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밝은 달밤이다.
실실이 천만오리 달빛은 창문 커튼 사이로 쏟아져 내려 방안은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훤하다. 자리에 누운 나는 이리뒤척 저리뒤척 도무지 잠을 청할 수 없다. 참으로 그저 잠들기에는 아까운 달밤이니 말이다.
나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들창을 열었다. 달빛은 기다렸다는 듯이 방안을 넘쳐나게 뛰어들었다. 낟알 익는 구수한 향기가 바람결에 안겨왔다. 나는 창턱을 짚고 달빛이 꽉 찬 하늘땅을 둘러보다가 은파도를 일구며 굽이쳐간 듯이 새하얀 달빛을 비껴안고 줄기줄기 뻗어간 아득한 산마루에 눈길을 얹었다.
이때 어디서인가 가슴을 흔드는 은은한 단소 소리가 교교한 달빛을 타고 울려오는 듯하였다. 선경에서나 울려오는 듯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향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환각이었다. 나는 얼결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달 밝은 밤이면 언제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 은은한 단소 소리였다.
내가 이런 환각을 가지게 된 것은 지난 여름부터였다. 그때 나는 도거리호*들의 논전간관리*에 대한 경험을 취재하려고 원봉벌로 갔댔다. 그날도 이 밤처럼 달 밝은 밤이었다. 낮에 취재하였던 자료들을 다 정리하고 자리에 누운 나는 창가에 기웃이 걸린 둥근달을 마주 보며 래일의 취재방안을 이리저리 궁리해보았다.
그런데 어디서인가 맑고도 은은한 단소 소리가 산들바람을 타고 달빛에 실려왔다. 귀를 기울일수록 심금을 더욱 울려주는 청 맑은 단소 소리였다. 한 가슴 깊은 곳에 절절한 회포를 자아내듯 은은히 울려오는 아름다운 그 단소 소리는 끝내 나더러 웃옷을 걸치고 하숙집 문을 나서게 하였다. 밤바람에 실려오는 그 단소 소리를 찾아 논뚝길에 올라섰다. 논판*으로 흘러드는 도랑물도 그 음향을 깨뜨릴까 봐 저어하듯 조용히 조잘대며 벼포기 사이를 감돌아 흘렀다.
나도 그 어떤 신비한 세계로 이끌려가듯 마음이 숭엄해지며 발걸음소리가 날세라 이슬 맺힌 풀들을 가볍게 저겨디디며* 논뚝길을 걸었다. 그러던 나는 무춤* 멈춰 섰다. 바로 눈앞의 멀지 않은 곳에 한 처녀가 버드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하도 밝은 달밤이어서 짧은 꽃치마 위에 새하얀 적삼을 받쳐입은 처녀의 외태머리*도 뚜렷이 안겨왔다.
단소 소리는 바로 그 처녀의 눈앞 멀지 않은 곳의 논두렁 위에서 울려오는 것이었다. 기다란 버드나무 삽자루가 달빛 속에 깃대처럼 꽂혀 있고 그 옆에 한 젊은이가 자기마저도 그 아름다운 음향에 취해버린 듯 두 발을 논물에 잠근 채 단소를 불며 앉아있었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무성한 벼들이 아득히 펼쳐진 논벌*, 그 위에 둥실 뜬 보름달, 진주 이슬을 반짝이며 하느적이는 벼 잎파리, 불끈 걷어 올린 신다리*를 간지럽히는 도랑물, 낮에 구슬땀을 뿌리고서도 제 보살피는 벼가 보고 싶어 나온 젊은이…
그리고 밤이슬을 받으며 버드나무 밑에 취해서 있는 아름다운 처녀! 이는 완전히 매혹적인 한 폭의 그림이었다. 세계의 그 어느 명화라 하여도 이처럼 아름다운 화폭은 그려낼 것 같지 않았다.
그 후부터 달 밝은 밤이면 하냥 그 은은한 소리가 귓전에 울려오는 듯싶었고 그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포근한 달빛 속에 펼쳐지는 듯싶었다. 아, 지금 이 달빛 속에 젊은이의 단소 소리에 춤을 추던 그 여름밤의 벼포기들은 저마다 묵직한 황금이삭을 드리우고 설레이리. 달빛이 머리 빗는 저기 저 아득한 산을 너머 끝없이 펼쳐진 원봉벌 한복판에서 젊은이는 지금 단소를 불고 있지 않을까? 버드나무 밑에 섰던 그 처녀는 이 밤에 또 안타깝게 버들잎을 훑으며 그 아름다운 음향에 취해있지 않을까!
아니, 아니야, 그 총각은 벌써 밤이슬을 받는 처녀의 순결한 마음을 찾아내었을 것이야, 그들은 정답게 손을 잡고 달빛이 부서지는 벼파도를 둘러보며 행복에 취하여 논뚝길을 걷고 있을 거야.
아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아, 그래도 그 여름밤의 논두렁에서 총각은 단소를 불고 처녀는 봄언덕 같은 총각의 어깨에 기대여 정 깊은 그 아름다운 음향에 취해 은빛 보름달을 쳐다보고 있을 거야…
아, 잊지 못할 달밤의 단소 소리여, 아름다운 화폭아!
<낱말 풀이>
* 도거리호 : 1980년대 초반, 중국 개혁개방이 처음 실시될때 토지와 농기구를 농민 개인에게
도맡겨 개인영농이 실현되던 제도
* 논전간관리 : 벼논벌의 수로 등 관리
* 논판 : 논을 이루고 있는 땅
* 저겨디디다 :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옮겨 디디다
* 무춤 : 놀라거나 어색해서 하던 짓을 갑자기 멈추는 모양
* 외태머리 : 주로 처녀들이 한 가닥으로 땋아 늘인 머리
* 논벌 : 주로 논으로 이루어진 넓고 평평한 땅
* 신다리 : 넓적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