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미국의 해양생물학자인 레이첼 카슨(R. Carson, 1907~1964)은 1962년에 《침묵의 봄 (Silent Spring)》이라는 책을 써서 그때까지 ‘신이 내린 살충제’라는 찬사를 받던 DDT가 생태계에 예상치 못한 피해를 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책의 내용은 인간이 식량증산을 위해 DDT 같은 농약을 만들어서 해충을 죽이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해충뿐만 아니라 이로운 곤충도 죽고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따라 죄 없는 새들도 죽을 것이라는 예언서 같은 내용이었다. 이 책은 미래 어느 날, 산골 마을에 봄이 왔지만 새우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침묵의 봄이 나타날 것이라고 암울한 예언을 하였다.
<그림1> 《침묵의 봄 (Silent Spring)》 책과 지은이 레이첼 카슨(R. Carson)
카슨이 알기 쉽고 서정적인 문체로 쓴 이 책은 100만 부 이상이 팔리고 전 세계 16개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책이 나오자 농약 회사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하여 격렬하게 카슨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이 책을 읽고서 1963년에 백악관에 “환경문제를 다루는 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1970년에는 미국 행정부 내에 환경보호청(EPA)이 설립되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미국보다 10년 늦게 1980년 환경청이 출범하였는데, 1994년에 환경부로 승격되었다.)
《침묵의 봄》은 생태학이라는 과학 용어를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전 세계적으로 환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아직도 환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고 있다.
이 책이 나온 지 10년 만인 1972년에 미국의 환경보호청에서는 해충 박멸을 제외하고 전면적으로 DDT 사용을 금지한다는 발표를 한다. 그렇지만 사용금지 조처가 내려진 뒤에도 일부 미국 기업들은 DDT를 수출용으로 생산하였다. 그러다가 2004년에 151개 나라가 서명한 스톡홀름 협약을 통해 세계 각국은 DDT를 포함하여 독성이 강한 잔류성 살충제 12종을 국제적으로 규제할 것을 동의하게 된다. 2007년에는 중국마저 DDT 생산을 중단하고, 오직 인도와 북한에서만 아직도 DDT를 연간 3,000만 톤 생산하고 있다.
DDT는 양날의 칼과 같다. DDT는 지금에는 해로운 살충제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1939년에 DDT를 합성한 독일의 대학원생 밀러는 1944년에 노벨상을 받을 정도로 인류에게는 고마운 살충제였다. DDT는 2차 세계대전 중에 군인들 사이에 발진티푸스를 전염시키는 이의 구제에 사용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DDT는 농약으로 사용되어 식량 증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DDT는 값싸게 다량으로 합성할 수 있으며 모든 종류의 해충을 죽이는 데 효과적이었다. 농부는 해충의 종류와 관계없이 DDT만을 사서 모기, 개미, 진드기, 멸구 등 모든 성가신 곤충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DDT는 물에 녹지 않고 잘 분해되지 않으며 지속성이 있어서 작물의 전체 생장 동안에 살충 효과를 발휘하였다.
DDT는 열대 지방에서 말라리아모기를 죽이는 데도 사용되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1943년에 말라리아 환자가 800만 명 이상 발생하였는데, DDT 사용으로 1958년에는 불과 800명으로 줄었다. 인도에서는 1935년에 말라리아 환자가 1,000만 명 이상 발생하였지만, DDT 사용으로 1969년에는 28만6천 명으로 대폭 줄었다. ‘말라리아와 싸우는 아프리카인’이라는 모임의 회장인 리처드 트렌은 “DDT를 조금 사용하느냐 전혀 사용하지 않느냐에 따라 하루에 개발도상국 국민 수천 명의 생사가 갈린다.”라고 호소하였다.
말라리아가 창궐하기 좋은 지리적 환경에 있는 나라들에서 DDT 사용은 절박한 생사의 문제이며 DDT 사용을 금지한다는 것은 매우 비인도적이다. 새의 노랫소리를 듣기 위하여 사람이 말라리아로 죽는 것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여 세계보건기구는 DDT를 금지한 뒤 2년 만인 2006년에 DDT의 재승인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림2> 말라리아 발생 지역
DDT가 아무리 강력해도 지구상에서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수억 년 동안 살아온 해충을 전멸시킬 수는 없었다. 해충은 시간이 지나면 내성(耐性)을 기르게 되고 농약의 효력이 점점 떨어진다. 어느 농약이나 일단 사용하기 시작하면 수년 간격으로 사용 농도를 높여야 하며 마지막에는 효력이 없어지고 만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화학자들은 더욱 강력한 BHC, 말라치온 등의 새로운 농약을 합성하였으나 해충은 전멸되지 않고 농약의 사용량은 늘어만 간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90마일 떨어진 아름다운 클리어 호수는 1940년대 후반까지 2,000마리가 넘는 농병아리가 서식하였으며 낚시꾼과 소풍객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이었다. 그러나 1957년 이후 농병아리가 알을 낳아도 껍질이 얇아서 깨져 버리고 부화가 되지 않았다. 1960년에는 단지 30쌍의 농병아리가 관찰되었으며 농병아리의 주검이 자주 발견되었다.
과학자들이 죽은 농병아리를 조사해보니 몸에서 DDT가 검출되었다. 자세히 추적해보니 행정 당국에서는 낚시꾼을 괴롭히는 각다귀 벌레를 없애기 위해 1949년에 물 7,000만에 농약 1의 비율(0.014 ppm)로 DDT를 뿌렸다. 각다귀는 사라지는 것 같았으나 얼마 뒤에 다시 나타났다. 당국에서는 1954년과 1957년에 다시 비슷한 농도로 호수에 농약을 뿌렸다. 죽은 농병아리의 몸에서 측정된 농약의 농도는 1,600ppm(우리가 익숙한 %로는 0.16%)이었는데, 호숫물에 견주면 농약은 11만 배 이상으로 높은 농도가 검출된 것이다.
농병아리는 왜 죽게 되었는가? 농병아리의 죽음은 생물농축(生物 濃縮)이라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DDT는 물에는 녹지 않으나 지방(脂肪)에는 녹으며 지속성을 가진다. 농약은 지방에 녹기 때문에 호수에 살포한 농약은 플랑크톤의 세포질에 흡수된다. 농약은 쉽게 변하지 않으므로 계속 흡수되면서 플랑크톤 몸에 농축된다. 농축된 농약은 먹이사슬을 따라 플랑크톤에서 작은 고기를 거쳐 농병아리의 몸으로 이동하고, 최종적으로 농병아리의 체내 지방이 있는 곳에 축적된 것이다.
DDT가 농병아리를 죽였다면 사람은 어떠한 영향이 있을까? 인간은 먹이사슬의 가장 위 단계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각종 농약에 오염된 식품을 먹고서 고농도의 생물농축이 이루어진다. 곡식, 푸성귀(채소) 등에 농약을 살포하지 않더라도 토양에 잔류한 농약이 결국 작물에 흡수되고 인체에 들어오며 모체에서 태아로 이동할 수도 있다.
1991년에 조사해보니 세계 각국 사람의 지방조직 속에서 농약이 검출되었다. 농약은 미국과 브라질, 인도 등의 농촌 지역에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농사를 짓지 않는 북극의 에스키모인 그리고 남극의 펭귄에게서도 검출되었다. 물에 잘 녹지 않는 농약이 빗물에 섞여 농토에서 하천으로 이동한다. 하천은 바다로 유입되고 농약은 해류를 타고 남극과 북극까지 이동한 것이다.
강원도 평창에 살면서 나는 농부들이 농약을 살포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옆집에 사는 농부가 농토 주변에 나는 잡초를 죽이기 위하여 제초제를 뿌리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생업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이 농약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농촌에서 살아본 사람은 쉽게 동의할 것이다. 배추밭에서 농약을 쓰지 않으면 배추를 수확기 어렵다. 과수원에서 농약을 쓰지 않으면 사과를 수확할 수가 없다. 2019년 현재 77억으로 불어난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부작용을 알지만, 농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농약 문제에 관해서는 과학적인 해결책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과학자들이 분해성 농약, 천적을 이용한 방제, 미생물을 이용한 방제, 호르몬을 이용한 방제 등을 연구하여 생태계에 피해를 적게 주고 해충을 통제할 방법을 빨리 개발하기를 바랄 뿐이다.
아름다운 우리나라 산과 들에서 올봄에도 새의 노래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를 비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