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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1895년 오늘 단발령 선포, 백성 저항에 부딪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209]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895년(고종 32) 오늘(11월 15일) 김홍집내각은 성년남자의 상투를 자르도록 단발령(斷髮令)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8월 20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처참하게 시해되어 반일의식이 한층 높아진 상태에서의 단발령은 백성 사이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습니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불감훼상(不敢毁傷) 효지시야(孝之始也)라”라는 말은 공자(孔子)가 제자인 증자(曾子)에게 해 준 말로 “너의 몸과 터럭(털), 그리고 살갗은 모두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감히 손상시키지 않게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니라.”라는 윤리의식이 뿌리 깊었던 유생들에게는 목숨을 내놓으라 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지요.

 

 

고종과 태자가 압력에 못 이겨 상투를 자른 뒤 학부대신 이도재(李道宰)는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상소하고는 대신직을 사임하였고, 정계에서 은퇴한 원로 특진관 김병시(金炳始)도 단발령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하였습니다. 한편, 유길준이 당대 유림의 으뜸 인물 최익현 선생을 잡아와 상투를 자르려 하자, 그는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단발을 단호히 거부하였지요. 또 미처 피하지 못해 강제로 상투를 잘린 사람들은 상투를 주머니에 넣고 통곡했으며, 단발을 두려워하여 문을 걸어 잠그거나 지방으로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자르는 대신 머리 자르기 전 초상 사진을 찍거나 초상화를 그려 안방 벽이나 출입문 위에 소중히 걸어놓는 것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이천의병(김하락)ㆍ제천의병(유인석)ㆍ강릉의병(민용호)ㆍ진주의병(노응규)ㆍ안동의병(권세연)ㆍ홍주의병(김복한) 등 온 나라 곳곳에서는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에 정부에서는 서울의 친위대를 파견하여 각지의 의병을 진압하고자 하였으나, 이 틈에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김홍집 등 일부는 살해되고, 유길준 등은 일본으로 도망가 온건개화파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말았지요. 아무리 “위생에 이롭고 일하기 편리하다.”는 그럴싸한 까닭을 내밀었지만 설득이 없는 강요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