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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광산 세계유산등재에 들뜬 일본사회, 기가 막혀

일본 요미우리신문 4면이나 관련 보도 축하 일색
<맛있는 일본이야기 721>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밤 8시 55분, 숙소에 들어와 텔레비전을 켜니 ‘사도광산’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오늘부터 한반도 출신자의 역사와 노동 상황에 관한 전시를 시작합니다. 이번 전시는 1940년부터 45년까지 한반도 출신자 1,500명이 사도광산에서 어떠한 환경에서 어떻게 일했는지 등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 위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내용은 판넬 자료 31점입니다.”

 

이는 지난 7월 28일, 일요일밤 8시 55분 NHK-TV에 방영된 사도광산 전시 개막 소식으로 전시내용을 소개한 사람은 사도시(佐渡市) 문화학예원 쇼코 하루카(庄子 遥) 씨다. 사도시가 운영하는 아이카와향토박물관(相川郷土博物館) 소속인 쇼코 하루카 씨는 이어 “사실을 사실로 전달함으로써 한일 간의 상호 이해가 진행되길 바란다.”라고 이번 전시 의미를 말했다. 사도광산 화면이 바뀌자마자 나는 숙소 1층 로비로 가서 28일자 <요미우리신문> 종이신문을 집어 들었다.

 

 

신문에는 1면에 “사도광산 세계유산 유네스코 결정 한국도 찬성”이라는 큼지막한 제목의 사도광산(아래 사도광산, 일본에서는 사도광산<佐渡鑛山> 또는 사도금산<佐渡金山>으로 표기) 보도가 있었다. 1면에는 제목처럼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과정에서 “한국이 전쟁 중 조선인 강제노동 피해현장임을 들어 반발해 왔으나 강제노동자들의 가혹한 노동 환경을 해설한 전시를 현지에서 한다는 조건으로 한국과 지속적인 대화를 이어왔다”라고 전제하면서 유네스코의 21개 회원국의 하나인 한국대표단이 “일본이 전체적인 역사를 포괄적으로 취급하는 해석을 펼쳐왔다”라면서 이번 유네스코 등재에 찬성을 표명했다고 전했다.

 

28일 자 <요미우리신문>에는 1면에 이어 2면, 8면, 28면 등 모두 4면을 할애하여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소식을 특집으로 다뤘다. 특히 2면에는 <사도광산을 둘러싼 한일 합의의 포인트>라는 3개의 항목이 있었는데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기자 번역)

 

▶ 한국은 '강제노동' 문구를 현지 전시 등에 사용하지 않는 것을 용인

(韓国は 「強制労働」の文言を現地の展示などに使用しないことを容認)

 

▶ 일본은 한반도 출신 노동자에 대한 상설전시를 현지 소개시설에서 실시

(日本は朝鮮半島出身労働者に関する常設展示を現地の紹介施設で実施

 

▶ 일본은 한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모든 노동자 추모행사를 현지에서 해마다 개최)

(日本は朝鮮半島出身者を含む全ての労働者の追悼行事を現地で毎年開催)

 

그러면서 기시다 수상(岸田首相)은 자신의 X(구 트위터)에 “14년 동안 투쟁한 결과를 국민 여러분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라고 전했다. 그런가 하면 사도광산이 있는 니가타현(新潟県)의 하나즈미 히데요(花角英世) 현지사(県知事)는 "일본의 보물에서 세계의 보물이 된 사도광산을 앞으로 더욱 굳건히 지키고, 미래세대에 계승해 갈 수 있도록, 지역의 대처를 지원해 나갈 것“이라고 사도시장(佐渡市長) 와타나베 류고(渡辺竜五) 시장에게 전화를 걸어 각별한 지원을 약속했다.

 

 

28면에는 그동안 주민들이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30년 동안의 노력을 상세히 소개했다. 사도시 주민 200여 명은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의 심의를 지켜보면서 사도광산이 유네스코 등재로 결정되는 순간 전 현의회의장(元県議会議長) 출신이자 시민단체 ‘사도를 세계유산으로 만드는 모임(佐渡を世界遺産にする会)’ 회장인 나카노 코(中野洸, 83) 씨는 “발표를 보고 안심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라면서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사도광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은 축제분위기 그 자체였으며 이를 <요미우리신문>은 상세히 보도했다. 위로는 기시다 총리로부터 아래로는 현지 주민들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집중보도 했으며 각 지역 신문들도 이에 질세라 일제히 ‘사도섬의 관광 활성화’라는 큼지막한 제목을 뽑아 벌써부터 향후 이 지역의 관광활성화를 위한 대책에 돌입한 분위기다.

 

 

금광이 되었든, 탄광이 되었든 모든 작업을 손으로 처리해야 하는 전근대적인 광산작업은 그야말로 죽음을 불사하는 힘들고 고역스러운 작업이다.

 

"작업 중 다이너마이트 불발탄이 폭발하여 눈앞에서 죽은 사람만도 10여 명이나 있었다. 그들은 손발이 갈가리 찢겨 나갔고, 바윗돌이 가슴을 덮쳐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래서 사체의 행방은 잘 모른다. 강제징용자들은 질병으로 죽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부상으로 죽었다. 터널 공사 중 나온 돌덩어리를 나르는 짐차에서 떨어지거나 터널 받침목을 제대로 설치 안 해서 죽어 나가는 사람도 많았다. 공사장에서 죽은 사람을 끌고 나가는 것을 수백 번 이상 목격했다.”

 

이는 <나가노현 강제노동조사네트워크> 소속 회원들이 현장에서 발로 뛰어 쓴 《본토결전과 외국인강제노동》(일본 도쿄 고문연 (高文硏) 출판, 2023)이라는 책(160쪽)에서 ‘나가노 히라오카댐(長野平岡) 강제연행 노동자 김창희(경북 월성 출신)의 증언이다. 이러한 증언은 댐공사 현장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광산노동현장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한편, 기자는 국치 100년을 맞는 해였던 2010년 8월, 조선인 강제노동의 현장인 일본 최대의 탄광지역인 기타큐슈의 치쿠호 탄광을 답사 취재한 적이 있다. 치쿠호 지역은 기타큐슈 중에서도 손꼽히는 탄광지대로 에도시대 중기부터 석탄개발을 하던 곳이다.

 

 

명치정부는 1872년 광산개발령을 공포하고 정부와 민간인에 의한 탄광개발을 장려했다. 1901년부터 조업을 시작한 야하타제철소(八幡製鐵所, 현재 일본제철)를 비롯하여 재력가들이 탄광개발에 다수 참여하면서부터 이곳은 일본 최대 규모의 탄광으로 성장했다. 이때 수많은 노동력을 조선인 강제연행으로 충당하여 기업을 살찌운 회사들은 오늘날도 굴지의 기업으로 꼽히는 미츠비시(三菱), 미츠이(三井), 스미토모(住友) 등으로 이들은 치쿠호 지역의 탄광업을 통해 막대한 자본을 모은 회사들이다.

 

그러나 굴지의 기업들은 강제연행된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하루 세끼 밥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강제노동자들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극도의 배고픔’이었다는 증언이 속출했다.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들을 함부로 다룬 제국주의 기업들의 비인간적인 대우는 분노를 넘어 격노의 끝까지 다다랐다.

 

 

사도광산이라고 어찌 ‘천국의 노동 환경’이었을까? 그러한 강제노동자들의 노역현장을 단순한 관광지화를 위한 세계유산등록에 혈안이 되어온 일본 정부, 거기에 ‘강제노동’이라는 말조차 순순히 빼줘 버린 한국정부, 나는 30일, 귀국을 앞두고 언론을 통해 발표된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소식에 일본열도의 들뜬 축제분위기를 보면서 ‘일본의 밑바닥 양심’에 다시 한번 처참한 마음으로 가슴을 쳐야 했다. 또한 그것을 용인한 우리 정부의 느슨한 태도는 나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광산에 대한 1,500여 명(일본의 주장)의 조선인 강제노동자에 대한 처우와 실상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이참에 한국정부에 묻고 싶다. 우리가 우리의 일을 기록하고, 그 실상을 파헤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일을 기록할 것인가!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