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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말의 피를 빨아 마시며, 세계를 정복한 칭기즈칸

‘영웅’이란 낱말의 뒷면, 전쟁서 죽은 수많은 병사의 원혼 서려
[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8]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칭기즈칸은 그의 손자 대에 이르러 중국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유럽까지를 포함하여 문명 세계의 거의 전부를 지배하였다. 몽골 초원의 유목민족이 세계 역사상 가장 큰 나라를 건설한 것이다. 그들이 지배한 면적은 현재 중국의 3배 규모였다. 당시 몽골 본토의 인구는 100만 명에 불과했지만, 점령지의 인구는 약 1억 명이었다. 이러한 1당 100의 정복과 통치가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대해서 서양 학자들은 많은 연구를 하였다.

 

 

1927년에 영국의 전략사상가 리델 하트가 쓴 책 《위대한 지휘관들을 벗긴다》에서는 몽골 군대 승리의 비결을 한 마디로 간편성(Simplicity)이라고 표현하였다. 몽골 군대는 보급 부대가 따로 없는 전원 기병의 군대이었다. 기병 한 사람이 말을 4~5마리씩 몰고 다니면서 비상식량이나 물통으로 활용했다. 사막을 건너갈 때는 물 대신 말의 피를 빨아 마셨다.

 

《맛있는 세계사》 (2011년 주영하 저)에 따르면 미국의 대표적인 간편식인 햄버거는 몽골 군대의 전투 식량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았던 몽골인과 타타르족은 유목민이다. 평상시에는 이동식 천막을 치고 가축을 키우며 요리를 해먹을 수 있지만, 장거리 이동을 할 때는 양을 잡아 고기를 잘게 썰거나 갈아서 덩어리로 만들어 말안장에 넣어 보관했다가 먹었다고 한다. 생고기 덩어리는 질겨서 요리하지 않으면 먹기가 어렵다. 그러나 갈아 다진 고기는 바로 먹을 수 있다. 특히 말안장에 넣어 장거리를 달리면 충격으로 고기가 다져지며 연하고 부드러워진다. 동시에 말의 체온 덕분에 고기가 숙성되어 맛도 좋아진다.

 

칭기즈칸 사망 후에 손자인 쿠빌라이 칸이 모스크바를 점령한다. 정복자의 문화는 빠르게 퍼져 나갔다. 러시아인들은 몽골 음식인 다진 날고기에 양파와 계란을 섞어서 서양식 육회를 만들어 먹으면서 ‘타타르 스테이크’라고 불렀다. 타타르는 몽골인과 함께 러시아를 점령한 터키계 민족으로 우리가 돌궐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타타르 스테이크는 14세기 이후 러시아를 거쳐 독일로 전해지는데 그 중심지가 당시 독일의 무역항, 함부르크였다. 함부르크 사람들이 날고기를 먹는 대신 불에 구워 먹은 것이 함부르크 스테이크의 원조이고 이것이 이민자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햄버거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태너힐이 쓴 《음식의 역사》(2006)에 따르면 몽골군이 장거리를 이동할 때 준비한 다른 전투 식량은 살아 있는 말의 피였다. 몽골 기병은 열흘 정도의 원정을 떠날 때 여러 마리의 말을 줄로 엮어 끌고 다녔다. 수시로 말을 갈아타면 말들이 지치지 않고 계속 달릴 수 있다. 또한, 말의 피를 식량으로 쓸 수 있다. 이동 중 쉴 때 몽골 기병은 말의 정맥에 상처를 내어 피를 빨아 마셨다. 한 마리당 0.5리터의 피를 마실 수 있는데, 말을 바꿔가면서 피를 마시면 말도 상하지 않고 병사의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칭기즈칸 군대의 속도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다진 생고기와 ‘말의 피’라는 간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급 부대가 따로 없는 몰골 기병의 이동 속도는 농경 민족의 군대보다 4~5배나 빨랐다.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서 몽골 군대는 갑옷도 가볍게 만들었다. 창과 방패로 중무장한 유럽의 기사를 상대로 싸울 때 몽골 군대의 고전적 전법은 200~300미터 거리에서 활로써 집중사격을 하여 혼란에 빠뜨린 다음 돌격하는 것이었다. 몽골 병사는 달리는 말에서 몸을 말의 배에 밀착시키고 활을 쏘았다.

 

몽골의 지도자들은 전쟁은 무자비하게 했지만, 통치는 너그럽게 했다. 그들은 피정복 민족의 종교나 언어를 금지하지 않았다. 피정복지 사람들은 세금만 잘 내고 반란만 일으키지 않으면 많은 자율권을 누릴 수 있었다. 몽골의 통치자들은 유교, 불교, 이슬람, 기독교를 다 인정하였다.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몽골제국에서 동서양의 교류는 활발했고 무역 또한 발달하였다.

 

우리는 레기스탄 광장을 구경하다가 유럽 관광객들을 만났다. 나는 모처럼 영어도 연습할 겸 말을 걸었더니 생명탈핵실크로드에 대해서 관심을 보인다. 병산과 나는 전단지를 한 장씩 나누어 주고 열심히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설명하고 또 새로운 UN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설명에 적극적으로 공감한다면서 좋은 일을 한다고 칭찬까지 해주었다. 우리는 깃발을 들고 관광객과 같이 사진을 찍었다.

 

 

레기스탄 구경을 하고서 티무르 묘지까지 1km 거리를 걸어갔다. 티무르(1336~1405)는 중앙아시아는 물론 인도와 페르시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았다. 티무르는 몽골제국의 부활을 주장하고 칭기즈칸의 후예를 자처한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 가운데 한 명으로, 중앙아시아에서는 지금도 영웅 대접을 받는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거의 구국의 영웅으로 숭상되는데, 침략을 받은 중동이나 인도에서는 살육자 또는 문명 파괴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티무르 묘지에는 티무르 제국의 다른 임금들의 관이 함께 있었는데, 티무르의 관은 다른 왕과는 달리 검은색이었다.

 

 

 

캐나다의 스티븐 핑커 교수는 세계사에서 사망자가 많이 난 사건들을 조사하였다. 이 조사에 따르면 몽골제국 정복 전쟁에서 칭기즈칸부터 손자 대까지 3대에 걸쳐 4,000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핑거 교수는 티무르가 30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무려 1,700만 명을 죽인 것으로 추산한다. 티무르는 천재적인 군사 전략과 솔선수범하는 지도력을 바탕으로 외국과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하였다. 그렇지만 티무르는 전쟁에서 적이라면 투항하든지 저항하든지 모두 죽였기 때문에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를 잔인한 학살자라고 평가한다. 티무르는 칭기즈칸과는 달리 이슬람을 제외한 어떤 종교도 용납하지 않았고 때로는 적국의 이슬람교도까지도 모두 죽였다.

 

세계사에서 영웅이라고 부르는 정복자들은, 알렉산더 칭기즈칸, 티무르, 나폴레옹처럼 모두 적군을 많이 죽였기 때문에 영웅 칭호를 받지 않았는가? ‘영웅’이라는 낱말의 뒷면에는 전쟁에서 죽은 수많은 병사의 원혼이 서려 있다고 생각하니 영웅이라는 말 자체가 싫어진다.

 

사마르칸트역에서 저녁 기차를 타고 타쉬켄트로 돌아와 숙소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되었다. 오늘은 매우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