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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우울증, 무기력한 나날

이뭐꼬의 구도 이야기 1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들어가는 말: 강원도 태백시 백두대간 근처 깊은 산골에 예수원이라는 수행공동체가 있다. 필자가 50살이었던 2000년에, 나는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철 어느 날, 나는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하여 예수원에 2박 3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의 방문 기록을 우리문화신문 독자들에게 6회에 걸쳐 소개한다. 단, 오해할 독자들이 있을까 봐 사족을 단다. 이 이야기는 종교이야기가 아니다.(글쓴이)

 

내가 예수원에 대해서 처음 들은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처가가 강원도고 장인어른이 태백시 황지 초등학교에서 교장선생님으로 근무하신 적이 있어서 아마도 처가에 갔다가 처음 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수원이라고, 태백시 근처 깊은 산속에 성공회 신부(Reuben Archer Torrey III, 한국 이름 대천덕)가 세운 기도의 집이 있는데, 신앙적으로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들이 그곳에 가면 안식을 되찾고 온다는 정도로 들은 것 같다. 예수원 사람들은 매우 자유분방한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을 강요하지도 않고, 또 한 가족처럼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때부터 예수원은 한번 가보고 싶은 장소로 오랫동안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내 나이 50살이 되던 서기 2000년, 그 해는 새천년을 맞이하는 해로서 전 세계가 21세기가 시작되었다고 시끌시끌했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와중에 나는 조용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50살이라면 공자가 말한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이다. 하늘이 날 내면서 나에게 내려 준 명령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실천할 나이이다. 그런데도 나는 전혀 하늘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로,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우울증에 빠져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것은 이른바 남자나 여자나 늙어 가면서 한 번쯤 겪는 중년의 위기, 또는 갱년기의 위기였던 것 같다. 매사에 의욕이 없고 기력이 떨어졌다. 생리적으로는 호르몬의 분비가 적어져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도 설명한다. 심리적으로는 목표를 이루고 난 뒤 새로운 목표를 찾지 못하고 멍해진 상태라고도 설명한다. 인터넷이 보급된 이후 이른바 아날로그 세대로서 새로운 디지털 혁명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보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모습 같기도 하였다.

 

우울증의 정도는 나날이 심해졌다. 때로는 차라리 죽으면 편하게 모든 것이 끝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덜컥 들기도 하였다. 신문에서 어느 대학 교수가 자살했다는 기사를 읽고 남의 이야기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유력한 일간지인 워싱턴 포스트 신문사 사장이었던 그레이함이 우울증 때문에 권총 자살을 하였다는 잡지 기사를 읽고서 이해가 가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였다.

 

기독교인으로서 목사님이 가르치는 대로 그대로 믿고 행복한 듯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이 몹시도 부러웠다. 단순한 삶을 살면서도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이처럼 나에게 달라붙어 떠나지 않는 우울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용하게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떠나서 나 자신과 조용히 대화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나는 강원도 지역 번호와 114를 눌러서 황지에 있는 예수원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예수원에 전화를 거니 주중에 2박 3일 일정으로 쉬었다 갈 수 있는데 10여 일 전에 예약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2주 뒤 목요일에 가겠다고 예약했다. 예약 담당자는 나의 이름과 출석하는 교회를 묻더니, 긴 바지와 성경책만 가져오면 된다면서 간단한 차림으로 오라고 강조한다. 비용이 얼마냐고 물으니 무료란다. 올 때는 승용차보다는 기차나 버스를 이용하라고 권장한다. 나는 기차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2000년 7월 13일 아침 9시 10분에 아내가 운전하여 나를 봉담읍까지 태워다 주었다. (당시 나는 수원대 후문 근처의 전원주택에 살고 있었다.) 나의 우울증을 걱정하던 아내는 이번 기회에 기운을 되찾고 오라고 당부하였다. 봉담읍에서 버스를 타고 수원역까지 가고, 전철을 타고 청량리역으로 갔다. 청량리역은 예전에 내가 다녔던 서울사대에서 가까웠고 대왕코너라는 건물 안에 극장이 하나 있어서 가끔 왔던 곳이다. 그러나 그때가 벌써 30년 전 옛날이고 역사 자체가 오른쪽으로 옮겨져서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내가 들렀던 극장은 없어졌지만, 학창 시절의 추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그때 C라는 우리 학과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경기여고 출신이었는데 3수를 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나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더 많았다. 지금 생각하니 그녀는 조숙했던 것 같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잘 웃고 마음이 무척 너그러웠다. 나는 그녀에게 가끔 삼립빵을 사달라고 해서 여러 번 얻어먹은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정말로 철이 없었다. 나는 장난삼아 그녀를 ‘할머니’라고 불렀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도 무례하고 끔찍한 호칭이었는데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그냥 웃기만 하였다.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나는 그때의 호칭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별다른 일 없이 그저 사이좋게만 지내다가 4학년 1학기에 설악산으로 졸업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때에는 한 학과의 정원이 20명이었는데, 우리 학과에는 여학생이 5명 남학생이 15명 있었다. 그런데 여학생들은 다 빠지고 남학생들만 설악산으로 2박 3일로 졸업 여행을 갔다. 나는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그녀에게 줄 선물을 하나 샀다. 아마도 조개로 만든 팔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어느 날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조개 팔찌를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팔찌를 받아서 자기 가방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교실을 나가 버렸다.

 

그 뒤 한 달쯤 지나서 그녀가 다방에 가서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하였다. 4년이 지나도록 커피를 같이 마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둘이 다방에서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순순히 따라나섰다. 물을 마시고, 커피를 주문하여 다 마셨는데도 그녀는 아무 말이 없다. 무슨 할 말이 있을 텐데 시간만 흘러간다. 나는 기다리다 못해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채근하였다.

 

그러자 그녀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자기는 UBF라는 기독교성경읽기단체에 나가는데 거기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고려대 대학원생과 결혼할 것이라고. 나는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었다. 내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할 게 뭐람.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아, 그러세요. 축하합니다.” 그게 전부였다. 그녀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그냥 다방을 나왔다. 이제 더 이상 만나지 말자는 말로 해석되었다. 언젠가 여자의 심리에 도통한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그 친구의 해석은, ‘그러니까 마음에 있으면 지금이라도 적극적으로 덤벼 보라’는 뜻이었단다. 어느 해석이 맞는지 알 수는 없다.

 

다방에서 나와 그녀가 버스를 타러 저쪽으로 가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괜히 서운했다. 주머니 속에 있던 보물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내가 진작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갑자기 씁쓸한 느낌이 몰려왔다. 나는 청량리역까지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의 제목은 솔져 블루(Soldier Blue)였는데 무슨 인디언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영화를 보기는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허전하고 씁쓸하기만 하였다. 고려대 대학원생인 그 남자는 나중에 목사가 되었고 그녀는 목사의 아내로서 지금은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후 동창회를 통하여 한 번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재회의 인연이 없었는지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기차는 12시 정각에 출발하였다. 기차는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더니 기찻길 옆으로 흐르는 남한강을 따라 씽씽 달려갔다. 양평, 원주, 제천을 거처 영월, 고한을 지나 태백시가 목표였다.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서 창밖으로 나무가 울창한 산을 보고 굽이쳐 흐르는 강을 바라보았다. 모처럼 서울을 벗어나니 시간이 천천히 흘러감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