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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 서구가 만든 거짓말

타밈 안사리의 책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일고
<생명탈핵 실크로드 14>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호텔 식당에서 양식으로 아침 식사를 간단하게 먹었다. 오늘은 마침 일요일이기도 하고 또 계속 강행군을 한 것 같아서 나는 하루 쉬겠다고 병산에게 말했다. 씩씩한 병산은 깃발과 팜플렛을 가지고 혼자서 시내 관광을 나섰다. 병산은 60을 넘은 노교수이건만, 꿈이 많은 그는 아직도 활력이 넘친다. 요즘 사람들은 영양도 좋고, 또 몸 관리를 잘해서 옛날 사람에 견주면 자기 나이에 0,8을 곱한 나이가 건강 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옆에서 보기에 병산의 건강 나이는 0.7을 곱해야 맞을 것 같다.

 

나는 하루 쉬면서 타밈 안사리의 책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읽었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는 아랍어이며, 영어로는 Mahomet)는 아라비아반도 홍해 연안에 있는 국제도시 메카에서 서기 570년 무렵에 태어났다. 태어난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는데, 그 당시에는 아무도 무함마드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함마드의 아버지는 가난했으며 그는 유복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무함마드가 여섯 살 때 죽고, 그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할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삼촌이 길렀다. 어린 시절 무함마드는 고아들이 겪는 모욕과 멸시를 피할 수 없었다. 이처럼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무함마드는 과부와 고아가 겪는 아픔에 평생 관심을 기울였다.

 

성장한 무함마드는 부유한 미망인 사업가 카디자의 눈에 들어 그녀의 캐러밴과 상단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다가 25살인 무함마드는 15살 연상인 카디자의 청혼으로 결혼을 했고 25년 동안 다정한 동반자로 살았다. 당시 아라비아는 일부다처 사회여서 아내를 한 명만 두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무함마드는 카디자가 살아 있는 동안 다른 아내를 두지 않았다.

 

경건한 무함마드는 1년 중 일정 기간 메카 교외 산중에 들어가 명상과 기도로 시간을 보내는 습관이 있었다. 나이 40이 되던 610년 어느 날 밤, 히라 산의 동굴에서 무함마드는 영적 체험을 했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전하는 신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그는 자기가 받은 계시를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사명이 주어졌다고 확신하고 613년에 전도를 시작하면서 이슬람교가 시작되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다신교를 믿으며 기득권을 누리던 부족의 지도자들은 622년 9월 어느 날 그를 암살하기로 모의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정보를 미리 알고서 메디나로 도망쳤다. 소수의 무슬림들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이 사건을 히즈라라고 한다. 이슬람에서는 히즈라를 계기로 세계 역사가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슬람 달력은 히즈라를 기원으로 삼고 역사를 히즈라 이전(BH)과 히즈라 이후(AH)로 나눈다. 그러니까 서기 2020년은 이슬람 달력으로는 1398년이 된다.

 

무함마드는 62살이 되던 서기 632년에 병이 들어 메디나의 자택에서 애처 아이샤의 무릎에 머리를 얹은 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주검은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오늘날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의 모스크’에 묻혀 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이슬람교의 핵심은 매우 간단하다. 오직 알라(Allah)만이 유일신이며 나머지는 모두 그 신의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알(Al)은 아랍어의 정관사이며 라(lah)는 신을 뜻하는 ‘일라(ilaah)’를 줄인 말이다. 그러므로 알라는 The God 곧 유일신을 말한다. 이 유일신은 어떤 특정 형상이나 특정 속성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신이다. 이슬람에 따르면 성서에 나오는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예수는 모두 알라신을 전하는 예언자였는데, 무함마드는 마지막 예언자로서 더는 예언자는 없다고 한다.

 

안사리의 주장에 따르면 이슬람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관용적인 종교라고 한다. 그 증거로서 2대 칼리프인 우마르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우마르는 기독교인들이 지배하던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우마르가 교회에서 무슬림식 예배를 올릴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우마르는 교회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우마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내가 그렇게 하면 조만간 무슬림들은 그 일을 핑계 삼아 그 건물을 차지해 모스크로 바꾸려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무슬림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너희는 지금까지처럼 살고 너희가 원하는 대로 신을 숭배하라. 다만 이제부터 우리 무슬림들이 너희와 살아갈 것이며 우리 방식대로 신을 숭배할 것이며 더 나은 모범을 보일 것이다. 너희가 보고 마음에 든다면 우리에게 합류해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대로도 괜찮다. 알라가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무하마드가 메디나에 정착한 뒤 정복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정복과 개종은 따로 이루어졌다. 칼에 의한 개종은 없었다. 무슬림들은 정치적인 권력은 가졌지만 정복민에게 무슬림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일정한 세금만을 내도록 했다. 무슬림 군대가 획득한 전리품의 4/5는 병사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다. 사령관이든 보병이든, 장군이든 일병이든 차등 지급은 없었다.

 

전리품 중 1/5은 메디나의 국고로 들어갔다. 무함마드 시대에 그 돈은 대부분 바로 빈민에게 분배되었다. 우마르 시대에는 이 정책이 약해지긴 했어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이슬람이 빠르게 확장하게 된 현상을 설명해준다. 무슬림 군대가 지나간 곳에서는 이러한 이슬람 문화가 전파되었다.

 

안사리의 주장은 내가 세계사 시간에 배운 내용과 다르다. 내가 배운 이슬람은 ‘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칼‘을 들고서 기독교도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호전적인 종교였다. 정말 그러한가? 이 말은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이슬람 원정에서 최후의 패배를 당한 시기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처음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코란에는 이런 문구가 없다. 비슷한 문구가 있기는 한데, 한 손에 코란까지는 맞지만 한 손에 칼이 아니라 카렘이다. 아랍어로 ’Karem‘은 연필이나 붓 혹은 문서 등을 총칭하는 단어라고 한다. 곧 쿠란에는 '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연필'이라는 표현이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코란 2:256에는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암흑 속에서부터 구별되느니라."라고 쓰여 있어서, 이슬람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다른 종교를 존중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슬람은 선교나 포교 행위를 금지하는 종교이며, 이슬람 이전에 등장한 기독교에 관해서는 코란에 "무슬림과 기독교는 가장 가깝다. 너희는 기독교인을 보호하라."라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최근에 뉴욕의 9.11 사건이나 시리아의 IS 등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폭력과 테러가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였지만, 테러는 이슬람 종교에 내재된 문제가 아니라 이슬람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세력들의 문제라고 보아야만 한다. 피상적으로 이슬람과 테러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외대 이란어과 교수이자 이슬람 문화 연구소 소장인 신양섭 교수가 쓴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 서구가 만든 추악한 거짓>이라는 제목의 글을 소개한다.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 서구가 만든 추악한 거짓> 읽으러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