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26)
나는 몇 달을 더 못 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하여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조국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란다
평생 죄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히지 않을 뿐이다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란다
백정기 열사의 무덤 비문에 적힌 이 시는, 그가 숨을 거두기 전 동지들에게 남긴 말이다.
‘옛 무덤’이라고 하면 흔히 망자가 묻혀 있는 정적인 공간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무덤 하나하나마다 이처럼 심금을 울리는 사연이 배어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고 했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청동말굽이 쓴 책, 《옛 무덤이 들려주는 이야기 한국사》는 그런 의미에서 더욱 특별하다. 책에 소개된 옛 무덤들은 그 자체로 죽은 이를 대변한다. 몇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책은 크게 ‘나라를 세운 왕들의 무덤’, ‘위기 앞에서 용기를 보여 준 이들의 무덤’, ‘평화로운 나라를 꿈꾼 왕들의 무덤’, ‘나라의 주인 됨을 외친 열사들의 무덤’으로 나뉜다. 우리 역사 속 건국 시조부터 독립운동가들의 무덤까지, 어린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짚어준다.
그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가 묻힌 ‘삼의사의 묘’이다. 서울 효창공원에는 독립운동하다 생을 마친 이들이 안장된 ‘애국지사 묘역’이 있다. 광복 이후 아깝게 목숨을 잃은 이 세 열사의 유해는 효창공원에 나란히 잠들었다.
효창공원의 본래 이름은 효창원이었다. 효창원은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 세자의 무덤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문효 세자의 무덤은 일제 강점기 서삼릉으로 이장되었고, 그 뒤로는 공원으로 이용되었다.
이봉창과 윤봉길 열사는 비교적 잘 알려졌어도, 백정기 열사는 모르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서울에서 벌어진 3.1 운동을 목격한 백정기는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 운동을 펼치다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다.
베이징에서 신채호의 영향으로 무정부주의 활동을 펼치며, 일본 대사와 군인들이 모인 연회장을 습격하려 했으나 동지의 배신으로 이렇다 할 거사를 벌이기 전에 체포되고 말았다. 일본으로 끌려간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나가사키 형무소에 수감된 뒤 짧은 생을 마쳤다.
또 조선 첫 합장릉으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함께 잠든 영릉 또한 흥미롭다. 영릉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에 있다. 원래는 태종이 묻힌 헌릉 옆자리에 마련되었으나, 1468년 예종 대에 이르러 터가 좋지 못하다 하여 조선 으뜸 명당자리를 찾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한번 정해진 무덤을 옮기기 쉽지 않았지만, 왕릉을 이장한 덕분인지 조선왕조는 번창하고 500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영릉은 오늘날에도 아름다운 경관으로 무덤을 찾는 이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주고 있다. 해마다 4월 7일, 세종대왕 탄신일에는 성대하게 제향 행사도 열린다.
고요히 그곳에 있어서 가끔은 있는 줄조차 모르고 지나치는 무덤도, 알고 보면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옛 무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사람의 삶이 남기는 흔적은 참으로 크고, 때로는 영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날씨 좋은 가을, 집 주변에 있는 왕릉이나 옛 무덤으로 가보자. 고요한 곳에서 즐기는 가을의 운치는 옛 무덤이 품은 수많은 이야기와 함께, 일상의 잔잔한 행복을 선물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