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때 아닌 서늘함에 자꾸 몸을 움츠리게 되는 아침, 비가 온다고 하더니 하늘이 많이 낮아 보입니다. 어둠의 끝자락을 잡고 서늘한 기운이 가시고, 묏마루 너머에서 밀려온 따스한 바람이 나뭇가지마다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어 주면 좋겠습니다. 늘 마주하는 소박한 이웃들의 사는 이야기들이 팍팍한 삶을 견디는 우리에게 '오늘도 살아낼 용기'라는 작은 선물을 건네는 듯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쫓기듯 집을 나와 저마다의 일터로 가기 바쁠 때가 많지만, 가끔은 길가에 핀 이름 모를 풀꽃의 고운 빛깔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기도 합니다.
이른 아침 가게를 여는 사람들의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에서 우리는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는 삶이 주는 높고 귀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합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속도에 맞추려 애쓰기보다, 내 안의 작은 설렘을 따라 천천히 숨을 고르며 하루의 첫 단추를 채워보고 싶어집니다. 오늘처럼 흐리고 서늘한 아침의 기운을 가셔주고, 메말랐던 우리 가슴에 따스함을 불어넣어 줄 토박이말 '발그레하다'를 꺼내어 봅니다.
'발그레하다'는 우리 마음을 수줍고도 환하게 밝혀주는 참으로 소담하고 예쁜 그림씨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 말을 '엷게 발그스름하다'라고 아주 정갈하게 풀이하고 있는데, 여기서 '엷게'라는 표현이 주는 여운이 참으로 깊습니다. 늘 우리말의 결을 생각하는 제 눈에는 이 말이 품은 '피어남'과 '설렘'이 그 어떤 아름답고 짙은 빛깔보다 더 값지게 다가옵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는 아침 노을이 하늘을 물들일 때나 부끄러움에 아이의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모습을 보며 이 낱말을 빌려 삶의 깨끗한 느낌을 나타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일부러 그리거나 입힌 짙은 빨간 빛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은은한 빛깔이기에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편안하게 해주는 셈입니다.
이 정겨운 말은 우리네 말꽃 지음몬(문학 작품) 속에서도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말로살아 있는데, 황순원 님의 소설 '소나기'를 보면 "소녀의 얼굴이 노을처럼 발그레해졌다"는 대목이 나와 첫사랑의 풋풋하고 순수한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박완서 님의 글 속에도 '발그레한 뺨을 비비며'라는 표현을 통해 식구들 사이의 살가운 정과 포근한 사랑의 온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일터로 가는 쳇바퀴 같은 길 위에서, 우리는 가끔 빛깔 없는 나날에 갇혀 나만의 고운 빛깔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눌림에 마음을 바짝 조이다 보면, 정작 내 얼이 어떤 빛깔로 반짝이고 있는지 살필 겨를조차 없기 마련입니다. '발그레하다'가 일러주는 삶의 슬기도 대단한 성공이 아니라, 내 안에 숨어있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다시 찾아내는 마음에 있습니다.
등굣길 아이의 손을 잡을 때 느껴지는 뭉클한 온기나, 정성껏 차린 아침 밥상 위에 내려앉은 햇살 한 조각이 우리 삶을 발그레한 희망으로 채우는 값진 불씨가 됩니다. 어둠이 물러간 자리에 빛이 스며들어 꽃을 피우듯, 우리도 거칠지만 참 마음이 어린 말 한마디로 누군가의 얼어붙은 마음을 보드랍게 녹여주어야 합니다. 좋은 삶,멋진 삶이란 높은 곳으로 내달리는 것이 아니라, 발그레하게 번지는 노을처럼 둘레와 어우러지며 서로의 아픔을 가만히 품어주는 일에 있습니다. 날카로운 비판보다 따스한 긍정의 빛깔로 서로를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평화에 닿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한 덤]:
오늘 식탁 앞에 마주 앉은 식구들의 얼굴을 가만히 보며 '발그레하다'는 느낌이 들 만큼 따뜻한 칭찬 한마디를 건네보시면 어떨까요? 엷게 번지는 그 발그스름한 웃음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환하게 밝혀주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길에서 우연히 눈이 마주친 이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나눌 때 느껴지는 쑥스러운 온기도 '발그레한' 삶을 만드는 아름다운 시작이랍니다. 남들과 견주며 나를 괴롭히기보다, 여러분만이 가진 은은하고 고유한 빛깔을 있는 그대로 아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당신과 함께 맞이하는 이 아침이 참 발그레하니 포근합니다"라고 속삭여보는 건 어떨까요?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가장 따스하게 물들인 빛깔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토박이말]
▶ 발그레하다
뜻: 엷게 발그스름한 상태
보기: 노을이 묏마루를 '발그레하게' 물들이는 풍경을 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한 줄 생각]
마음속에 발그레한 꽃 한 송이 품고 살면 세상은 언제나 봄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