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기생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은 29살에 장원 급제를 한 인재였다. 그는 요즘 말로 하면 매우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벼슬길은 파란만장하였으며 결국은 쿠데타 음모로 나이 50살에 사형을 당하였다. 그는 자기가 쓴 책의 주인공인 홍길동처럼 그 시대의 반항아였다.
혀균은 어느 날 가깝게 지내던 기생이 죽자, 세상의 이목을 아랑곳하지 않고 문상하러 갔다고 한다. 사대부로부터 비난이 쏟아졌다. 그 뒤에도 또 한 번. 허균은 모친상 동안에 기생과 술잔치를 벌려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허균은 그러한 비난에 대해 위축되거나 변명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인간적인 선언을 하였다.
“남녀 사이의 정욕은 하늘이 내려 주신 것이고, 인륜과 기강을 분별하는 지식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하늘은 성인보다도 한 등급이나 더 높고 위엄이 있다. 그래서 나는 하늘을 따를지언정 (정욕보다 인륜을 앞세우는) 성인의 가르침을 반드시 따르지는 않겠다.”
지금 시대의 기준으로 보아도 허균의 생각은 매우 파격적이다. 그렇지만 김 교수는 허균처럼 시대의 반항아가 될 용기는 없었다. 김 교수는 이론은 근사해도 실천은 하지 못하는 나약한 지성인에게 속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미국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김 교수는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반지 선물을 전해주려면 만나야 하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자신은 도저히 아가씨를 서화담처럼 대할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지족선사의 무애(無碍)의 경지, 까놓고 말하면, 몸 보시를 실천해 보고 싶다는 욕망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아, 괴로운 일이다. 요즘에는 슬그머니 아가씨의 얼굴과 아내의 얼굴이 겹쳐서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법구경에는 애초부터 남녀 사이에 사랑도 말고 미움도 말라고 기록되어 있나 보다. 또한 이 세상에는 김 교수처럼 고민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법구경의 이 구절은 유명해졌나 보다. 한 달이 지나도록 김 교수는 전화를 하지 않았고, 저쪽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대로 막을 내리고 아가씨는 추억의 한 페이지로 사라질 것인가?
세월은 계속 흘러가면서 겨울이 서서히 물러간다. 이제는 찬바람이 불어도 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이 아니고 무디어진 바람 속에는 봄기운이 섞여 있다. 입춘과 우수가 지나고 경칩까지 지나니 이제는 봄기운이 완연하다. 양지쪽에는 어느새 푸른 싹이 슬그머니 돋아나 있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니 다음과 같은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개구리가 잠을 깨고 기지개를 켠다는 경칩이 지났으나 아직 개구리는 선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봄의 전령사인 개구리는 15년 전에 비해 1/10 정도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대 생물학과 학생들은 해부 실험용으로 쓰던 참개구리를 구하기가 힘들어 흰쥐로 대체해서 실험을 한다고 한다.
강남으로 날아갔던 제비도 돌아올 줄을 모르고 있다. 충북지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1988년 제비가 2,340마리가 관찰되었는데, 1992년에는 382마리, 1996년에는 155마리만 날아온 것으로 파악되었다고 한다. 꼬리명주나비, 호랑나비 등 봄과 함께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던 토종나비들도 거의 사라졌다.”
아아, 인간이란 참으로 어리석은 동물이다. 이처럼 곤충과 새, 물고기, 짐승들이 주변에서 사라진다면 사람인들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남녀 관계 문제 못지않게 생태계의 문제도 심각하기만 하다.
아직 진달래가 피기 전 어느 날 아가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으면서 달력을 보니 그날은 춘분이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5시 15분. 보내 준 그림엽서 잘 받았다는 인사를 하더니 이어서 명랑한 목소리로 유혹의 말을 던진다. 이 아가씨가 봄바람이 났나 보다.
“오빠, 오늘은 매우 기쁜 날이에요. 한번 만나고 싶어요.”
“무슨 좋은 일이 있었어?”
“집 계약이 되었어요. 한 달 후에 양재동으로 집을 사서 이사 가요, 오빠.”
“그래? 잘 되었네. 이제는 전세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동안 고생 많았지?”
“네, 오빠. 오늘 시간 좀 내세요.”
“그래 모처럼 좋은 일이 생겼는데, 축하해 주어야지. 잠실로 갈게.”
“오빠, 오늘은 보스로 한 번 오세요. 제가 기다릴께요.”
젊은 아가씨의 애교 섞인 유혹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그래, 8시까지는 도착할게.”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면 커피 두 잔 값만 있으면 되는데, 보스에서 만나려면 술값 외에 현금으로 주어야 하는 팁 값이 필요하니 아무래도 돈을 찾아야겠다. 은행은 이미 문을 닫았고, 24시간 돈을 찾을 수 있는 창구에서 10만 원을 찾았다. 문방구에서 흰 봉투도 샀다. 아내에게는 친구가 술 한잔하자고 연락이 와서 오늘 좀 늦겠다고 전화를 해 두었다. (이건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다. 여자 친구도 친구니까!)
퇴근한 뒤 차를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세워놓고 택시를 타러 큰길 쪽으로 나갔다. 그런데 저녁 식사를 어떻게 하나? 시계를 보니 벌써 8시가 되었다. 제과점에 들러 찹살떡 2개를 샀다. 택시 안에서 찹살떡을 먹는데, 아무래도 기사 아저씨가 마음에 걸려 한 개를 드시라고 주었다. 기사 아저씨는 마침 출출하던 차에 잘 먹었다고 하더니 세상을 한탄하는 이야기를 꺼낸다.
낮 시간에 운전하다 보면 ‘있는 것이라고는 돈과 시간뿐인 아줌마’ 유식하게 말하면 유한마담(有閑 madam)들이 거리에 많이 돌아다닌다고 한다. 초보 운전이라는 딱지를 붙이고서 그랜저를 운전하는 아줌마도 있고, 모피를 입고서 계 모임에 가는 아줌마도 있단다. 기사 아저씨의 이야기로는 처음 운전하면서 그랜저를 뽑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 처음에는 소형차를 가지고 운전하는 것이 순서 아니냐는 것이다.
그랜저나 벤츠는 보험료도 많이 들고, 부속품 값도 비싸고, 차체가 커서 주차하기도 어렵고. 고급차는 과시용이지 실용성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모피만 해도 그렇다. 운전하면서 대화를 듣다 보면, 세일 때 1,000만 원짜리 모피를 샀더니 5만 원어치 화장품을 경품으로 받았다고 자랑한다고 한다. 경품 받는 재미로 1,000만 원짜리 모피를 쉽게 산다는 것이다.
모피 코트는 몇 년 전부터 유행이었다. 모피 옷은 여자가 부를 과시하는데 가장 좋은 수단이다. 남자가 비싼 외제차를 자랑하듯이 여자는 비싼 모피를 자랑한단다. 가장 비싼 차는 5,000만 원 정도지만 가장 비싼 모피는 1억 원까지 나간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김 교수는 모피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는 달동네 아주머니의 눈에는 1억 원짜리 모피를 입고 뽐내는 여자가 어떻게 보일까? 아름답다는 생각보다는 엄청난 위화감을 느낄 것이다. 모피 옷 한 벌 값이 자기 집 전세금보다도 비싸니 자기 팔자를 한탄하며 남편을 원망할지도 모른다. 모피는 전량 수입하기 때문에 국가 경제에도 좋을 게 없다. (외환위기 이전 통계에 따르면 1995년, 1996년 2년 연속 우리나라는 미국 모피의 최대 수입국이었으며 1996년에 유럽과 미국에서 모피를 수입하는데 2,000억 원을 지출하였다.)
생태적인 측면에서도 모피는 문제가 있다. 모피를 만들기 위하여 사육된 여우와 밍크 등 야생 동물이 해마다 4,000만 마리가 죽는다. 멋있는 밍크코트 하나를 만들기 위하여 200마리의 밍크를 죽여야 한다니 불살생을 강조하신 부처님이 현대에 나타나신다면 모피 안 입기 운동의 선두에 섰을 것이 분명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