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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충신 성삼문

세종시대를 만든 인물들 - ③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10]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들을 살피고 있다. 이번 연재에서는 성삼문을 살펴보자.

 

성삼문(成三問, 1418 ~ 1456) :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충신 - ①

 

성삼문은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단종 복위에 목숨을 바친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효온의 <육신전>에 소개되어 있다. 유교의 의리를 지킨 사육신(死六臣)인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유응부 6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세조 1년(1455)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였다. 그의 곧고 맑은 지조야말로 조선 선비들의 의리 정신을 보여주는 거울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있다.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다

 

성삼문은 충청도 홍주 노은동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매화나 대나무와 같은 강직한 군자의 기질을 흠모하여 호를 매죽헌(梅竹軒)이라 하였다. 홍주 노은동은 고려 말의 명장이었던 최영 장군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영웅이 탄생할 때 흔히 탄생설화가 있듯이 성삼문도 태어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 하는 세 번의 소리가 있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의 이름인 ‘삼문(三問)’의 구전 설화같은 이야기다. 그의 발자취를 보자.

 

세종 17년(1435) : 18살 되던 해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3년 뒤인 21살 때에 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었다. 안평대군을 통해 그의 학문과 인품 됨됨이를 전해들은 세종이 직접 집현전 학사로 발탁했다. 이때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 발탁된 인물은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이석형(李石亨) 등이다. 성삼문은 이들과 함께 집현전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수찬(修撰)ㆍ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관직이 올라갔다.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만들다

 

세종 24년(1442) : 25살 때에는 박팽년, 신숙주, 이개, 하위지, 이석형 등과 함께 삼각산 진관사에 휴가를 받아 독서에 열중하기도 하였다. 이를 ‘사가독서(賜暇讀書)’라 하는데, 집현전 학사들에게 준 특별한 혜택이었다. 집현전 시절 성삼문은 세종의 명을 받고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세종 25년 :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등과 더불어 성삼문이 큰 역할을 했다.

 

세종 27년 : 성삼문은 신숙주와 함께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와 있던 명나라 학자 황찬(黃瓚)으로부터 음운학을 배워왔다.

 

세종 29년 : 그의 나이 30살 때에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강희안 등과 함께 한국 한자음을 정리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펴냈는데, 수차례에 걸친 요동방문의 결과물이었다. 안평대군과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 사이 교류 또한 유명한데, 성삼문은 박팽년, 신숙주 등과 함께 안평대군의 정원에 있는 진풍경을 시제로 하여 <비해당사십팔영匪懈堂四十八詠>과 그 서문을 짓기도 했다.

 

세종 30년 (1448) :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왕명으로 편찬하여 이때에 간행한 《동국정운》은 통일된 한자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란 뜻을 담고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단종 복위를 꿈꾸다

 

단종 원년(1435) :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성삼문은 성리학적 정치윤리에 충실하여 어린 임금을 보필하였다. 그러나 왕위를 탐내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아울러 집현전 신하들에게는 정난공신의 칭호를 내려 주었다. 공신의 칭호를 성삼문은 부끄럽게 여기고 이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수양대군이 정치적 야심을 키우는 사이 성삼문은 단종 2년(1454)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이어서 예조참의를 거쳐, 다음 해(단종 3년)에 예방승지 자리에 올라 단종을 가까이서 보필하였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고 다시 아버지마저 잃은 어린 단종은 위협에 못 이겨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당시 단종의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전달하는 임무는 예방승지로 있었던 성삼문이 맡았다. 양위식을 담당한 성삼문은 옥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세조가 울고 있는 그를 한참 동안이나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출신의 젊은 관료들과 단종과 문종의 처가 식구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 승정원에 근무했던 성삼문은 나름대로 세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세조 2년(1456) 6월 1일에 거사를 이루기로 했다.

 

“성삼문과 박팽년이 말하기를 6월 1일 연회장의 운검(雲劒)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임명되었다. 이날 연회가 시작되면 바로 거사하자. 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오른팔들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 (《연려실기술》 단종조고사본말 중에서)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채 이루기도 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던 김질이 단종 복위계획 사실을 누설해 버린 것이다. 김질을 통해 진상을 파악한 세조는 성삼문을 불러들여 결박하였다. 성삼문의 뒤를 이어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박팽년ㆍ하위지ㆍ이개ㆍ유응부ㆍ유성원ㆍ박정 등이 끌려와 심문을 받았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옛 임금을 복위하려 했을 뿐이다.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의 마음은 나라 사람이 다 안다.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빼앗았고, 나의 군주가 폐위당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나으리가 평소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지칭하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삼문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은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대동야승(大東野乘)》 가운데서)

 

성삼문의 말에 화가 난 세조는 “지난 번 옥새를 가져올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나를 배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며 다그쳤다. 성삼문은 “때를 기다려 뒤를 기다렸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성삼문은 부당하게 폐위된 단종의 왕위를 다시 찾고자 했다. 그는 단종의 신하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

 

“너는 나의 녹을 먹고도 배반을 하였으므로 명분은 상왕을 복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정권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상왕께서 계신데 나으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고 하십니까? 또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으니, 만약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내 가산을 몰수하여 헤아려 보십시오.” (남효온, 《육신전(六臣傳)》 가운데서)

 

실제로도 그가 죽은 뒤에 가산을 빼앗아 보니 1455년 곧 세조 즉위년부터 받은 녹봉을 별도로 한 곳에 쌓아두고 ‘어느 달의 녹’이라고 기록해 놓았으며 집안에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오직 거적자리만 있을 뿐이었다고 전한다.(참고자료 : 정성희 《인물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