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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20’, 세계 청각장애인에게 말을 주다

소리단추를 눌러 말소리 만들어 내
[공학박사의 한글 이야기 26]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전번 이야기에서 세계 시각장애인들은 자국어 점자 대신 ‘한글20’으로 된 문서를 읽고, 소리자판을 써서 자국어 글자를 입력할 수 있는 방법을 보였습니다. 곧 ‘한글20’으로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글20’이 청각장애인을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청각장애의 등급

 

청각장애는 장애 정도에 따라 6가지 등급으로 분류되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다음과 같이 3단계로 나누어 이야기하겠습니다.

 

- 가장 심한 경우: 농아인:

태어나면서부터 전연 듣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려서부터 듣지 못해 말을 배우지도 못해 농아인(聾啞人)이 됩니다. 헬렌켈러는 이러한 사람이었으나 썰리반 선생의 헌신적이고도 창의적인 교육 덕분으로 말하고 글쓰기에 능해졌으며 심지어는 외국어도 몇 가지 했다고 합니다. 썰리반 선생의 교육 요령은 혀, 입술 등 구강의 움직임을 글자와 연계시켜 가르쳐주는 것부터 시작했다고 합니다.

 

- 중증(重症) 청각 장애인:

정상으로 태어나 말을 배운 뒤 귀가 잘 안 들리게 되어 남의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입니다. 장애가 오기 전에 글을 배웠다면 말을 하고 책 읽기와 글쓰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들을 수가 없어 보청기를 써보지만, 대화가 어려워 수화(手話)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음성인식 기술을 슬기말틀(스마트폰)에 탑재하여 상대방의 음성을 인식하는 방식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도 음성인식기능을 작동시켜 실시간 자막을 달아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증 청각 장애인:

귀가 다소 어두운 사람들이며 보청기로 큰 문제 없이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소리자판은 말소리 연주기

 

앞 이야기에서 소리자판으로 자모를 입력하여 음절이 이루어지면 그 음절을 발음해 주도록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 원하는 곡을 연주하듯이 소리단추를 눌러 말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능을 적당한 속도로 구현시키면 말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말을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래 그림은 소리자판의 기능을 발전시켜 만든 ‘말소리연주기’의 상상도입니다. 음절을 다양한 성조로 발음하도록 하는 5개의 성조단추와 각종 필요로 하는 기능 단추를 탑재시켰습니다. 음성 인식기능도 탑재하면 상대방의 말을 인식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의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청각이 작용하지 않습니다. 이 기술은 ‘한글20’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농아인도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글을 알면 먼저 음성인식기술로 상대방의 말을 받아써서 이해하고 말소리 연주기로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인 청각장애인이 말소리연주기를 사용하려면 다언어 데이터베이스(DB)를 탑재시켜야 할 것입니다. 음성인식은 자국어로 해야겠지만 말할 때는 ‘한글20’을 써서 말소리 연주기를 ‘연주’하면 될 것입니다. ‘한글20’을 배워야 하는 부담이 따르겠지만 한글을 배우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으니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소리 연주기는 작은 소리도 낼 수 없는 경우 발화자가 말소리 연주기에 말을 입력하면 상대방은 이어폰을 끼고 그 소리를 듣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이 원거리에 있을 때는 소리자판으로 문자를 보내면 문자를 받음과 동시에 실시간으로 말을 듣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시간 대화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지만 말소리연주기를 쓸 때 문자를 읽을 필요 없이 실시간으로 말소리를 듣는다는 데 차이가 있습니다.

 

결국 소리입력기의 덕으로 시각장애인이 문자를 입력할 수도 있고 말소리 연주기로 청각장애인이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한글20’만이 이룰 수 있는 기술이 될 것입니다. ‘한글20’의 어떤 특성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지 다시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한글20’은 인간의 말소리를 10개의 자음 음소와 10개의 모음 음소로 분해하여 이를 다시 조합함으로써 인간의 말소리를 기록하는 문자 시스템입니다. 초중종성이 입력되어 음절이 완성되면 그 음절의 발음을 내도록 프로그램을 내장하면 말소리 연주기가 됩니다. 지금은 영어 알파벳으로 외국어의 발음을 표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지만) 알파벳으로는 소리와 글자의 1:1 관계를 구현할 수가 없어 말소리 입력기와 같은 기기를 만들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의 ‘국가’와 중국어의 ‘国家(guójiā)’를 알파벳으로 표기하면 각각 kukka 와 guojia 가 되겠지만 이를 다시 읽으면 한국어의 ‘국가’와 중국어의 guójiā로 발음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소리 연주기를 통해 표기한다면 각각 [국가]와 [구오ˊ찌아ˉ]로 발음되어 알아듣게 될 것입니다

 

글자는 말을 도형적으로 표현하는 기술이라 했습니다. 곧 글자의 목적은 말을 표기하는 것입니다. 말은 소리이기 때문에 글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소리를 표기하는 것인데 알파벳은 소리를 표기하지 못하고 ‘단어’라는 중간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소리를 표현하게 됩니다. ‘한글20’은 직접 소리를 표기하기 때문에 소리 대신 쓸 수 있으며 이것이 장애인의 언어생활을 도와줄 수 있게 하는 기반입니다.

 

붙임 글

극단적 언어장애 극복사례: 장 도미니크 보비의 ‘잠수종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Jean Dominique Bauby 1952 –1997)는 프랑스의 유명 패션잡지 엘르의 수석 편집장이었습니다만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왼쪽 눈꺼풀 근육을 뺀 모든 근육이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20일 동안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귀한 삶이었지요.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뇌는 무사하여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20만 번의 눈깜빡임과 상상력으로 ‘잠수종과 나비’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이 영화화되어 칸 영화제의 골든 글로브상과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그리고 아카데미 4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가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잠수종은 잠수부들이 머리에 쓰는 종 모양의 헬멧으로, 눈앞의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그의 책 제목은 잠수종에 갇혀 있지만 상상력은 나비처럼 자유롭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지요. 그는 ‘흘러내리는 침을 삼킬 수만 있다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눈을 깜빡거려 어떻게 책을 썼을까요? 그의 도우미는 보비의 눈을 들여다보며 알파벳을 하나씩 읽어나갑니다. 그러다가 보비가 원하는 알파벳을 읽는 순간 눈을 깜빡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어의 철자를 하나씩 선택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한국사람이었다면 혹은 그가 ‘한글20’을 알았더라면 같은 방법을 쓰더라도 20만 번이 아니라 약 절반만 깜빡거리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라틴 알파벳보다 ‘한글20’은 글자가 4글자가 적은 데다가 단어의 철자법을 쓰는 것보다 한글로 소리를 표기하는 것이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기 이름 ‘Dominique’는 알파벳으로는 9자이지만 ‘한글20’으로는 ‘도미닠’이어서 7자면 됩니다. 그래서 20/24 x 7/9=0.54 곧 약 절반만큼 눈을 깜빡거려도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