭샤(동남아시아에서 주로 사람이 끄는 교통수단)도 타보았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다른 인도 여행기에 나오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쓰지 않겠다.

 

병산은 여행 체질이었다. 어떤 음식도 잘 먹고,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잤다. 털털거리는 버스 안에서도 병산은 휴대전화로 바둑을 두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었다. 나도 여행 체질이었다. 음식을 가리지 않았고, 어느 곳에서도 잘 잤다. 심지어는 열차의 좁은 2층 칸에서도 나는 잘 잤다. 이동 중에 지루하면 나는 작은 휴대용 녹음기에 저장해 둔 판소리를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었다. 버스 정류장이나 열차 대합실이나, 또는 공항에서 시간이 남으면 나는 틈틈이 <사피엔스>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