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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남은 삶을 시골에서 살기로 했다

평창에서 온 편지 (4)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나는 40대 후반인 1997년부터 4년 동안 시골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수원대는 이름은 수원이지만 캠퍼스는 수원 시내가 아니고 화성군 봉담면 시골에 있다. 텃밭을 가꾸며 전원주택에 산다는 것은 번화한 도시에 살면서 소음과 공해에 시달리는 많은 남자의 꿈이다. 그 당시 나는 수원대 후문 근처에 대지 100평 건축면적 30평인 목조 주택에서 전세를 살았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15분 걸렸다. 마을 옆 수원에 사는 부자가 사 둔 넓은 공터가 있었는데, 주민들은 주인의 허가를 받고 공터를 나누어 20평 정도의 텃밭을 가꿀 수 있었다.

 

제법 널찍한 마당에는 잔디를 심었다. 잔디밭에서 배드민턴을 칠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집 주위에 화초를 심고, 조롱박과 나팔꽃 같은 덩굴식물도 심었다. 조금 떨어진 텃밭에는 가지, 고추, 상추, 배추 등 반찬거리가 되는 푸성귀를 심었다. 그런데 텃밭 농사라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텃밭 농사는 풀과의 전쟁이었다. 첫해에는 이것저것 다품종 소량으로 농사를 지었으나 점점 품종이 줄어들어 마지막 해에는 손이 덜 가는 콩과 고구마만 남았다.

 

시골 생활을 4년 동안 경험하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두 가지였다. 시골에 살려면 첫째 집은 작아야 한다. 둘째, 텃밭도 작아야 한다. 집이 크면 겨울철 난방이 어렵고 유지관리가 힘들다. 텃밭이 크면 중노동 수준의 육체노동을 감수해야 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은 시골에 살려는 사람이면 누구나 새겨들어야 할 명언이다.

 

2015년에 나는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해 8월에 정년퇴임 하는데, 우리 부부는 남은 삶을 시골에서 살기로 했다. 주변의 부부들을 살펴보면 대개 남자는 시골에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부인들은 대부분 시골 생활을 싫어한다. 답답하고 심심해서 어떻게 시골에 사느냐고 아예 손사래를 치는 부인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 각시는 봉평면 흥정리에 있는 허브나라 농원에서 3년 동안 일을 한 경험이 있어서 시골에 살자는 나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2015년 4월 어느 날, 평창군에 있는 부동산에서 봉평면 면온리 시골집이 하나 매물로 나왔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부동산 사장님에게 그 집을 사진 찍어서 보내라고 말했다. 사진을 보니 집안에 은행나무가 두 그루 있고 아주 옛날 새마을운동 하던 시절에 지은 낡은 집이 가운데에 있었다. 대지는 110평이고 딸린 밭은 없었다.

 

시골 땅은 밭이 딸려 있어서 대개는 평수가 넓으며 값이 비싸지는데, 이 땅은 적당한 넓이였다. 영동고속도로 면온 진출입로에서 1km 떨어져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다고 한다. 주변은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서 이십여 가구가 모여 산다고 했다. 마을 앞은 밭이고 밭 너머에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고속도로 건너서 앞산이 있다고 한다.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으로서 햇볕이 잘 든다고 했다.

 

나는 대체로 신중하지만 때로는 결정이 빠르다. 아내도 그렇다. 나는 부동산 사장님에게 그 집을 사겠다고 말한 뒤에 즉시 계약금을 보냈다. 현장에 가보지도 않고 사진만 보고서 집을 산 것이다.

 

집을 계약한 뒤 한 달이 지난 5월 시간을 내어 시골집에 가보았다. 영동고속도로 면온 진출입로에서 집까지는 차로 딱 1분 걸렸다. 집의 방향을 보니 남향이었다. 앞쪽의 밭에는 감자를 심어놓았다. 밭 건너서 남쪽으로 나무가 울창한 높은 산들이 보인다. 집 뒤로는 경사가 진 넓은 배추밭이 있었다. 각시도 집의 위치가 좋다고 말한다. 내가 손말틀(휴대폰)에 깔린 고도계 앱으로 측정해 보니 집의 해발고도가 550m가 나온다. 내가 살던 서초구 우면동에서 자주 등산 가던 우면산의 해발고도가 313m임을 생각하면 지대가 높은 것은 분명하다. 겨울에는 추울 것이다.

 

집을 지으려면 먼저 설계도를 작성해야 한다. 우리는 현재 있는 낡은 집은 헐고 우리가 원하는 멋진 집을 짓기로 했다. 마당에 있는 은행나무 두 그루는 고사를 지낸 후에 베어내었다. 건축사무소를 찾아가 설계를 맡기지 않고 나는 평소 가까이 지내던 수원대 건축공학과에 근무하는 ㄹ 교수에게 설계를 부탁했다. 그는 독일에서 친환경 건축을 전공했다고 한다.

 

며칠 후 집터를 방문한 ㄹ 교수는 토지의 모양과 해가 뜨는 위치, 그리고 산과 개울 등등 주변 환경을 상세히 조사하였다. 통계자료를 검색하여 봉평면의 강수량과 겨울철 기온 등을 조사하였다. 그러고는 우리 부부에게 집에 관한 요구사항을 물었다. 나는 “집은 작아도 좋지만 화장실이 두 개가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화장실이 하나이면 손님이 와서 잘 때에 불편하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각시는 다락방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다락방이 있는 집에 사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약 2주가 지나서 ㄹ 교수가 설계도를 가지고 봉평으로 왔다. 나는 설계도가 한 장인 줄 알았는데, 설계도면이 여러 장이었다. 내가 모르는 용어와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는 설계도는 들여다보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설명을 들어보니 방 2개에 주방을 겸하는 거실이 하나, 그리고 화장실이 두 개이고 다락방이 있다고 한다. 집의 바닥면적은 21평이고 다락방이 10평, 합해서 건축면적은 31평이라고 했다. 봉평의 겨울은 춥기 때문에 난방과 단열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집의 구조는 경량 목구조라고 한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제 가장 중요한 건축업자의 선정이 남았다. 집을 지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나는 건축업자에 대한 수없이 많은 불평과 원망을 들은 바 있다. 집을 짓는 중간에 건축업자가 도망갔다는 이야기에서부터, 공사 지연, 과다한 추가 비용 요구, 부실 공사 등등 험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 밖에도 “집 짓고 나서 10년은 늙은 것 같다”, “집 짓고서 화병이 났다”, “다시는 집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 등등 별별 이야기를 다 들었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가야 하나?

 

나는 건축업자 세 사람을 추천받았다. 세 명의 건축업자에게 설계도를 주고서 1주일 뒤에 견적서를 제출해 달라고 말했다. 견적서는 바닥면적 1평당 비용으로 계산한다고 한다. 첫 번째 업자는 1평당 280만 원, 두 번째 업자는 320만 원, 세 번째 업자는 360만 원을 써내었다. 나는 가장 많은 금액을 적어 낸 건축업자를 불렀다. 봉평면 남쪽에 있는 대화면에 사는 사장님은 인상이 좋았다.

 

내가 사장님에게 말했다. “사장님, 나는 환경공학 교수니까 환경에 대해서는 조금 알지만 건축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릅니다. 세 사람의 견적서를 견줘보니 사장님이 1평당 360만 원, 가장 높은 금액을 썼습니다. 나는 사장님이 정직하게 비용을 계산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사장님에게 건축을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이 요구하는 날짜에 맞추어 건축비를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요구하는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설계도대로만 집을 지어 주십시오.” 건축비 1평당 360만 원은 지금부터 10년 전인 2015년 값이며, 지금은 자재값이 오르고 인건비도 많이 올랐다고 한다.

 

사장님은 집을 짓는데, 걸리는 시간은 두 달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집 짓는 인부들은 자기가 데리고 다니는 팀이 있다고 한다. 그 밖에 하수도 공사, 상수도 공사, 전기 공사, 정원 공사 등은 별도로 업자를 선정하여 따로 비용을 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잘 부탁한다고만 말했다. ㄹ 교수에게 건축업자를 선정했다고 하니 자기가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한다. 며칠 뒤에 ㄹ 교수가 봉평으로 내려와 집터에서 사장님을 만났다. 두 사람은 거의 두 시간 동안 설계도를 보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옆에서 듣기만 했다.

 

그 뒤 집을 짓는 중간에 사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현장에 한 번 와서 보라는 것이다. 나는 “건축을 모르니 그저 설계도대로만 지어 주세요”라고 말하면서 현장에 가지 않았다. 두어 주 뒤에 다시 전화가 왔다. “그래도 사모님과 함께 현장에 꼭 한번 와서 보라”는 것이다. 마침 한 여름이어서 우리 부부는 과일과 막걸리를 사 들고 현장에 갔다. 인부들에게 먹거리를 전달만 하고 그냥 돌아왔다. 나중에 들어보니 대개는 사모님이 현장에 한 번 나타나면 추가 요구사항이나 수정 사항이 있다고 했다. 우리 각시는 까다롭지 않아서 추가 요구사항이 없었다.

 

 

마침내 7월 말에 집이 완성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군청 직원이 와서 집을 살펴보고 갔다. 준공검사는 쉽게 떨어졌다. 건축업자는 집을 짓는 동안 한 번도 내 속을 썩이지 않았다. 나는 2015년 8월 초에 새집으로 입주해서 지금까지 10년째 잘살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