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내친김에 깨달음의 마지막 단계는 무엇이냐고 연담 거사에게 물었더니,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이라고 대답한다. 아니라는 뜻의 비(非)자가 세 개나 나오는 것을 보니 설명을 듣기도 전에 겁부터 나서 더 이상 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기차는 거의 100킬로미터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테제베인가 TGV인가 하는 고속전철이 프랑스에서 도입되면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다니, 수원에서 광주까지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나는 궁금하였다. 이렇게 세상이 빨라지면 정말로 좋은 세상이 될까? 정보 고속도로, 인터넷, 무한 경쟁 등의 단어들이 유행하는 것을 보면 앞으로의 세상은 모든 것이 번개같이 빠르게 움직이는 그런 세상이 될 모양인데, 불교에서는 21세기의 정보화 사회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래서 연담 거사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불교에서는 세상이 빨라지면 세상이 좋아진다고 보느냐고? 그것은 불경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연담 거사로서도 대답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불경이 쓰인 당시에는 1초에 10억 번의 연산을 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가 등장하고 인터넷으로 전 세계가 연결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나 보다. 정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광주역 앞에서 늦은 점심을 간단히 먹고 4시에 광주에서 출발하였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연담 거사와 불교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담 거사는 특이하게도 부인이 교회에 다닌다. 자녀가 둘 있는데, 하나는 아버지 따라 절에 다니고, 하나는 어머니 따라 교회에 다니는 독특한 가정이다. 연담 거사는 그러한 가정 내력 때문인지 이미 기독교 교리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그가 설명하는 불교 이야기는 이해하기 쉬었다. 나는 수원대 교수로 오기 전에 국토개발원에서 3년 동안 근무한 적이 있다. 그때 이 과장이라는 분과 차를 마시면서 불교에 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분은 불자로서 불교 공부를 많이 한 분이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었다. “부처님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일반인의 행동 차이점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깨닫는다면 그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달라지는가?” 내 질문을 들은 이 과장님은 이것은 금강경에 나오는 보물 같은 이야기인데 좋은 질문을 했으므로 나에게만 말해 준다면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연담거사가 설명하는 무주상보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잡지를 재미있게 읽다 보니 날이 밝아 온다. 차에서 내려 바닷가로 산책하러 나갔다. 마침 해가 동쪽 바다에서 떠오른다. 하늘과 바다는 시시각각 색깔이 변해 간다. 이글거리지만 눈이 부시지 않는 일출 광경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다. 방파제를 따라 상쾌한 바닷바람을 쐬며 파도 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걸었다. 선창에는 굵은 줄로 묶어 놓은 고깃배들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어디에나 부지런한 사람은 있는가 보다. 저쪽을 보니 작은 배 하나가 모터 소리를 내면서 물을 하얗게 튀기며 앞섬을 향해 달려간다. 부둣가에는 이제 사람들이 보였다. 대개는 아주머니들인데 얼굴이 햇볕에 그을려 건강한 모습이었다. 아주머니들은 멸치를 말리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멸치는 어떤 것은 굵고 어떤 것은 아주 잘고, 길에 깔개를 깔고 종류별로 널어놓는다.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어서 도시인들이 맛있는 멸치를 맛볼 수 있는 것이리라. 신도회장 집에 돌아오니 연담 거사는 일어나 방에서 고요히 명상하고 있었다. 법정 스님이 정의를 내린 명상이란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한다. 우리는 명상을 통하여 마음의 호수에 떠 있는 온갖 티끌을 가라앉히고,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우리는 현정 스님께 합장한 뒤 절하고 모처럼의 만남을 반가워하였다. 인연이란 끈질긴 것인가 보다. 그러니까 8년 만에 스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속세의 나이로 보면 이제 스님도 많이 늙었으련만, 삭발한 스님들은 흰머리가 안 보이니 늙는지, 안 늙는지 구별하기가 힘들다. 현정 스님은 오후에 마침 고등학교 동창생 몇 명이 여수에서 찾아왔는데, 우리와의 약속이 있어서 할 수 없이 절의 전화를 신도회장 집으로 돌려놓고서 안심하고 친구들과 지내다가 이제 돌아왔다고 미안해하신다. (주: 당시에는 휴대전화가 없었다.) 우리는 바쁜 것도 없는지라 평상에 앉아서 여러 가지 한담을 나누었다. 나는 평소에 느끼던 불교에 대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심정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첫째, 불교의 경전에 문제가 있다. 일반인이 듣기에는 ‘나무아미타불,’ ‘수리수리마하수리,’ ‘아제아제바라아제’ 등이 무슨 뜻인지 알기가 매우 어렵다. 왜 어려운 한자로 되어 있는 불경을 쉬운 한글로 번역하고 일상 불교 의식도 한글로 하지 않는가? 한자로 된 불경도 실제는 인도어를 한자로 번역한 것이 아니고 음역한 것이라는데, 음역한 어려운 한자어의 뜻을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거금도 부두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 되었다. 우리는 이틀 전에 전화를 드렸고 또 절이 부두에서 별로 멀지 않다고 하여 전화를 다시 하지 않고 찾아갔다. 초행길이었기 때문에 무려 네 사람이나 붙잡고 계속 길을 물어물어 갔다. (주: 당시에는 차에 길찾게-내비가 없었다.) 조그만 골목길을 지나 논을 지나고 호젓한 산길을 한참 올라가 겨우 찾아가니 송광암이라고 쓰인 절이 나온다.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금산정사가 어디냐고 계속 물었는데, 송광암이 나오다니. 주차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절 마당에 들어서자 토종 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를 보더니 일어서지도 않고 몇 번 짖다 만다. 참으로 느긋한 강아지였다. 인기척 하나 없는 조그마하고 조용한 산사였다. 옆으로 돌아가니 젊은 비구니 한 사람이 보인다. 연담거사가 공손하게 합장하고 금산정사가 어디냐고 물었다.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무표정한 비구니는 자기는 잘 모르겠으니 마을로 내려가 물어보라고 무덤덤하게 대답한다. 섬에 절이 두 곳뿐이라는데 자기는 다른 절의 위치를 모른다? 잠시 원망스러운 생각이 스쳤다. 수행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불친절할까? 곧이어 마음을 바꾸었다. 아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송광사에서는 재가불자들이 4박 5일의 출가 수련을 하고 있었다. 현수막에는 ‘짧은 출가 긴 깨달음’이라고 쓰여 있었다. 연담 거사도 세 번인가 이 같은 수련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즈음은 신청자가 많아 2, 3년 기다리는 사람도 있단다. (최근에는 템플스테이라는 이름으로 절에서 불교를 경험하기가 매우 쉬워졌다.) 참가자들 가운데는 천주교의 신부와 수녀도 더러 끼어 있는데 개신교의 목사님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하니, 종단의 포용성 또는 개방성을 보여 주는 단면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나는 원래 30년 동안이나 성당에 다니다가 혼인한 뒤에 부인 따라서 개신교에 나가는데, 언젠가는 이러한 4박 5일 출가에 참여하여 불교를 맛보고 싶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나의 종교적 성향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색깔이 분명하지 않다고 말한다. 내 답변은 이렇다. 나는 아직도 진리의 구도자이다. 지금까지도 진리를 찾는 중이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진리를 체험하고 싶다. 내가 아직 진리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어떤 사람이 진리를 체험했다고 말하면 그의 체험을 존중한다. 어떤 사람은 ‘진리의 구조는 이렇게 되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새벽 6시에 잠이 깨어 일어나 보니 연담거사가 안 보인다. 어디로 갔을까? 한참 지나 단정한 모습의 연담거사가 들어온다. 물어보니 새벽 4시에 일어나 택시를 타고 무등산에 있는 증심사에 가서 참선을 1시간 하고 왔단다. 부지런하기도 하지. 불교를 믿으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증심사에 가 보니 법정 스님이 법회를 하러 오신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더란다. 법정 스님은 내가 좋아하는 스님인데. 나는 법정 스님의 작은 수필집 《무소유》를 좋아한다. 혼자 읽기에는 정말 내용이 좋고, 또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환경 문제의 해결책이 담겨 있는 책이라고 생각되어 나는 내가 가르치는 모든 과목에서 학생들에게 《무소유》를 읽고 독후감을 3장 이상으로 써내라는 과제를 낸다. 독후감을 내는 학생에게는 무조건 5점을 준다. 이러한 다소 엉뚱한 과제를 1990년부터 시작했으니까 아마도 3,000권 이상 책을 팔아주었을 것이다. 그날은 바빠서 증심사에 못 갔지만 언제 법정 스님을 만나면 내가 많은 책을 팔아주었으니 점심이라도 한 끼 사시라고 청해야겠다. (주: 그 후 인연이 닿지 않아서인지 법정 스님을 만나지는 못했다. 스님은 2010년에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그 카페는 평범한 술집이었다. 물수건이 나오고, 맥주가 나오고, 안주가 나오고, 웨이터 총각이 아가씨를 둘 데리고 들어오고. 이 자리를 빌려 토로하건대, 나는 술 따르는 아가씨들에게 불만이 많다. 조선시대에 기생은 나름대로 뚜렷한 직업의식을 가졌으며 엄격한 교육 과정을 거쳐 배출되는 떳떳한 직업인이었다. 기생은 대개 천민 출신이었는데, 정2품 이상의 관리에게 사랑을 받으면 신분이 상승하기도 했다. 기생의 딸은 자동적으로 기생이 되는 식으로 세습되었는데, 유명한 황진이는 그 어머니가 기생이었기 때문에 기생이 되고 만 것이다. 특히 관기(官妓)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기생으로서 말하자면 공무원 신분이었는데, 관기가 되기는 매우 어려웠다. 3년마다 전국의 관기 가운데에서 150명을 뽑아 시(詩), 화(畵),가(歌), 무(舞), 악(樂)의 다섯 가지 기예를 매우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기생은 재생(才生)’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의 온갖 재주는 오늘날의 전통예술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는 기생들이 국채보상운동에까지 대거 참여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 기생들이 꼭 갖추어야 할 마지막 덕목은 지조였다. 이 덕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우리 일행은 이제 4명이 되었다. 우리는 정 교수의 모교이자 광주의 명문고이며 광주 학생 운동의 본거지인 광주일고를 잠깐 구경했다. 광주 학생 운동 기념탑이 한쪽에 있었다. 광주일고는 원래 변두리에 있었는데, 이제는 시내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근처의 한식집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호남 지방을 여행해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한정식을 주문하면 정갈하고 맛있는 반찬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따라 나온다는 사실을. 왜 이렇게 반찬이 많이 나오는가를 연구한 사람의 글을 읽어본 적이 있다. 이 지방에는 첫째, 손님을 환대하는 전통이 강하였고, 둘째, 은연중에 음식 팔아 돈을 버는 것을 악덕으로 여기는 상도덕이 자리 잡고 있었고, 셋째 물림상 습속이 발달하여 어른이 먹고 나면 사내 식구가 그 밥상을 물려 먹고, 다시 아녀자에게, 다시 종에게 상을 물려 먹다 보니 반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아름다운 풍습이 쓰레기 종량제 이후 비판을 받아 요식업자들은 음식 쓰레기를 줄이자는 차원에서 반찬 줄이기 운동을 벌였단다. 그래서 나온 안이 24가지 반찬은 너무 많으니 18가지로 줄이자는 운동이라고 하니 그저 기가 막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우리는 좌석을 찾아 앉았다. 자동차가 급속히 늘어나 고속도로가 막혀서 저속도로로 변한 뒤로는 기차 여행이 빠르고 편하다. 광주까지 가려면 승용차로 한 다섯 시간 걸릴 텐데, 무궁화호로는 3시간 45분이 걸리니 훨씬 빠르다. 또한 운전을 안 하니 피로하지도 않다. 단지 불편한 점은 기차표를 미리 예매해야 한다는 거고, 또 기차역까지 오가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전체 시간은 오히려 더 들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매우 기분이 좋았으며, 특히 이번 여행에서 불교에 관해서 궁금했던 의문점들을 많이 알아보리라고 마음먹었다. 나와 동행하는 연담 거사는 내가 만난 불교인 가운데서 가장 불교 이론에 밝았으며 또한 불교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연담이라는 법명은 광덕 큰스님이 주신 이름이며, 거사(居士)라는 칭호는 재가불자로서 불교를 실천하는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거사와 비슷한 말에 처사(處士)라는 말이 있는데, 처사는 약간 낮추어 부르는 호칭이다. 거사들 가운데도 수행을 많이 한 법사(法師)가 있는데, 법사는 법당에서 신도들에게 가르침을 베풀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기차는 녹음이 우거진 산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