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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이율곡과 잉태기념비 "판관대"

[반재원의 이야기보따리 1]

[그린경제/얼레빗=반제원 소장]  학자로서 역사상 이름이 높은 이들이 많다. 율곡 이이도 그 중 한사람이다. 율곡의 아버지는 판관 벼슬을 하던 이원수였다. 혼인한 지 1년쯤 되는 어느 날 아내 신사임당은 이원수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청춘을 즐기기만 하다가는 더 발전이 없을 것이니, 앞으로 서로 떨어져서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보고 싶을 때는 자주 왕래하면 되지 않겠어요?’

자주 왕래한다고는 하지만 한양과 강릉은 천리 길이니 말처럼 쉽지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원수는 부인의 제안에 찬성하였다. 남편이 처가를 떠나 한양으로 향하던 날 사임당은 대관령까지 배웅하였다.  

이원수는 몇 달에 한 번씩 아내에게 내려가 며칠씩 묵고 올라오곤 했다. 어느 때인가 이원수가 아내를 보러가는 길에 대화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대화라는 곳은 비록 산속의 마을이지만 지나가는 나그네가 많아 주막이 많고 제법 번화하였다. 긴 여행에 몸도 피곤하고 해도 저물어 이원수는 대화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마땅한 주막이 어디 있나 하고 기웃거리는데 어느 주막에서 여인이 나왔다. 여인은 이원수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손님은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지만 날도 저물었으니 저의 집에서 묵고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청하는 것이었다. 이원수는 묵고 가기를 자청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또 여인의 행색을 보니까 무척 깨끗해 보이므로 숙소도 깨끗하리라 여기고 그를 따라갔다. 들어가 보니까 과연 여느 주막처럼 지저분한 데가 없이 아주 깨끗하였다. 여인은 특별히 건넌방으로 안내했다. 이원수는 시장하던 참이라 차려 내온 저녁밥을 먹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문득 눈을 뜨고 보니까 방문이 열리며 뜻밖에 소복 입은 그 여인이 소반을 들고 들어오는데 술과 안주를 차린 주안상이었다.

 ‘손님께서 곤히 주무시는데 승낙도 없이 방으로 들어온 것을 용서하십시오. 집에 마침 술과 안주가 있길래 약주를 좋아하시면 드릴까 하고 가져왔습니다.’ 

초저녁잠에 피로도 가신데다가 여주인이 스스로 술상을 들고 들어와 권하는 것을 사양하지 못하였다. 술이 몇 잔 들어가니까 주인과 나그네의 사이가 허물없이 되어 갔다. 여주인이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보시는 바와 같이 상중입니다. 본래는 강원도 정선 사람이온데 이 집에 시집와서 보니까 신랑은 몹시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주막을 차리고 손님을 받아 그날그날 끼니를 이어 왔습니다만, 금년 봄에 알지 못하는 병 때문에 남편을 여의었습니다. 아마 팔자가 사나워 청상과부가 되었나 봅니다.’하고 자기의 딱하고 고독한 사정을 거침없이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원수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친절이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상중이라면서 한밤 중에 들어와 처음 만난 남자에게 청하지도 않은 푸념을 늘어놓는 행동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원수는 얼굴빛을 바꾸었다.  

‘밤이 이토록 깊었는데 더 이상 남여가 마주 앉아 이런 수작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알면 좋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기왕 차려 주신 술은 고맙게 먹었으니, 이제 그만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러나 여인은 웃기만 하고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았다.
‘정 들어가시지 않겠다면 비록 밤이 깊었지만 내가 집에서 나가겠소.’ 

그제야 여주인은 ‘저의 팔자가 기구하니 하는 수 없지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원수는 여주인의 뜻이 무엇이었던가를 대강 짐작하고는, 그렇게 무안을 주었으니 혹시 자기에게 앙심을 품고 무슨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해서 다시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날이 밝자마자 죄지은 사람처럼 그 집을 나왔다.  

그즈음 신사임당은 꿈을 꾸었는데 검은 용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오더니 자기에게 아기를 안겨주고 가는 꿈이었다. 그때 이원수를 만나니 그 반가운 마음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곧 태기가 있었다. 

율곡은 태몽에 걸맞게 나중에 조선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정치가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는 소과와 대과의 9번의 과거 시험에 9회 모두 수석으로 합격한, 과거제도가 생긴 이후 조선시대를 통털어 전대미문의 기록을 남긴다. 그는 ‘천지만물의 본래 근원은 하나’라고 하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정립한 대학자이다.  

또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으나 반대파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혀 수포로 돌아가자 나중에 조용히 백사 이항복을 불러 두 손을 잡고 당부하였다. ‘10만 양병 안이 결재과정에서 무산되었으니 조선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이오. 내가 그동안 임진강 나루에 정자를 지어 3년 동안 들기름으로 닦아놓았으니 임진년 비 오는 그믐날밤에 전하를 뫼시고 피난 갈 때에 나루터를 찾지 못해 위급한 일을 당할 것이니 그때 정자에 불을 질러 그 불빛으로 강을 건너게 하시오. 나는 그때 이 미 이 세상에 없을 것이기에 백사에게 이 일을 부탁하는 것이오’라고 뒷일을 당부하였던 선지자였다.  

율곡보다 한 세대 늦게 강릉에서 태어난 인물이 홍길동전으로 이름난 허균이다. 허균은 이무기가 구멍을 뚫고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는 강릉 앞바다의 바위 이름을 따서 호를 교룡(이무기)이라고 지었다. 허균은 불교와 문학과 도교에 심취하여 그가 원접 종사관으로 있을 때 순안에 살던 신선 한무외에게 한때 단학을 배웠다.  

또 그의 누나인 허난설헌의 시를 중국사신에게 전해주어 그녀의 시를 그 당시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하였다. 그는 민중의 이상향을 지향하던 자유분방한 지식인이었지만 자기를 총애하던 임금에게 백성들의 하인이 되라고 충고하다가 한 시대의 이단아로 낙인찍혀 결국에는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한, 시대를 너무 앞서간 풍운아였다. 조선시대를 통 털어 지금까지 복권이 안 된 마지막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운명은 그의 호대로 용이 못된 이무기였던가!  

이원수는 다시 부인과 작별하고 한양으로 가다가 중도에 또 대화에 이르렀다. 이원수는 문득 얼마 전에 그 젊은 과부에게 창피를 주고 인사 한마디 없이 나온 것이 생각나서 그녀에게 사과하고 위로해 주리라고 생각하고 그 집을 찾았다. 과부는 그 날 밤에도 자기 집에서 묵고 가기를 청하였다. 이원수는 지난날의 일을 사과하고 전처럼 건넌방에 보따리를 풀었다.  

여인이 들어와 말하기를,
‘제가 비록 배운 것이 없어 거리에서 주막을 하고 있습니다만 사람을 알아볼 줄은 압니다. 지난번 손님의 얼굴을 대했을 때 천하의 큰 인물을 낳을 기상이 있음을 알고, 그런 귀한 인물을 하나 낳아 볼까 하는 욕심으로 부끄럼을 무릅쓰고 손님방에 들어갔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귀인의 씨가 손님의 부인에게 잉태되었으니 다행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원수는 깜짝 놀랐다. 대체 이 여인이 어떻게 자기 아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런데 여인은 더 놀랄 말을 하는 것이었다.
‘부인 뱃속에 든 아기는 반드시 새벽 인시에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다섯 살이 되면 호랑이의 화를 입어 죽게 될 터이니 참 안됐습니다.’
이 말에 이원수는 다시금 이 여인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하면 그 화를 면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시오.’
하고 그는 간절한 심정이 되어 자세를 고치면서 물었다. 여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속담에 덕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손님께서 이제부터라도 덕을 많이 쌓는다면 아기의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덕은 1000명의 목숨을 살려야 하는 일인데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사람을 어떻게 살린단 말입니까?’ 

‘사람 목숨 대신에 밤나무 1천 그루를 심으면 사람의 목숨 1천명을 살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아이가 다섯 돌을 맞는 날엔 절대로 대문 밖에 내보내면 안 됩니다. 방안에다가 깊이 숨기십시오. 혹 늙은 중이 와서 그 아이를 보자고 하거든 절대로 보여 주지 마시고, 나도 덕을 많이 쌓은 사람이니 내 아들을 함부로 잡아가지 못한다 하시고 그 1천 그루의 밤나무를 가리켜 보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무사히 화를 면하실 것입니다.’ 

이원수는 여인과 작별하고 오던 길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한양으로 가는 것보다 이 이야기를 아내인 사임당에게 전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해 12월 26일 인시에 과연 신사임당은 옥동자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 율곡 이이였다. 때는 중종 31년 단기 3869년(서기1536년)이었다. 아버지 이 원수는 아들이 태어난 시각이 과부가 말한 호랑이 시각인 인시인 것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이원수는 서둘러 뒷산에 밤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율곡이 다섯 돌을 맞는 날이 되었다. 이원수 부부는 율곡을 안방에 가두어 놓고 방문을 꼭꼭 걸어 닫았다. 그리고 동네의 장정들을 불러다가 방문 앞을 지키도록 했다. 이원수는 의관을 단정히 하고 사랑방에 앉아서<주역>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날이 가기를 기다렸다. 정오가 되니 과연 한 늙은 중이 갈포로 짠 장삼에 갓을 쓰고 대문 앞에 와서 목탁을 두드리며 낭랑한 목소리로 염불을 하는 것이었다.  

‘나무관세음보살 마하살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 난제위~’
이때 대문을 지키고 있던 하인이
‘안에는 아무도 안 계시니 사랑채로 가 보시오.’
하고 말했다. 중은 이원수가 <주역>을 읽는 사랑방 앞에 왔다. 날씨가 추워서 이원수는 미닫이를 조금만 열고 내다보았다. 늙은 중은 이원수에게 합장한 다음 공손히 절을 했다. 

‘금강산 유점사의 중이 시주를 받으러 왔습니다.’
중은 이원수를 흘끗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댁엔 오늘 다섯 돌을 맞은 귀동자가 있지요? 부처님이 점지하신 그 귀여운 아기는 어디 있습니까?’
이원수는 주막집 여주인이 일러 준 말이 딱 들어맞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화를 내면서 큰 소리로 늙은 중을 꾸짖었다. 

‘네 어찌 나를 속이려 하느냐? 내 이미 덕을 많이 쌓았거늘 감히 내 아들을 해치려 하다니!’
그러자 늙은 중은 겁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흥, 댁에서 대체 무슨 덕을 많이 쌓았단 말이오?’
하고 음흉하게 비웃는 것이었다.  

‘이 뒷산에 밤나무가 1천 그루가 있다. 보려거든 가서 봐라.’
‘그럴 리가 있나? 괜한 소리 마시오.’
중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원수는 중을 데리고 뒷산으로 갔다.
‘똑똑히 보아라. 이게 밤나무가 아니고 무엇이냐?’
‘허어어….’

중은 감탄하는 것인지 낙담하는 것인지 모를 탄성을 울리더니 이번에는 밤나무의 수효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세어 보는 것이었다. 이원수도 자신이 있어서 중과 함께 밤나무를 세었다. 999그루까지 세었는데 나머지 한 그루가 보이지 않았다. 그 한 그루는 하인이 늘 소를 매어 두었기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죽은 나무였다. 이번에는 중이 노발대발하는 것이었다. 

‘흥, 1000이라고? 999이지 어찌 1000인가? 당신같이 정직하기로 이름난 사람도 거짓말을 하는가? 하늘의 명령이요 부처님의 명령이다. 어서 아들을 이리로 데려 오라. 만약에 거역하면 온 집안이 멸망할 것이야. 어서!’ 

아까와는 달리 서슬이 시퍼런 불호령이었다. 이원수는 매우 당황하였다. 이 중이 여느 중과는 다른 요물이 분명한데 대화의 주막집 과부가 단단히 일러 준 밤나무 1 천 그루에서 한 그루는 죽은 나무이니 이 노릇을 어찌 하면 좋단 말인가! 

이때 어디선가,
‘나도 밤나무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을 보니 거기에는 심은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도토리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소리는 그 나무에서 난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자 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늙은 중이,‘다틀렸구나, 어흥’ 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커다란 호랑이로 변하여 산속으로 달아나 버리는 것이었다. 몇 백 년은 묵은 둔갑 호랑이였던 것이다.  

율곡은 이 때문에 호랑이의 화를 면하고 무럭무럭 자라게 되었다. 그 후부터 그 나무는 율곡 아기를 살렸다고 하여 활인수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그 일로 하여 지금도 도토리나무를 ‘나도 밤나무’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율곡이 태어난 오죽헌 뒷산에 지금도 여기저기 자라고 있는 밤나무들은 그때 심은 밤나무의 후손들이다. 절대 절명의 순간에 이원수의 편을 들어 ‘나도 밤나무야!’라고 외쳤다는 그 신령한 소리는 바쁘게 앞만 보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그저 만들어낸 이야기를 넘어 ‘천지만물의 본래 근원은 하나’라는 신비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지난여름 집사람과 함께 봉평을 찾았을 때는 때를 놓쳐 <메밀꽃 필무렵>이 아니라 <메밀꽃 질무렵>이었다. 봉평 인근에는 이효석의 메밀꽃뿐만 아니라 <잉태기념비>라는 것이 있다. 소설 속 허생원의 메밀꽃은 알아도 그곳에 역사 속의 <잉태기념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것이 바로 신사임당이 시가(媤家)에서 이율곡을 잉태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판관대(判官垈)>라는 비석이다. 율곡을 낳기는 친정인 강릉 오죽헌에서 낳았지만 잉태한 곳은 시가(媤家)이었다. 바로 지금의 평창군 용평면 백옥포동이 비석의 소재지이다. 이 기념비는 아마 경북 청도군 이서면 구라동의 <양산석교>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잉태기념 비석이다.  

   
▲ 이율곡 잉태기념비 "판관대" 앞에서

필자는 메밀꽃 지는 들판을 돌아 나오면서 허생원이 나귀를 몰고 달밤에 봉평장에서 이 메밀밭을 지나 대화장으로 넘어가던 정경을 그려본다. 잉태기념비는 허생원이 대화장으로 넘어가던 그 길목 중간쯤에 서있다. 그 기념비는 율곡의 무병장수와 더불어 그 주막집 여인에 대 한 고마운 마음을 같이 담아 세운 비석은 아니었을까하는 아련한 상념에 젖었다. 그 여인은 비록 산골에 묻혀 주막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었지만 아마도 허균처럼 선도를 닦은 사람이었으리라.....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아도 율곡을 있게 한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주막집 여인의 예지력과 처방의 힘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그저 무심히 대할 뿐이다.