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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할머니도, 아이들도 모두 아리랑을 부른다

한국에 가면 우리는 또 외국 사람
[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5]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김병화 박물관은 원래 김병화 농장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1974년에 김병화가 죽은 후 농장은 차츰 쇠퇴해졌다. 잇단 생산 목표 초과 달성에 판단력이 흐려진 중앙정부가 과도한 목표를 지시하기 시작했다. 아랄해 유역 상류의 사막화가 심해짐에 따라 수확량이 줄어들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목화 생산량이 소련 평균보다 낮아졌고 모범 농장이라는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렸다.

 

1991년에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한 이후 농업 정책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무료로 제공되는 땅에서 농사를 지어 수확량의 일부만 집단 농장에 내면 됐지만 이제는 농사를 지으려면 돈을 내고 땅을 빌려야 했다. 자연히 농사의 수익성이 떨어졌고 이농 현상이 심화되었다. 농토를 떠난 고려인들은 도시에서도 취직이 여의치 않아 살길을 찾아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연해주로 다시 되돌아가는 고려인들도 나타났다.

 

김병화와 고려인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소련 내에서의 고려인 이미지는 매우 좋았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근면하고 성실한 고려인은 매우 좋게 평가받는다고 한다. 1976년에 준공한 김병화 박물관에는 김병화가 사용한 집기와 가구들, 그리고 당시의 생활상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쪽에 작은 유인물이 여러 개 쌓여 있다. 박물관장님에게 하나 가져가도 되느냐고 물어보니 그러라고 한다. 표지에 <깔밭 위의 억척스러웠던 나날들 바삐 살았소, 구차하게 살았소>라고 긴 제목이 적혀 있었다. 박물관장이 직접 쓴 이야기와 다른 한 사람이 쓴 이야기가 실려 있는 16장짜리 소책자이었는데, 다른 책의 일부를 유인물로 만든 것이었다. 나중에 숙소에 와서 읽어 보니 그 소책자에는 아리랑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나온다.

 

“아리랑은 세상 알 때부터 들었다. 세상을 알게 된 때는 학교 들어가 고려말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때부터 아리랑이랑 도라지 알았다. 그때 할머니들이 아리랑을 불렀다. 어머니도 부르는 걸 들었다. 도라지, 아리랑, 북조선에서 들어온 노래가 많았다. 한국에서 들어오기 전에 북조선 사람 많이 다녔다.”

 

“아이들도 여기선 지금 아리랑을 다 부른다. 학교 수업에서도 ‘아리랑’, ‘고향의 봄’ 등을 가르친다. 아리랑은 슬픈 노래라고 생각한다. 먼길을 떠난 사람을 기다리다 보니 아마 슬프지 않겠나. 아리랑 하면 누구든지 떠나버린, 서로 그리운 그것이라고 본다. 여기 와 떨어져 따로 살며 조선이나 한국이나 내게 다 그립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난다... 고려 사람을 대표하는 노래는 아리랑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모여 앉으면 아리랑을 부른다. 잔칫날에 노래를 부르면 가장 먼저 아리랑을 부른다. 누가 먼저 ‘아리랑을 부르자. 다 모두 아는가?’ 그래서 ‘안다’ 하면 아리랑을 부른다. 왜 처음에 아리랑을 부르냐 하면 모두 다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아... 뿌리를 모르는 거는, 나는 지금 나이 먹었지요. 내 열세 살에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그러니 뭐 세상 모르지요. 그 담에 내 자라서 학교에서 일하며 보면 고려인들은 고향이 없고 모르고 그렇죠. 여기서 이 땅에서 우리 고려인들 어디메 또 쫒겨가겠는지 어쨌는지 생각해보면 ‘왜 이렇게 우리 아버지들 여기를 들어왔을까.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자기 땅에 있으면.... 중국도 나오지 말고 조선 땅에 있으면. 그랬으면 나도 그렇고 우리 애들도 고향에 있으면 애들 낳고 태어나고 이러면 지 고향이 있겠는디.

 

’우리는 여기와 이렇게 천하게 생활한다.’ 그 마음이 내게는 있어요. 고생한 건 아버지 탓이라. 내 생각엔 그랬어요. 아버지도 아니 왔으면 나도 조선에서 살고 한국에서 살 수 있지요. 어떻게 생활하든지 우리 부모, 그 전에 할아버지, 아버지 그 고향에 있을 수 있죠.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이 내 고향이오. 내 여기 와서 태어났으니까. 그래도 내 고향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한국에 가면 우리는 또 외국 사람이 되지요. 내 외국 사람이죠. 그렇지? 허허. 코 같고, 눈 같지만 또 딴 사람이지. 우리 교육받는 건 우즈벡 문화, 러시아 문화, 우리 고려 문화 다 배웠어. 우린 무슨 사람이 됐는지 몰라요. 허허. 글쎄 한국 사람 보고, 조선 사람 보면 마음이 쓸쓸해요.”

 

마지막 부분이 가슴을 울린다. 남의 나라에 와서 살지만 뿌리를 잊지 못하는데 한국에 가면 외국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남한 사람을 보거나 북한 사람을 볼 때면 “마음이 쓸쓸하다”는 고려인의 심정을 우리는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박물관장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타쉬켄트로 돌아올 때는 버스와 택시를 탔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근처에 있는 한식당에서 제대로 된 김치찌개를 먹었다. 식당 주인은 한국 사람이었다. 식당 주인과 이야기해 보니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은 앞으로 경제적인 협력과 교류가 더욱 활발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