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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오죽헌에서 만난 ‘황기로’

매화와 같은 고결한 삶을 살아야 하는 까닭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173]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지난 늦가을 강릉의 오죽헌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말은 많이 듣고, 그 앞을 지나간 적도 있지만 들어가 본 적은 없기에 사실상 처음 방문이다. 오죽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필자보다 더 잘 알 테니 설명은 그야말로 사족일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기념관에 갔다가 깜짝 놀란 발견을 했다. 바로 황기로의 글씨가 전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렇구나. 광초(狂草)로 알려진 황기로의 서예 필치를 여기 오죽헌에서 보다니. 과연 그의 필은 거침이 없다. 낙동강 물을 검게 물들이며 연습한 초서 아니던가?

 

 

이미 알려진 대로 황기로는 경북 선산 사람이고 그곳에 그의 유적이 있다. 곧 매학정이란 정자가 그것이다. 이 매학정의 사연이 꽤 가슴 아픈 얘기다. ​

 

선비들의 나라라 할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선비들이 가장 통탄하는 일은 조광조를 탄핵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 일일 것이다. 조선 중종에 의해 발탁된 조광조는 선비들의 이상인 도학정치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급격한 개혁에 따른 훈구공신들의 반격으로 기묘사화를 당해 능주로 귀양 가고, 한 달 만에 사사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조광조를 탄핵하는 데 가담했던 인물로 선산 출신의 황계옥(黃季沃)이란 사람이 있었다. 맨 처음 황계옥은 조광조가 옥에 갇히자 그를 구해야 한다고 몰려갔다가 모임의 주동자의 하나로 붙잡혀 옥에 갇히었는데, 옥에 갇힌 뒤에는 태도를 돌변해 조광조 등 8명을 빨리 죽이라는 상소를 올린다. 나중에 조광조가 복권된 이후 이 같은 황계옥의 태도는 사림의 지탄의 대상이 된다.

 

황계옥의 아들로 황기로(黃耆老)가 있었다. 기로는 14살에 진사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재주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이 같은 행각을 듣고는 과거로 나갈 생각을 아예 포기한다. 아버지의 불명예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글씨를 쓰며 살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 황필이 만년에 휴양지로 삼았던 낙동강변에 ‘매학정(梅鶴亭)’이란 이름의 정자를 짓고 그곳에 은거하며 시를 짓고 글씨를 쓰며 보낸다.

 

 

매학(梅鶴)이란 말은 원래 송나라의 임포(林逋, 967~1028)라는 사람에게서 나왔다. 임포는 당시의 황제 진종(眞宗)이 좌도(左道, 유교에 어긋나는 사교)에 빠져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이를 싫어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고향인 항주 서호(西湖) 변 고산(孤山)에 집을 짓고 집 주위에는 매화를 심고 학을 키우며 홀로 살며 ‘매화를 처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아(梅妻鶴子)’ 일생을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황기로도 이런 풍도를 되살려 뒷산을 고산(孤山), 정자를 매학정(梅鶴亭)이라 이름 짓고는 그곳에서 은거했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 초서(草書) 공부해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그의 초서는 이전의 왕희지나 왕헌지와는 다른, 당나라 때 장욱(張旭)과 회소(懷素), 명나라 때 장필(張弼) 등이 즐겨 구사했던 예술적 초서체를 종합해 보통 사람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휘갈겨 쓴 이른바 광초(狂草)라는 독특한 서체를 구사함으로써 마침내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성취해 조선의 초성(草聖)이라 일컬어졌다고 한다.

 

 

황기로가 살던 곳은 경부고속도로 구미 나들목을 빠져나가서 선산군 해평면 쪽으로 약 20분 정도 자동차로 달려가서 만나는 낙동강 변에 있다. 원래의 정자는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1654년 옥산의 증손 학정(鶴汀) 이동명(李東溟)이 중건하고 1675년 그 옆에 귀락당(歸樂堂)을 지었다.

 

황기로는 아들이 없고 딸만 하나 뒀는데, 그 딸을 평소 교분이 있던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동생 옥산(玉山) 이우(李瑀)와 혼인시켰다. 이우는 율곡 집안의 여러 형제 가운데 누이 이매창(李梅窓)과 함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예술적 재능을 가장 정통으로 계승했으며, 글씨뿐만 아니라 시와 그림 거문고 연주까지 모두 탁월해 시서화금(詩書畵琴)의 사절(四絶)로 유명했다.

 

황기로는 이런 이우의 재능을 사랑해 그를 사위로 맞이했으며, 매학정을 포함한 일대의 터전도 모두 사위에게 물려줬다. 그래서 황기로 사후 매학정과 그 일원은 덕수이씨 이우 집안의 터전이 됐다.

 

 

42살 때의 황기로의 면모는 그를 만난 사돈 율곡 이이(1536~1584)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율곡은 23살 때였는데, 안동 예안(禮安)으로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찾아가 뵙고 학문을 묻고 돌아오는 길에 매학정에 들른 것이다. 그에 따르면 황기로는

 

'빈 뜰에 매화송이 피어오르고

깊은 못에서는 학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10여 리 떨어진 곳에서 텃밭을 일구는 신선'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글씨를 하도 써서 낙동강물이 검게 변할 정도였다고 하며 그의 글씨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자 하루에도 수백 장을 써서 피곤함을 감당하기가 힘들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율곡의 아우인 옥산 이우는 매학정의 풍경을 이렇게 읊는다.

 

君問我家何處住 그대가 내 집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依山臨水掩荊門 산 의지하고 강물에 임해 사립문 닫힌 곳이지

有時雲淡沙場路 때로는 구름 맑아 모래밭에 있노라니

不見荊門只見雲 사립문 보이지 않고 다만 구름만 보이네

 

 

엄밀히 말하면 황기로는 율곡과는 직접 관련이 없고 율곡 동생의 장인이었기에 굳이 이곳 오죽헌에 그의 글씨나 사적이 전시될 이유는 없겠지만 기념관 안에 율곡의 동생인 이우, 그리고 누이인 매창의 관련 유물도 전시되어 있기에 굳이 아니라고 할 이유는 없다고 하겠다. 그러기에 남쪽 멀리 낙동강 변에 살아온 황기로의 이야기를 이곳 강릉 오죽헌에서 듣고 그의 필적을 보는 것은, 여행의 또 다른 부수적인 맛일 것이다.

 

 

다만 오죽헌에서 만난 황기로와 매학정 이야기를 꺼내 보는 것은, 매학정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율곡과의 인연을 말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고, 한 사람의 행적에 관한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우리는 황기로의 삶을 더듬어보면서 그의 아버지인 황계옥의 삶이 업경(業鏡, 지옥의 염마왕청에 있다는 거울)에 비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는가?

 

그렇게 비친, 선비세계에서 보면 지조를 꺾고 불의에 앞선 굴절된 모습은 그의 아들에게 평생의 짐이 되어, 관직에 나가지도 못하고 시골에 남아서 글씨를 쓰고 마는 삶으로 나타났고, 그 글씨도 보통의 해서(楷書)나 행서(行書)가 아니라 초서(草書), 그것도 미친 듯이 휘갈기는 광초(狂草)에 빠지게 한 것이 아닌가? 그가 왜 그처럼 휘갈겨 쓰는가를 생각해 보면 마음속의 분노와 회한(悔恨)을 대신 삭이려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들의 삶의 방향과 행적은 중요한 것이다. 자신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까지 길게 길게 그 결과와 영향력이 이어지는 것이므로 우리의 삶을 올바른 방향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부친의 삶이 아들에게 미친 사례로 육종학자 우장춘이 있는바, 우장춘의 부친 우범선은 경복궁을 지키는 장수로서 1895년 일본이 주도하여 창설된 훈련대의 제2대대장이 되었으나 그해 10월 7월 명성황후로부터 해산과 무장해제를 받고는 그다음 날 휘하장병을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와 함께 궁궐에 침입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弑害)하는 을미사변에 가담한 사실이 있었다.

 

이 탓에 우장춘은 일본에서 육종학에 매진해 조국에 전해줌으로써 그 아버지의 잘못을 씻은 것이 되었고, 황계옥의 아들 황기로는 벼슬을 포기하고 예술에 전념해 다른 일가를 이루었다. 그들은 잘 풀린 사례이지만, 그렇지 못하고 잘못되어 평생 아버지가 남긴 짐의 유산을 무거운 짐으로 안고 살거나 인생을 버린 경우가 과거에도 현재에도 얼마나 많을 것인가?

 

우리의 삶이 한 조각 뜬구름 같다고 하지만 우리의 삶은 소중한 것이고 그만큼 무서운 것이리라. 우리가 비록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아도, 때로는 목숨의 위협을 당하더라도 마음과 정신을 올바르게 세우고 매화와 같은 고결한 삶을 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